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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허혜정 시인 / 아버지의 선물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13.
허혜정 시인 / 아버지의 선물

허혜정 시인 / 아버지의 선물

 

 

그는 신간서적 하나를 건네주기 위해

낡은 소나타를 끌고 120킬로를 달려왔다

나는 기절할 뻔했다 하기야 오늘뿐인가

 

골머리를 싸매던 노트를 저 멀리 밀쳐두고

나는 작은 왕녀처럼 성장을 하고

아버지 손에 끌려나왔다

 

어느덧 성탄의 불빛으로 물든 거리에는

줄무늬 지팡이 같은 것을 매단 커다란 트리

넓직한 테이블엔 팔락이는 촛불과 달콤한 샐러드

커피밖에 모르는 아이에게 아버지는 말한다

먹어라. 건강을 돌봐야지

 

사람들 속에서도 나만 보고 걷는 아버지 곁에

나는 아이만 지켜보며 걷는다

떨어진 아이의 장갑을 주워주는

이 겸손한 남자의 사랑

 

그가 건네준 책은 다시 나의 램프다

당신이 사랑하던 책들은 내 책장에 꽂혀 있다

당신의 언어는 나의 말 속에 흐르고 있다.

혼곤히 아이가 잠들어 있는 침대맡에 기대어

성탄의 기적처럼 새 작품을 생각한다

별이 빛나고 있다

 

 


 

 

허혜정 시인 / 시인과

 

 

북적이는 연회장에 아픈 얼굴이 있다

 

방명록을 들치지도 않고, 기념사진도 찍지 않는

별달리 알아보는 이도

그의 외떨어진 걸음을 좇아가는 이도 없는

아무도 무슨 시를 쓰느냐고 물어보지도 않는

그저 수상자를 위해 찾아왔을 하객인 누군가가

 

특별히 만난 일은 없었지만

그대의 작품을 읽은 적이 있다

진실로 간직하고 싶었노라 말하고 싶다

무어라 할까, 이상하게 오래 남아 울리던 말들

어둠 속에 바삭이는 비밀의 필사본처럼 적막에 싸인 세계

 

낡은 목조 책상이 놓인 실험실을 떠올렸었다

그대의 책장에서 원소들이 담긴 유리병을 상상했다

마그네슘같이 흰, 또는 붉고 푸른 냄새와 맛을 간직한 가루

얇은 백지에 조심스레 쏟아낸 말들의 결혼을

 

불꽃반응을 관찰하는 아이처럼

신비스런 말들을 천천히 되새기면

알코올램프에서 팔락이며 피어오르는 휘푸른 불꽃

눈망울을 아리게 하던 불꽃

 

사각이는 글자를 온기로 물들이며

예민한 불꽃을 피워내는 영혼의 원소들

빛을 향해 끌려가는 침묵과 먼지 냄새 가득한 꿈

그대 언어의 빛은 얼마나 고적하고 슬펐던 것인지

 

 


 

 

허혜정 시인 / 미인도를 닮은 시

 

 

어디 옛 미인만 그렇겠는가

당신들은 내 문턱을 호기로 밟았다고 하지만

한 서린 소리를 즐기던 가야금이 그대들을 위함이라 믿지만

복건을 쓴 유학자든 각대를 띤 벼슬아치든 내로라하는 호걸이든

나의 궁상각치우를 고르고자 함이 아니었던가

죽어도 당신들은 한 푼 얹어주었기에

내 살림이 목화솜마냥 확 피어올랐다고 믿지만

풀 같은 데 엮어놓은 가볍고 얇은 거미집은

왕후장상을 부러워하는 법이 없다

당신들은 대대손손 선연한 낙관을 자랑하지만

붉은 공단치마를 활짝 벗어 화초도를 치고

흠뻑 먹물을 적셔 제 흥만 따라가던 족제비털 붓은

당신들의 필법을 배우려 한 적이 없다

모든 나들이를 취소하고 빗장을 걸어잠그는 시간

학이든 호랑이든 아닌 건 아닌 게지 되돌려보낸 서찰

혈통과 내력을 캐묻던 그대들이 나는 궁금하지 않다

천생 귀머거리 각시처럼 고개 갸웃거리다

아는 체하는 순간 기가 막히는 듯 웃는 나는

길섶에서 눈맞춤한 눈부신 하늘, 코끝을 스치는 바람보다

당신들을 사랑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곰방대를 물고 대청마루에 누워 바라보면

옥졸의 방망이도 능라의 방석도 소매 넓은 장삼도

구천 하늘 온통 희게 떠도는 춤사위일 뿐인데

팔도유람이 어찌 그대들만의 것인가

서늘한 흙무덤이 두 눈을 덮기 전에

죽음에 시치미를 떼고 멀리 나가 노는 아이처럼

곰팡이가 퍼렇게 슨 족자 속에 표구되어서도

나는 누구의 계집이었던 적이 없다

 

