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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피아 시인 / 흔들리는 구름
흔들리는 구름이거나 눈 감아도 보이는 생각이거나 뒤척이다 돌아눕는, 창밖의 나뭇잎이거나 마취된 얼음 알갱이들, 그 날이 오면 먼지라도 될 수 있는 나는 얼굴에 뿌려진 미스트처럼 환자용 침대에 스며들고 있다
여행을 하다가 밤에 들었던 풀벌레 소리에 대해 말하고싶다. 수덕사를 돌아 나올 때 공기를 때렸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던 목탁소리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다. 먼지도 될 수 없는 소리를 생각하다 말고,
나는 싶은 수면에 든다. ……, "정신 차려 보세요." 병원 회복실이었나 보다. 간호사가 내 얼굴을 찰싹찰싹 때리며 먼지를 털고 있다. 그 날이 오지 않아서 잘 털리지 않는다고 궁시렁거린다. 나는 아직 먼지가 아닌가 보다
수피아 시인 / 사과의 방
사과 두 개가 나란히 몸을 맞대고 사과 하나에 애벌레 한 마리 들어갔다 나갔다 하는 그림이 있는 벽지 불을 켜면 알전구 빛이 주먹 하나 드나들 수 있는 창문으로 흘러 나가던 방 2교대 야간 일을 마치고 아침에 퇴근한 내가 사과를 열고 들어간 애벌레처럼 들어가 잠을 자던 방 부엌도 없고 무엇을 놓아둘 거실도 없는 보증금 없이 월세만 내어도 되는 방 문밖에 연탄 아궁이와 마당이 이마를 맞대고 있던 방 저녁에 일어나면 다시 공장 밥을 생각하며 들어왔던 문으로 야간 출근을 배웅해주던 방 애벌레처럼 사과 속에 몸을 말고 달콤한 잠을 잘 수 있었던 아주 작은 선산*읍의 그 방
*선산: 경북 구미시 선산읍 -시집 『은유의 잠』 (천년의시작, 2022)
수피아 시인 / 조화꽃이 피었네
유리창에 햇살 들면 뿌리가 막막한 성에꽃 흐려져 제 혈 뚝, 쭈르르 흐르는 걸 보았네 빛의 횡포에 성에꽃은 시들었네 반지하 셋방에서 나와 동생들의 어린 날이 저물었네 연탄 한 장 채울 수 없는 빈 아궁이는 가난을 주제로 한 보고서 같았네 밤새도록 엄마 손에서 향기 없는 꽃이 20초에 한 송이씩 피었고 꽃잎은 바람 한 점 없이 떨기도 했네 둘둘 말아서 뉘어 놓은 꽃대처럼 나와 동생들은 이불에 둘둘 말려 잘 잤네 엄마는 언제나 머리맡에 한 송이에 5원하는 조화를 가득 피워 놓고 밤을 새고도 시들지 않는 조화 꽃잎처럼 새벽이면 일을 나갔네, 엄마 덕분에 나와 동생들은 빛에 녹아 내리지 않는 조화처럼 살았네 햇살 없이도 초록 초록 징하게 짙은 이파리를 가질 수 있었네
수피아 시인 / 시詩
1 한 블럭도 되지 않는 건너편에 밤이면 십자가에 불이 들어오는 종교가 있어서, 날마다 어머니는 새벽 기도를 간다
2 한 뼘도 되지 않는 내 속에 태양의 열정을 가진 심장이 있어서, 붉은 피를 튀기며 질주하지만 나의 종교는 참으로 멀고도 외롭다
-시집 《은유의 잠》 중
수피아 시인 / 눈과 눈의 경계
어스름이 오는 저녁 날아가는 비둘기 머리 위에서 눈雪이 내렸지. 위에서, j의 배 위에서 펑펑, 나는 내렸지.
그것은 지난날이 되어버렸고 지난날의 우리였고 지난날로 돌아가고 싶은 j는 눈眼으로 들어갔지, 그러나 눈雪은 내리지 않았지.
j는 눈眼과 눈雪을 바꾸어버렸지. 눈雪은 시력이 없고. 올해는 최저 임금이 올라갔고 최저 시력은 떨어졌지.
둘의 차이가 수술로 좁혀질까. 눈眼으로 다섯 가지의 안약을 넣으면서 j는 투병 중이지. 눈雪이 올 것처럼 먼 데서 비둘기가 차갑게 날아오지.
수피아 시인 / 이삭 비가 왔다 새들의 지저귐을 놓치지 않고 들었다던 친구의, 사랑은 대단한 것이어서 주고 다 주어 쭉정이가 되었을 때에도 비는 왔다 내가 나를 지키겠다고 마음의 문을 꼭꼭 닫은 채 여물고 단단히 여물었으나 들판에서 혼자 다 익어버려 슬플 때에도 비는 왔다 나는 슬프고 익은 나를 줍는 사람들은 기쁘다, 나의 다 익은 슬픔이 누군가의 기쁨이 되는 순간에도 비는 왔다 비가 익어서 무지개 떴다 -시집 <은유의 집>에서
수피아 시인 / 고양이 한 마리가
네가 맨살로 일광욕을 즐기는 활엽수일 때
천둥 번개가 치는 날에는 물과 물을 연결하여 너의 창에 누구의 탓도 하지 않고 발을 헛디딜래
창 안에서 웃고 있는 너를 위해, 창밖에서 종일 울고 있어도 좋았다고 소리와 소리를 연결하는 매미처럼 창에 기대어 노래 부를래
다른 빗방울과 어울려 이 거리 저 거리를 헤매다가도 몸을 얻은 마음처럼 너에게로 누구의 탓도 하지 않고 발을 헛디딜래
너의 맨살을 타고 흘러내려 뿌리에 닿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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