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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동확 시인 / 희미한 시간 너머로 우거진
너를 떠나보내야 했던 지난 세월 동안에도 다시 보이지 않는 너로 하여 나는 오래 아파오고, 지루한 장마의 구름층을 비집고 쏟아지는 여름 햇살처럼 따갑게 때때로 격정의 순간들을 반추하며 감당할 수 없이 깊고 푸르던 너의 들숨을 느낀다. 그리하여 차츰 부끄럼에 둔감해져가는 소년처럼 그렇게 대담한 표정을 지으며 너의 이름을 나직이 불러본다 그러나 내 수고는 헛되고 헛되 어느새 희미한 시간 너머로 우거진 그래 우린 억울하게도 옛사랑의 오솔길을 거슬러오른다 죄 없는 청춘의 한때를 마구 학대했으나 벌써 아무렇지 않다는 듯 세상은 여전히 딴청이다 그 골 깊은 그리움의 가을길엔 이미 팔짱낀 연인들로 떠들썩하고 정녕 돌아갈 때마저 놓치며 서로의 매력을 탐하는 환한 웃음 소리들 전혀 새로운 열망으로 달아오른 낯선 세대들의 입맞춤만 가득하다 그러나 난 그게 좋아졌다 어디서도 위로받을 수 없어 낙엽처럼 뒹구는 기억들이여 우리 제각기 아름다운 상처로 꽃피어 더욱 무성한 동산을 이루었나니 너로 하여 더 먼 들길로 나가 황혼 무렵 둥지로 무리지어 날아드는 즐거운 새떼의 환영을 보았나니
임동확 시인 / 나의 애국가
이제 우리들의 애국가를 ‘봄날은 간다’로 하자
더 이상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보우하는 하느님의 나라가 아니라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던 날의 까닭 모를 서글픔과 아련한 그리움으로 눈물 글썽한 살아있는 하느님의 나라를 노래하자
무궁화 꽃으로 온통 뒤덮인 삼천리 화려강산 혹은 철갑(鐵甲)을 두른 듯 바람과 서리에도 불변하는 남산 위의 소나무가 아니라 철 따라 살구꽃, 봉숭아꽃 피고 지는 우리나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을 가뭇없이 걸어보는 한 순정한 마음,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어줄 줄 아는 너와 나의 가슴 속 하늘을 만나보자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려는 혈통의 겨레붙이 또는 그 어떤 새 한 마리도 날지 않은 구름 한 점 없이 높고 공활(空豁)한 가을 하늘과 밝은 달의 우리나라가 아니라,
지켜질 수 없으나 포기할 수 없어 더욱 아름답고 애틋한 그 맹서 또는 그 일편단심을 사랑하는 나라,
괴로우나 즐거우나 무자비한 기상과 무조건적인 충성을 강요하는 저들만의 나라가 아니라, 사뭇 못 잊을 사랑 이야기 하나쯤 새파란 풀잎에 담아 강물 위로 흘려보낼 줄 아는 낭만의 우리나라를 세워보자
그리하여 우리들 모두 제 마음속의 애국가를 ‘봄날은 간다’로 하자
너무도 오랫동안 개인은 없고 국가만 있는, 누군가 애타게 기다리며 슬퍼하거나 기뻐할 대상조차 없는 지루한 장송곡을 그만두고 오늘도 청노새 짤랑대는 역마차 길의 목로에 주저앉아 꽃 편지 내던지며 한 잔의 술을 마실 줄 아는 그 하염없음과 어쩔 수 없음을 합창하자
기껏해야 동해물과 백두산에 멈춰 있는 바다와 국경의 경계를 넘어 저 시베리아 벌판으로, 파미르 고원으로 넘어가는 고갯길마다 서 있는 봄날의 성황당,
그저 무겁기만 한 의무감이나 밑 모를 책임감에서 벗어나 문득 별이 뜨면 서로의 등을 두드리며 웃고 또 별이 지면 서로 껴안고 울던 그 아득한 신화 속의 날들을 기억하자
기껏해야 제 핏줄과 뱃속만을 챙기는 힘센 자들만의 나라가 아니라 행여 실없는 맹서조차 끝내 저버릴 수 없어,/ 오늘도 눈물겨운 봄날의 찬란함 또는 덧없음을 국가(國歌)로 하는 그 알뜰한 우리나라로 어서 가자
임동확 시인 / 노제, 밤으로의 긴 여정
태어나기도 힘든 일인데 죽기는 또 이다지 힘든 것이냐
음이월 물오른 복숭아 나뭇가지에 흰 상여꽃 하나 덜렁 걸쳐 두고
어화, 그저 아쉬울 것 없다는 듯 다시는 못 올 산비탈 길 잘도 넘어가는데 일어나소, 일어나소 처자가 울부짖고 땅바닥에 주저앉아 딸들이 넋놓아 울고 어린 상주들 먼 산만 하염없이 쳐다보는데 쓰러질 듯 서 있는 주인 잃은 안가 살아 생전 종종걸음치던 동네 고샅길 앞 강물 뒷산 나그네처럼 휘 둘러보고 차마 다 끊어내지 못한 독한 인연들 짐짓 모른체 만가 소리 서둘러 앞서가는데 모두들 다 용서하시라 굳이 가는 자의 허물일랑 따져 묻지 말고 누구에게든 한때나마 가장 젊고 예뻤던 생의 날들만 기억되게 하라 어쩔 수 없는 태산 같은 미련이나 회한일랑 아예 헤아림없이 꾹꾹 다져 묻어 버리고 그래도 남은 아픔일랑 울타리가 노오란 수선화 한 떨기로 피어나게 하고