 


 

 

허혜정 시인 / 오골계

 

 

잘려나간 닭머리는 오이처럼 검게 썩어있었다

저무는 복날, 까마귀인지 닭인지 모를 새가

이 우주에 내질렀던 마지막 비명을

방금 들었다. 허기진 일몰

변두리 산야까지 번져가는 울음소리를

빼빼 마른 벼슬아치마냥 뜨락을 노닐던

명색만 남아있는 검은 새

살아있는 창자가 뽑혀나오는 소리

인간의 손이 비틀어 만들어낸 음악을 생각했다

잔인하고 무지한 식칼이 머리통을 도려내는 순간

천장까지 솟구쳤을 핏물이여

아직은 팔딱이고 있을 심장을 산턱에 걸어놓고

끝내 벗어나지 못할 태생의 울타리를 본다

황급히 도망치다 부딪쳤던 주인의 다리

몇 번이었던가, 으드득 죽지뼈가 꺾여나가던 순간

식탁마다 덕지덕지 놓여있는 전단에는

『본초강목』에도 『동의보감』에도 약용이라는 설명

알과 고기는 물론 피까지도 약효가 있다는 너는

그래서 혈통을 중시하는 품종일 것이다

설사 다시 태어나더라도

살과 뼈까지 검게 그을릴 존재

감칠맛이라 하는 것은 분명

메슥거리는 피맛일 것이다

앉을 자리도 없이 들어찬 이층방으로

홍삼까지 고아 넣은 보양식 메뉴셋트가 와도

검붉은 닭피를 뒤집어쓴 아이처럼

진저리치는 핀잔에도 혼자 굶고 있었다

언제나 이 메뉴만은 아니라고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허혜정 시인 / 자유시민을 위한 수확

 

 

그녀는 한달짜리 계집아이를

아파트 재활용 쓰레기통에 버렸다

쓰레기통에 구겨 박힌

검은 양복바지로 대충 덮어주었다

 

등 뒤에는 불 꺼진 수위실과

얌전히 주차장에 틀어박힌 자동차들

언젠가 저 검은 고급 세단 속에서

허벅지까지 젖어 그녀는 내린 적이 있다

백지보다 얇은 블라우스를 찢어대던 사내는

제 여자의 복부를 걷어차고

따귀를 갈겨대던 뺨에

담배불을 비벼 끄고 걸어나왔다

그녀는 어두운 거실 유리창 안쪽에

기대앉은 부서진 인형을 상상했다

혁대를 매고 있는 사내 앞에

숨죽인 비명을 질러대는 텅 빈 얼굴을

 

그러나 그녀는 이성적이어야 했다

이런 게임에선 조금 더 영악했어야 했다

코 앞에서 달아오르는 도시를

똑똑히 바라보아야 했다

작은 촛불이 반짝이는 공간에서

슬립끈을 내리고

악마같은 사내가 젖꼭지를 깨물 때

타오르는 구멍을 손바닥에 벌리고 있어야 했다

제 때에 버릴 줄도 알아야 했다

 

수증기가 끓어오르는 욕조 앞에서 면도날곽을 쥐고

함께 죽자면 벌벌 떠는 사내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리라

삶의 등성이를 제때에 기어오르기 위해서는

손톱에 낀 때같은 아이가

번거로운 존재란 걸

한 번쯤 쓰레기통에서 터져나온

울음소리나 실컷 들어보라고

침대로 기어드는 순간처럼 탄성을 지르며

엉덩이에 범벅이 된 월경을

수캐처럼 핥아대던 사내에게 구경해 보시라고

 

이런 더러움을 우린 견뎌야 한다

쓰레기통 바닥에서 기어나오기 위해서는

죽기까지 비명을 질러야 한다는 건

한달짜리 계집아이도 안다

 

 


 

 

허혜정 시인 / 해머절도단

 

 

그들은 개구멍으로 기어들지 않았다.

붉은 핏불의 뿌리에서

성난 망치를 들어올렸다

신문지에서 나의 동일범들을 본다

나는 안다. 먼저 그들은

철제 셔터를 구둣발로 툭 차보았으리란 걸

거리에 나뒹구는 맥주캔을 던져보고

유리진열장을 칼날로 긁어보았으리란 것도

 

행인이 흘낏대며 지나는 순간

재빨리 주먹을 주머니에 찔러넣고

닫힌 대형업소 앞에서 맴돌았으리라

내가 서랍에서 펜을 꺼내는 흐릿한 새벽 망치를 꺼내들고

이동통신 대리점, 금은방을

닥치는대로 두들겨 부수면서

고가품만을 트럭에 옮기고 마지막으로

망치를 조수석에 던져놓았을 걸 안다

 

