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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현상연 시인 / 어미 소의 이별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13.
현상연 시인 / 어미 소의 이별

현상연 시인 / 어미 소의 이별

 

 

아침 해가 솟으면

소가족은 풀밭으로 이동한다

어미가 말뚝을 벗어나지 않듯

새끼도 어미 둘레 돌지만

먹구름 낀 바람이 낯선 곳으로 이동하면

소의 울음은 불안해진다

 

새끼와 어미를 뗄 때가 되었다는

아버지 말에 어미의 커다란 눈에 눈물이 글썽였다

이별이라는 익숙지 않은 감정에 잠을 설치며

밤새 긴 혀로 송아지를 핥고

 

이른 아침,

소장수가 집에 들렀다

 

이별과 슬픔 사이에는 어미와 자식이 있어

새끼를 판 아버지도

슬픔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어쩌면, 송아지는 말뚝에 매여있을 때가

더 자유로운 것인지 모른다

구속이 풀린 속박의 자유가

더 큰 구속이 되어버린 송아지

어미 소의 슬픔이 끌려 나오자

트럭에 오르는 송아지

긴 생이별이다

 

 


 

 

현상연 시인 / 가벼운 풍선

 

 

아장아장 걷는 아이는 가벼운 풍선 같아

슬쩍 난간 밖으로 던져도

 

둥실,

떠오를 거예요

 

풍선을 막 띄우려는데

풍선의 엄마가 뛰어 왔어요

빼앗기기 싫어

창문 밖으로 휙 던져버렸죠

으앙!

놀란 풍선이 터져버렸어요

 

허공을 날던 마음이 쿵쾅거렸어요

 

분명 내가 던진 건 풍선이었고

누군가 던져, 던져버리라고 소리쳤어요

나는 엄마 말을 잘 듣는 착한 아이,

순간, 뒤돌아보며 씽긋 웃고

들리는 대로 던졌을 뿐이에요

 

가벼운 풍선은 왜 날지 못했을까

또 다시 어디선가 달콤한 귓속말이 들려요

 

누군가 내 속에서

헬륨의 음성으로 말하고 있어요

던져, 던져버리라니까!

 

 


 

 

현상연 시인 / 싱싱한 드라이플라워

 

 

카페 천장에 붉은 장미꽃이 매달려있다

 

싱싱한 목숨을 죽음으로 내던진 장미 한 다발

검게 시들어간다

 

잎과 줄기를 가지런히 모은 채 삭제된

어느 젊은 여자를 생각했다

안개 낀 강가를 서성이거나

이슬 맺힌 절망에 기대어

그 안쪽을 헤매다

어둠 쪽으로 똬리를 튼

 

넥타이는 꽃을 허공으로 들어 올리는데 한 몫 했다

 

가시 돋친 생각을 밀고 당기며

매달리고 싶거나 간절했을지 모를

들키고 싶은 경계에 그 꽃과 사내가 있었다

 

건조된 바람이 샛길을 따라 들락거리고

남은 자는 재생 할 수 없는 추억을 뒤적인다

 

어둠이 흘린 돌아 갈 수 없는 길

조금씩 피 말리는

유월의 카페 천장 드라이플라워

아직, 입술이 붉다

 

 


 

 

현상연 시인 / 이방인

 

 

명사십리 백사장

이방인이 모여 배구해요

탱탱볼이 연신 네트를 넘고

오고 가던 파도는 구경하다 사라져요

 

구릿빛 속살을 백사장에 묻은 여자

 

탱탱 볼이 넘어온 찰나

햇빛 안고 뒷걸음친 사내

순간, 모래 턱에 걸려 백사장과 포개졌어요

모래 속 비명이 허공을 찢어요

 

왁자한 백사장에 검은 선글라스가 달려오고

백사장은 사내를 성추행범으로 몰아요

강한 햇빛 탓이라고

반사된 빛이 볼을 감추었다고

앵무새같이 이방인이 설명해도

돌아오는 메아리는 변명이고요

진실이 거짓에 가려 입 다문 모래알들

생수 장사와 밀려온 파도가 목격자 진술을 했어요

애타는 마음 파도는 알지만

밀려온 바닷물은 입이 없어요

 

 


 

 

현상연 시인 / 저녁이 오는 병실

 

 

소꿉친구 병실을 찾았다

그녀의 아픈 기억이 단내로 훅 풍긴다

수없이 찔러대는 주사 바늘

병명의 취조가 끝난 후 그녀를 석방하기로 한다

들숨과 날숨의 파동이 일파만파로 번져

혈관 어딘가에 꼭꼭 숨어 핀

붉은 꽃

 

은밀한 병명이 술래잡기하는 가운데

그녀의 내력을 되짚어 본다

집안 한 켠

그녀 살을 발라 먹으며 제 키를 늘리는

앉은뱅이 꽃들

그녀는 육신을 조금씩 덜어내며

부러진 나뭇가지처럼 시들어 간다

 

삶이란 제 곪은 곳을 드러내는 법

단단히 채워진 그녀의 자물쇠가

무성한 소문에도 열리지 않는다

병명은 여전히 링거액처럼 흐르고

붉은 꽃만

저녁이 오는 병실에서 시들어간다

 

 


 

 

현상연 시인 / 회색소음

 

 

날짐승의 울음이 또 시작되었다

기계음의 시작은 이륙이다

빽빽하게 날아오르는 날갯짓,

활주로 주변에 떨어지는 은빛 비늘에

회색 숲의 진동이 시작되고 날지 못하는 미물들

팽팽한 고통을 출렁이며 하루를 버틴다

 

귀가 길어진 사람들,

송곳의 깊이를 재고

수시로 소리를 실어 나르는 기지촌 헬리콥터

익숙해진 일상에TV볼륨이 높아지고 말소리가 커진다

 

귀마개를 뚫고 들어오는 회색소음

방음벽을 흔들고

주파수가 높았던 귀는

어느새 난청과 접신하여 노랗게 시들어간다

 

비상을 끝낸 소리가 하나둘 귀로 착륙하고

 

초저녁,

또 다른 소음 부과를 알리는 초침이 잠을 끊는다

 

-시집 『가마우지 달빛을 낚다』에서

 

 


 

 

현상연 시인 / 폐허의 내부

 

 

평택 고덕지구 도로변

쇠락의 길을 걷고 있는 집성촌 주택들

 

바람이 건들거리며 곰팡이 핀 벽을 뜯어먹고

떠돌이 개들이 모여든다

허공의 무게에 철근 골조가 휘어지고

달빛은 공명의 발자국 뚜벅거리며

희미한 그림자를 마당에 풀어놓는다

싸늘한 아랫목에 때 절은 잠이 뒹굴고

문지방 위 빛바랜 액자,

떠나간 얼굴이 갇혀 있다

 

기척이나 생기가 사라진 건물은 어둠의 묘지

몇백 년 먼지를 둘러쓴 시간이 빠져나가고

기울어진 서까래에 적막이 거미줄 친다

 

철거라는 현수막이 걸린 담 밑

잡초는 봄볕에 땅을 이고 기지개 켜고

유빙처럼 떠도는 소문을 입증하듯

재개발 플래카드가 펄럭인다

폐허를 받아들인 건 사람들이다

 

-시집 『가마우지 달빛을 낚다』에서

 

 


 

현상연 시인

경기도 평택 출생. 한국 방송 통신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2017년 《애지》봄호 신인 문학상 수상 등단. 시집 『가마우지 달빛을 낚다』. 애지 문학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