임동확 시인 / 무영탑
흔적 없는 슬픔도 때론 저렇듯 천년의 수직탑으로 우뚝 서 있다 그러나 이제 나의 안식은 목구멍에 피가 넘어오도록 게우고 난 뒤의 회한 같은 거 그 부질없는 시간의 속량속에서 나는 잊혀져 가는 것들에 저항하는 법을 배웠고, 동시에 그림자 속의 그림자로 남는 추억의 아름다움을 알았다 여기, 지상의 모든 희망이 절망의 다른 얼굴임을 보여주듯 오직 측량할 수 없는 과거만이 진실인 기억의 층계여 아무리 기다려도, 누군가 몸을 던진 그 늦가을 못물 위로 몸 체 없는 그리움의 석불 아로새길 돌덩이 하나 떠오르지 않아 그래도 다 어쩌지 못한 마음의 발자취를 따라 여기에 이르렀느니 재빨리 제 그림자를 거두워가는 저 11월의 저녁노을 속에서 도 홀로 남아, 끝끝내 지켜내야 할 그리운 약속이 있었으니
임동확 시인 / 큰 산에 피는 꽃은 키가 작다
드디어 여기에 도착했다 아직 만질 수 없고 닻지 않는 거리지만 기억하라, 수고로운 땀의 능선 긴 탄식의 강물을 지나 도처에 일어서는 철쭉의 시위 그리고 은밀한 안개의 방해를 뜷고 뿌리 깉숙히 이어지는 햇살을, 이제 더 이상의 악몽은 없다 그대여 상처받기 쉬운 지난날들을 되돌아보지 말자 그러나 한 생명도 빠뜨리지 않고 제각기 피어나 강력한 군집을 보라
거기 진리의 꽃무덤을 쌓고 다시 비바람치고 새 우는 저녁 스스로를 벼랑 위에 세운 채 자비를 구하며 지는 그늘 하나여.
임동확 시인 / 이수역
왜 후회는 늘 몇 구간씩 늦는 것일까 그때의 준비 없는 이별만큼 뜻밖의 재회 또한 그 어떤 말로도 변명되지 않아 망연자실 서 있던 이수역
그러나 널 그리기에 내 속에 네가 살아 있는 건 아니다 연이어 들어오는 오이도 또는 당고개행 전철처럼 어차피 되돌아오지 않거나 순환하지 않는 것들이란 저 두려운 터널 같은 기억 속에서 제 힘으로 푸르른 것
그렇듯 너와 난 처음부터 하나가 아니다 혹은 넌 어긋난 나의 열망을 채우는 저당물도 아니다 내가 네가 아니듯 넌 나의 소유물이 될 수 없는 것 끝내 되돌리거나 이뤄질 수 없는 운명만이 진실이다
너와 나 사이엔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있기에 아무것도 잊지 못한 채 장승처럼 변변한 작별인사조차 건네지 못한 한 시절의 열망과 금기를 노래한다 제아무리 원한다고 해도 상관없다는 듯 잔인하게 흘러가며 호소하는 것들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결코 하나일 수 없기에 붙잡을 수 없는 널 보내며 길어진 후회의 간격만큼 내가 아닌 너를 부른다 결국 너일 수밖에 없는 너를 통해 난 멈춰진 그 추억의 바깥으로 노숙자처럼 거칠게 끌려나간다 내 안에 더욱 커진 부재 속에서 소경처럼 널 찾으며
임동확 시인 / 방어할 수 없는 부재
세월이 세월인지라 모든 게 물 속의 잉크가 풀리듯 무엇이든 자꾸 묽어가는 게 탈이라면 탈이다. 어떤 식으로든 그만큼의 시간이 흐른 것이다 그래 이제들 내가 아니라 네놈이 누구냐고 是非를 걸고 그렇듯 우린 마치 고장난 축음기판이라도 되는 듯 여기저기 찌지직, 긁히는 소리, 악다구니다 지나온 자리를 더듬어가듯 제 뱃속으로 죽은 고기의 내장을 꾸역꾸역 밀어넣거나 혹은 토해내며 막 깐 새끼거북이처럼 온몸에 진흙을 처바른 채 모두가 필사적으로 시간 속을 기어오른다 차마 그런 축에 못 끼는 자가 추하게 보일 만큼 절정인 食道인 것이다 살아 있는 것만이 전부라는 듯 당한 자만이 억울하다는 듯 그 동안 의례적이라도 비워둔 자리마저 전혀 낯선 얼굴이 차지해버린 것이다 아니 방어할 수 없는 부재를 불러내어 멋대로 처벌까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새벽녘에 꺼져가는 화톳불과도 같이 망각의 재로 풀풀풀, 꺼져가는 존재들이여 그래 살아만 있거라, 오물 범벅의 양복 깃을 화장실 수돗물에 씻으며 목숨의 신을 섬겨라 어짜피 악연인 세상 속에서 그것 외에 별다른 방책이 없으리라 누구든 두 번 몸 받지 못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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