그저 전에 먹던 것보다

더 멋진 걸 맛보기 위해

새롭고 근사한 것들을 구경하기 위해

대로변에 위치한 유리벽을 망치로 부수고

순식간에 고가품만을 싹쓸이했다

그러나 그건 이 국가의 재난이다

맛있는 걸 너무 많이 맛본 자들에게는

날마다 물리도록 멋진 것을 구경하는 자들에게는

 

때로 어두운 창가에서 나는

저 도시를 대형업소처럼 바라본다

재떨이를 비우며 일어서는 황막한 새벽에도

건너편엔 눈알을 짓이기는 휘황한 불빛

이제는 다른 세상처럼 보이는

사내들의 거리에는

돈이 흐르고 음악이 흐르고

사람들이 모이니 사회와 권력이 있고

 

갑자기 쓸모없는 교도소에

복역중인 재소자로 바뀌치기 된 나는

어두운 스카치잔에 불어오는 축축한 바람을 그리워한다.

그리고 거울 속에서 망치를 든 얼굴을 본다

돌아서는 등어리를 본다

낡은 부츠의 지퍼를 올리고

쇠같은 말들을 조수석에 던져 놓고

지도책을 뒤적이다 헤드라이트를 켠다

 

제땀방울로 개칠하던 상자 속의

텅빈 심장을 채워넣기 위해

술잔과 음악과 모든 것을

신속하고 치밀하게 가져와야 한다

하룻밤 사이에 서너 곳을 털고도

어질러진 현장에 절대 증거를 남기지 않고

 

그렇다. 나는 더 많은 것을 원한다

공창을 드나드는 벼슬아치처럼 여자를 갖고

피의 혈세를 변기 속으로 쏟아붓는 사내들처럼

나는 내 것이었던 세상을 되찾으러

도둑으로 내몰린 도둑이다.

아무도 조용한 새벽을 누릴 순 없다

나의 망치가 병든 철제도시를 다 두들겨 부수기 전에

 

 


 

 

허혜정 시인 / 바빌로니아의 주판

 

 

주판을 배운 것은 아주 잠시다

산수를 지긋지긋해하는 아이를

어머니는 주판학원으로 밀어넣었다

 

연필을 약지손가락에 끼우고

땅돌과 하늘돌을 처음 건드렸을 때

어머니가 기대한 건 무엇이었나

전속력으로 연산공식을 튕기는 아이들처럼

빈틈없는 암산으로 인생의 문제집을 풀어내길 원했는지도

 

한 줄 한 줄 너무나 정연해 아프던 나무구슬들

덧셈과 뺄셈으로 나뉘어진 세상과는 어울리지 않는

이상한 아이를 생각하고 있었다

 

헐렁한 소매를 축 늘어뜨린 팔 없는 아이가

묘기 쇼에 나와 발가락으로 주판을 놓던 장면을

알 굵은 주판알 소리만이 정적을 울리던 시간

왠지 모르게 가슴을 두드리던 소리

무엇을 위해 필요했는지도 모를

엄청난 숫자를 튕기던 아이

 

아이의 주판알이

계산기가 되고 싶었다고는 믿지 않는다

복잡한 계산 끝에 언제나 영으로 돌아오던 숫자

주판알처럼 만지작거렸을 단어들이

영원한 의미로 완성될 수 있다면

주판이 놀이가 되지는 못했겠지

 

확률과 통계의 문법에 춤추던 나무알들

그저 올라가고 내려가는 것밖에 모르는 셈법에 맞춰

내 인생을 튕기던 손가락이 아니라면

놀이가 비명이 되지는 않았겠지

 

단번에 주판대를 흔들어

모든 것을 헝클어뜨리는 보이지 않는 손

주판알들의 비명을 뉴스에서, 신문에서 본다

살대가 부러지고 주판알들이 튕겨나가는 소리를

 

외로운 주판알의 눈알로

처음의 주판을 나는 보고 싶었다

그저 모래바닥 선 위에 늘어놓았을 뿐인

바빌로니아인의 돌멩이 하나를

땅돌 하나로 건방지게

하늘을 침범하는 지구라트를 쌓은 고대인들처럼

숫자로 그려낸 천문도까지 꿈꾸었는지 모를 일이다

 

허락된 크기가 얼마만큼인지 몰라도

하염없이 부풀어오르다 어둠으로 빨려드는 우주

결국 먼지와 가스로 부서져갈 셈법을 알고 있는 별처럼

억에 억을 곱해도 셀 수 없는 별빛의 바다에 눈망울을 묻고

나는 찾고 있었다. 재와 먼지의 이야기

먼지와 재와 슬픔의 이야기

 

 


 

허혜정 시인

1966년 경남 산청에서 출생. 동국대학교 국문과 졸업 및 同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 취득. 1987년《한국문학》 신인작품상 시부문에 당선되어 등단. 1995년 《현대시》 평론상에 당선, 199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평론부문에도 당선되어 시인이며 평론가로 활동. 2010. 제11회 젊은 평론가상, 동국문학상 수상. 동국대 교양교육원 교수. 숭실사이버대학교 방송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