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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정호 시인 / 두 걱정
오줌발처럼 할머니들의 이야기는 끊어질 듯 이어지며 쉼터의 여름밤은 어느새 자정을 넘깁니다 술냄새를 풍기며 잠든 트럭기사 아들의 자리를 살핀 후 106호 할머니는 오늘도 개를 데리고 나와 앉았습니다. 아까부터 할머니의 부채질은 개한테로 옮아가서 돌아올 줄 모르고 개는 묵묵히 할머니의 손길을 받으며 옆을 지키고 있습니다. 할머니는 개가 더울까 모기에 물릴까 걱정이고 개는 아들들 자랑에 한 마디도 끼지 못하는 할머니가 걱정인 겁니다
돌아오는 골목길, 두 걱정 사이로 별빛 하나가 따라 붙습니다. 여릿한 밤안개를 뚫고 가는 셋의 눈빛이 닮아 있습니다
석정호 시인 / 물뱀
1비트코인! 해킹의 혀가 까딱 웃는다 유학준비 파일은 산산조각 나고 청년은 칠흑 같은 길 끝에 선다 어디선가 나타난 고개 쳐든 물 위에 웃음이 순간의 울음이라면 찢긴 꽃잎이 햇빛더미라면, 찰나에 임신 사실을 알린 너의 며느리가 유산하고 노을 따라간 술자리의 뒤끝 폭죽 터지는 심장으로 배회하다 머리를 쪼개버리면 너는 어떤가, 개골창에서 찰랑대는 순간에 먹빛 눈물이 터지고 이승은 저승 안의 꽃밭 저 끝 간 데 없이 날아다니던 꽃가루 쟁쟁거리며 울리던 입 안의 소리 손이 가리키지를 않네 넘어진 등판 위로 또 넘어지는 너의 등판 횡행하는, 날름대는 이빨에
어쩌자고 덜컥, 물렸네
-시인정신 2017 여름호
석정호 시인 / 공항버스가 날아가네
저기, 챙이 넓은 모자 선글라스에 비친 원숭이 호수를 헤집는 아이들 풀꽃에 잠든 무사 플라맹코의 검붉은 여자가
사미센을 들고 신간센을 타는 아내 야자수 개울을 달리는 자전거 노래가 날아다니는 강 언덕 주사바늘을 달고 웃는 반달곰 빙하를 마시는 독수리 비취파라솔 아래 누운 김춘수가
날아가네
아, 저기 꽃무늬 셔츠를 걸치고 공항버스가
넥타이를 맨 전철 아버지가 담긴 시장바구니
집주인이 든 임대계약서 밤을 조각낸 위장 바람 들린 무릎의 뼈주사 첫눈의 파랑에 쓸리는 광장이
돌아오네
석정호 시인 / 배터리
아들의 엠피쓰리가 책상에 놓여있다 자세히 보니 배터리를 덮는 뚜껑이 없다 알몸을 드러내 놓은 채 엠피쓰리의 심장은 안간힘으로 붙어 있다 춥고 외로워 보였다 내 아버지의 집은 비가 새었다 머리맡에서 튀는 빗방울 소리는 밤새 식구들 잠의 뿌리를 말렸다 아버지는 욕설과 주먹을 심심찮게 날렸다 깨진 밥상과 함께 어머니는 밥알보다 작아졌다 빗물이 흘러들어오는 담장 때문에 뒷집과 싸움이 벌어지던 날 철철철 비에 젖어서 삿대질과 고함으로 맞서던, 칼날 같은 길을 품고 돌아오던 수금사원 아버지 가진 것 없어서 알몸이던 그가 배터리였다
-시집 <밀행> 2011년 문학의전당
석정호 시인 / 산수유꽃 오셨네
삼월에는 모진 바람이 분다 더 살아야 할애타는 목숨 하나를 사생결단으로 끌고 가듯 바람이 분다 삼월의 산수유꽃은 덮어 씐 황달이다 병실 침대에서 내려와 아들을 기다리던 누렇게 뜬 얼굴, 우리 아버지가 피워 올리신 꽃이다 저녁 어스름을 쓸어 담으며 키 큰 발길로 강을 건너시더니 얘야, 나는 잘 있단다 바람 타고 오늘 창밖에 오셨다 굽은 어깨 노란 얼굴을 흔들며 오셨다 삼월의 하늘에는 애 터지게 돌아오고픈 목숨들이 사생결단으로 저렇게 바람 타고 온다
-시집 <밀행> 2011년 문학의전당
석정호 시인 / 자두
너무 시큼하여 나는 칠색팔색을 하지만 당신은 보기만 해도 눈빛 영롱해지지요 오늘 길에서 만나 같이 간 시장에서 올망졸망 운동장의 아이들처럼 몰려 있는 그것들을 기어코 샀지요 당신 옷이 형광빛이어서 당신 뒤엔 빛이 따라다녀요 당신 손길이 닿자 과일들 생끗 웃는 것 봤어요 절망처럼 널브러져 있던 떡들도 입을 쫀득거리며 일어서는 것 봤어요 아무도 몰래 일어났다 어느 날 문득 안녕 하고 떠나는 게 절망이잖아요 당신 뒤를 따라가면 내 옆에 있던 검은 날개의 새들 어느새 하나둘 날아가고 없어요 집에 와서 마주보고 한입 베어먹으니 금단의 열매처럼 왜 이리 새콤한가요 찡그리는 나의 눈빛을 보고 재밌다는 듯 찡긋 폐부를 찔러 들어오는 당신은 정말 아직도 자두인가요
석정호 시인 / 고양이처럼 울 준비를 하고 있다
어깨에 달라붙어 몇 번의 발톱질이다 팔이 떨어져 나갔다 어제까지만 해도 의식의 순간마다 한발 앞서 튀어나가던 무명이라 불러도 좋을 이제 체불된 임금이라도 받으려는 듯 서자처럼 우는 무관심아
위장이 얼굴을 보였다 배고픈 발톱을 맞고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허기의 순간마다 아버지처럼 받아주던 있으나 없던 이제 강바닥을 뚫고 나와 삼지창을 찌르는 토막 난 밤 묵중한 소야
문득 소리치며 존재를 알리는 것들아 이제 너의 배경으로 서서 귀뚜라미 네 날개를 쓰다듬어 주마 절뚝이는 강의 다리를 잡고 너와 길을 건너겠다
매일 보는 눈은 보이지 않는 눈 매일 듣는 귀는 들리지 않는 귀 매일 여는 입은 열리지 않는 입 들어앉아 우는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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