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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현미 시인 / 돌멩이가 외로워질 때까지
서둘러 밥을 먹고 낙산으로 산책가는 점심시간 산동네 담벼락에 누군가 그려놓은 낙타가 베란다 그늘에 서 있다 그늘 아래서 꿈꾸고 있다 시원한 꿈이겠다
내가 탐하는 그늘은 고비사막에 있다 내 더듬이는 한번 더듬은 것들을 지문처럼 새긴다
돌멩이가 외로워질 때까지 돌멩이가 외로워질 때까지
나는 그게 시라고 생각한다
서둘러 산책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가는점심시간
내가 먹은 밥은 그곳에 있다 나는 그게 시라고 쓰고 싶다
안현미 시인 / 갱년기
국숫집에 와보니 알겠다 호르몬이 울고 호르몬이 그리워하고 호르몬이 미워하고 다 호르몬이 시키는 일이라는 걸
매일매일 죽지도 않고 찾아와 죽고 싶다고 말하는 나는 누구인가?
국수 가락처럼 긴 사생과 결단의 끝
당신, 내가 살자고 하면 죽어버릴 것 같은 내가 죽자고 하면 살아버릴 것 같은
국숫집에 와보니 알겠다 크게 잘못 살고 있었다는 걸 크게 춥게 살고 있었다는 걸 그래서 따뜻한 국수가 고팠다는 걸
안현미 시인 / 짜가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시인은 죽었다'
허블 우주 망원경 블랙홀 시간의 띠(뫼비우스0와 공간의 일그러짐을 클릭하라 치사량의 열정과 눈물 한방울만큼의 광기와 고독 개미의 페로몬 같은 상상력을 복용할 것 보르헤스와 랭보와 백석과 소월의 키워드를 해독할 것 시인은 그렇게 복제된다
여기는 사이버 우주 사이보그 si-in 시인의 영혼을 처형하라! 그리고 낡은 시대와 서둘러 작별하라 시,인,은,죽,었,다
디스켓에 시인의 사리(舍利)를 저장하고 e-메일로 전송할 것 나는 온라인으로부터 왔다 나는 새로운 세상의 신(神)이다
이때 떠돌이 시인 등장 책상 앞으로 다가가 막을 내리듯 플러그를 뽑는다 (100년 동안 안전) 태초의 빛처럼 무대가 밝아지면 시인은 다음과 같이 원고 위에 적고 있다
짜가투스트라는......
안현미 시인 / 기타여
기타의 현을 끊고 시인의 노래는 서글픈 모음들을 술잔 속으로 빠뜨린다 비타민B가 부족한 야맹증 환자처럼 나는 캄캄하다 시인의 서글픈 노래만이 내 영혼의 귀를 하얀 붕대처럼 감는다 시시해서 죽이고 싶다가도 시시해서 죽이기 조차 귀찮은 그들 보다 더 시시한 나, 불멸할 질투와 애증, 살아온 날 동안 흘린 눈물 만큼의 술을 지고 무덤 속으로 들어가 나를 벗고 싶다고 지껄이는 환절기 저기 환속한 비구가 걸어간다 심장이 불덩이 같다 내 눈물이라도 얼려 먹어야겠다 지랄금지, 애인이 두고 간 포스트잍에 쓴 작별 인사 붕괴된 나라 러시아제 망원경을 들고 무용수들의 기형적인 발가락만 들여다 볼까? 노랑 풍선을 사고 노사모에나 가입할까, 어차피 나를 속일 거라면 죽을 때까지 속여줘! 내 말이 아니라 테라야마 슈우지의 말이 아니라 테라야마 슈우시가 돈을 주고 잔 터키탕에서 일하던 여자가 속삭였던 말이 오늘은 시처럼 들린다 시시하고 시시한 나라는 방에서 무덤으로 이동하는 게 인생이다 오늘은 자꾸 어딘가로 가려고 하는 영혼에게 책에서 훔쳐 온 문장 하나를 읽어준다 일주일 내내 현명하고 아름다운 사람은 없다
안현미 시인 / 우리 엄마 통장 속에는 까치가 산다
귀퉁이가 닳고 닳은 통장 지출된 숫자와 같은 앙상한 나뭇가지 하나 없어도 우리 엄마 통장 속에는 까치가 산다 고향 집 감나무 꼭대기 까치밥같이 붉은 도장밥 먹으며 우리 엄마 통장 속에는 까치가 산다 상처도 밥이고 가난도 밥이고 눈물도 밥이고 아픔도 열리면 아픔도 열매란다, 얘야 까치발을 딛고 나 엄마를 따먹는다 내 몸 속에는 까치밥처럼 눈물겨운 엄마가 산다
안현미 시인 / 뿐
개미도 참새도 물고기도 사무원도
세상 속 개미로 참새로 물고기로 사무원으로 살아갈 뿐
일상을 올올이 견뎌낼 뿐
다만 그뿐
-시집 <이별의 재구성> 창비 2009.
안현미 시인 / 수학여행 가는 나무
나무는 쓴다 우리 모두가 연루되어 있다고 겨울에도 봄에도 여름에도 가을에도 수요일에도 수요일에도 수요일에도 떠나 지 못할 거라고 쓴다. 결국 떠날 수 있는 건 없다고 쓴다 다만 울음이 바닥났을 뿐이라고 나무는 쓴다.
나무는 운다 굴뚝 위에 독재 위에 철탑 위에 올라간 사람들과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위해 나무는 운다. 우리는 까닭이고 바보라고 나무는 운다
뿌리는 간다. 어둠을 뚫고 바위를 타고 계급을 넘어 뿌리는 간다. 울음을 찾아 울음의 핵심을 향해 울음의 연대를 위를 뿌 리는 간다 사월로 오월로 세월에로 뿌리는 간다
나무는 난다 세계는 늘 위독하지만 특별해서 사랑한 것이 아니라 사랑해서 특별해진 이제는 돌아오지 못할 그 특별한 사 랑을 기억하며 기록하며 나무는 난다 나무는 날아오를 것이다
안현미 시인 / 암각화
구석기 시대 인류가 그림 일기장에서 말했어요
오늘은 바위산에서 염소를 잡았어요 다섯 명이 사냥을 나갔는데 내가 쏜 화살촉이 심장을 뚫은 것 같아요 뿔이 멋지게 휘어진 대장 수컷이었죠 닷새 후엔 세 마리쯤 더 잡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부족 모두가 배불리 먹을 수 있으니까요
풍요를 빌던 오래된 기억은 집단무의식이 되어 내리흘렀죠
저길 보세요, 암각화에서 기어 나와 고비의 초원에서 풀을 뜯는 염소와 양 떼
안현미 시인 / 그 사내와 살래요
세 살 아래 총각한테 시집왔어요. 귀가 안 들린다는 게 흠이지만 쟁기질도 잘하고 지게질도 잘하는 사내랍니다. 장난기가 일면 누님이라고 부르며 부엌으로 우물가로 졸졸 따라다니지요. 아프지만 아프지 않은 척 나는 산비탈 복사꽃이 되기도 하고, 늙지 않는 수선화가 되기도 한답니다. 사내의 귀가 되어 빗소리도 함께 읽고 새소리도 받아 적고요. 부엌 바닥에 신문지 깔고 밥상을 차려도 맛나게만 먹어주는 사내랍니다. 각시 앞서 죽을까 봐 땔나무도 산더미같이 장만해 놓았고요. 봄꽃 다 지기 전에 긴 손톱 자르고 뾰족구두도 다 내다 버리고 저 사내한테 살러 가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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