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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황경순 시인 / 나무는 각도를 잰다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13.
황경순 시인 / 나무는 각도를 잰다

황경순 시인 / 나무는 각도를 잰다

 

 

나무들은 저마다 각도를 잰다

태어날 때부터 세상을 향해 뛰쳐 나오려고

땅속에서 저절로 배운다

 

은행나무 가지는 60도,

층층나무는 90도로 뻗고

뿌리 뻗기 60도, 잎 내밀기 120도,

봄날 햇볕 쪼일 각도 다르고,

한여름 땡볕 가릴 각도 다르다

 

오차는 없다 다만, 변하지 않는 원칙은

원의 범위라는 것,

휘어지고 버팅기고 더러 살아남기도 하지만

새로운 각도를 벌여야 한다

 

계산에 서투른 나무들은 끝장이다

 

우수날,

은행나무 한 그루 되어 눈꽃의 무게를 감당하면서

살아남을 각도로

손을 쭉 뻗는다.

 

-시집 <나는 오늘, 바닷물이 되었다> 2010. 문학아카데미

 

 


 

 

황경순 시인 / 꽃잠

 

 

동백꽃 한 송이 꼬박꼬박 졸고 있다

 

남해 바다 푸른 물결

하얗게 부서지는 물살 그리며

새하얀 동백꽃 한 송이

실눈을 뜬 채 꽃잠을 자고 있다

 

양지바른 의자에 앉아 햇살 쪼이는

머리 하얀 팔순 어머님,

내려앉은 눈꺼풀이 무거워

실눈을 뜨고도

별도, 나비도,

동백기름 발라 머리 빗던 처녀 시절

훤하게 보이시는지

입가에 희미한 미소 띄운 채

 

꽃잠?

한잠?

 

깜빡 졸고 계시다.

 

 


 

 

황경순 시인 / 소리가 맛이 되고, 맛이 소리가 되고

 

 

물봉선이 핀 숲에서는

모든 것이 맛있다

 

계곡물소리, 개미 지나가는 소리, 꽃잎 떨리는 소리,

분홍 입술 속에 가득 찬다

 

물봉선이 핀

숲에서는

모든 냄새가 음악 소리로 변한다

 

나뭇잎 향기, 벌레들의 먹이, 들꽃잎 향기가

분홍 귀 속으로 속속 빨려 들어온다

 

숲에서는 소리가 맛이 되고, 맛이 소리가 된다

눈도 귀가 되고, 귀도 눈이 된다.

 

 


 

 

황경순 시인 / 설산雪山

 

 

누군가

 

거대한 탁본을 했구나!

 

하얀 물감 찍어

 

일필휘지로

 

검은 세상을 새하얗게 씻어 주었구나!

 

한 번 더 찍어

 

얼룩진 내 마음도

 

새하얗게 덮어 주었으면!

 

 


 

 

황경순 시인 / 사랑의 유효기간이 끝나도

 

 

얼음구멍을 뚫고

얼음처럼 속이 훤히 비치는

별빙어를 낚는다

 

불빛을 찾아 모여든 별빙어 떼는

얼음구멍 속을 도는

투명체의 작은 별들이다

 

동심원을 따라 빛을 내며

빨려 들어오는

별들,

 

별빙어 떼는 강물에

찬란한 빛을 가득 풀어 놓는다

 

저 혼자서는 보이지 않는 별,

빛을 받으면 비로소 투명한 빛을 내는 별,

그가 있을 때

나는

나 자신이 투명하다 못해

스스로 빛을 내는 줄만 알았어

별이 많아지면 그가 돌아올 거야

 

불빛 하나로

자꾸자꾸 별을 낚는다.

열하나, 열둘, 열셋…

 

아무리 낚아도 줄어들지 않는 별….

 

 


 

 

황경순 시인 / 어머니와 등잔

 

 

이삿짐을 정리하다

잔뜩 웅크리고 있는 등잔을 보았다

하얗게 빛나는 몸

뚜껑을 열어보니 속이 까맣게 그을려 있다

 

궁핍했던 시절

심지 추켜올려 고단했던 식솔들

굽이굽이 비추어 주었을 불꽃

 

가물거리는 불빛 아래서

구멍 숭숭 뚫린 나날

한 올 한 올 엮어 나가셨을 어머님

닳아진 손톱으로 서캐를 꾹꾹 누르시듯

밤새워 삶의 그림자 삭혀내셨을 것이다.

 

산다는 것은 언제나

치렁치렁한 어둠, 거두어내는 일

가슴 속 심지 다 태워버린 등잔

허옇게 늙어 이젠 빈 가슴인데

어머님

어머니는 그 어디에서

이 밤도

불꽃 환히 비추고 계시는지요.

 

 


 

 

황경순 시인 / 육추기育雛期, 육추기育雛器

 

 

주말농장에서 주인처럼 매실나무에 사는

긴꼬리딱새의 육추기育雛期,*

새소리가 시끄럽다

인기척을 느끼고 더욱 요란해진다

하필 농막 가까운 곳에 둥지를 지었을까?

 

조막만한 새끼 한 마리가 툭 떨어졌다

자지러지는 소리, 소리

 

일부러 문을 닫고

자리를 피했다

 

날지 못하는 새끼 한 마리를

어미새, 아비새가

둥지 대신 다른 나무에 옮겨 놓고서야 조용하다

 

새들도 저렇거늘

어린 제 자식을 죽여 놓고

고의가 아니었다고

발뺌하는 화면들이 클로즈업 된다

 

생명이 있는 것들은 저절로 익히는 부모 역할,

그것도 모르는 이들을 위해 엄격한 자격증을 주고 싶다.

그래도 안 되는 생명 이하의 인간들에게는

인공 육추기育雛器 하나씩 안겨 주고 싶다.

 

* 육추기育雛期: 조류가 부화한 새끼를 키우는 시간

 

-『문학과창작』 2022-여름(174)

 

 


 

황경순 시인

경북 예천 출생. 대구교육대, 한국방송통신대학 경영학과, 국어국문학과, 백석대학교 교육대학원 문예창작교육 전공. 2006년 《미네르바》를 통해 등단. 시집 『나는 오늘 바닷물이 되었다』 『거대한 탁본』. 경기도 시흥시 서해초등학교 재직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