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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리 시인 / 야상곡(夜想曲) 2
화성(和聲)의 아포자투라(appoggiatura)로 고백하나니 태어나 발목에 감고 있던 장미넝쿨이 죄인의 징표임을 알지 못했다, 아름다운 지옥의 울타리임을 빛으로 나아가려면 장미가시에 검은 피 흘려 천국의 계단에는 눈물의 흔적뿐 탯줄 끊긴 핏덩이처럼 지옥에 누워 깨어나지 못하던 밤 병상에서 창백한 나의 입술 포도주로 적시어 당신이란 제물로 죽은 나를 살리겠다던 약속 나의 이마에 신성의 빛 새겼다지만 당신의 레프리제(reprise)로 안기려면 나의 지문엔 차가운 안개뿐 사랑 시(詩)로써만 당신과 나 함께 존재하나니 이명동음(異名同音)처럼 당신의 이름 나의 가슴에 씨앗이 되어 장미넝쿨은 영원히 잠든 나를 밤의 아라베스크(arabesque)로
오주리 시인 / 병자성사(聖事)
1
목련이 순결처럼 피어나는 봄, 중병(重病)을 선고받아, 죄 없으신 성모마리아상 앞에 무릎 꿇어 눈물의 기도를 바쳤다
자살기도하던 칼 떨어뜨리시던 신이시어, 왜 이토록 고통스러운 죽음 주시나이까 차라리 백합향처럼 달콤한 죽음 주소서
젊은 신부는 하느님은 그러한 기도는 들어주지 않는다고 하였다
2
눈물 없이 시 쓸 수 없음이 병인(病因)이었을까
시는 나를 슬픔의 결정체로 태어나게 하여 세상에 스밀 수 없는 나만의 천상에 입관(入棺)하였다
시로 존재하기 위해 나는 슬픔의 음악이어야 하였으니 나의 시는 병의 앓음이었지만, 나의 시는 병으로부터 나음이었다
나의 시는 슬픔의 병이라는 이름의 나의 존재였으니 이 운명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3
역광으로 어두운 십자고상 아래 병자성사가 시작되었다
수단을 입은 젊은 신부는 나의 머리에 안수(按手)하였다
빛이 쏟아지듯 눈물이 쏟아졌으니, 빛의 묵시(黙示)가 어둠의 영(靈)을 몰아내었다
젊은 신부의 손으로부터 나의 이마로 성유聖油가 금빛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신이시어, 고백하지 않은 병인마저 당신은 이미 아시나이다 당신만이 나의 진실 아시나이다
4
고난의 사순(四旬), 그 마지막으로 가는 성금요일(聖金曜日), 사형집행인이 예수의 손목에 못 박아 붉은 꽃 십자가 로 피어나던 밤
마취재에 나의 눈이 감기고, 의사가 나의 가슴에 수술도(手術刀) 그어 붉은 꽃, 다시는 죄 없을 여체로 피어나리라던 밤
의사의 손끝이 나의 가슴에서 어둠을 들어 올렸다 어둠의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나의 죽음의 애인으로 부르던 그 어둠의 이름은
부활절 아침, 빗소리에 병상(病床)에서 눈을 뜨니, 팔에 꽂힌 관으로 링거액이 방울방울 떨어지고 있었다
창틈 사이로 봄비 냄새 들어와 깊은숨 들이마셨다
기억상실처럼 모든 것 잊었다 내가 누구인지조차도
-월간 《현대시≫ 2023년 7월호, '신작특집'에서
오주리 시인 / 세계의 문이 닫히다
당신이 떠나고, 세계의 문이 닫힌다 세계의 문이 닫히고, 바다의 문이 열린다
자살은 산 자의 것, 나의 죽은 영혼은 비수(匕首)를 입술에 물고 녹아가니 비수를 막아주던 나의 첼라*, 당신이 없는 밤바다의 파도는 나의 그림자를 끌어들인다
바다의 문, 암흑은 나의 이름 부르던 당신의 음성을 빼앗고, 해면(海面)에 나의 얼굴 가진 시인이 실서(失書)를 하면, 나의 새 이름은 무(無)의 영원
나의 신은 당신에 패배했다 당신의 자취를 따라 피어난 백장미는 나의 목을 고요히 감아 온다
바다의 문 사이, 백장미가 가라앉은 선을 따라 빛이 심연에 닿는다 시계바늘이 심연에 묻혀 물거품만이 죽은 숨결의 여음(餘音)이다 음악에 대한 기억이 빛간섭으로 남아 속삭인다 나의 첼라, 당신의 언어와 나의 언어가 화음(和音)이 되던 순간
다시 떠오를 수 없는, 형장(刑場)이라 하기엔 아름다운 이 어항(魚缸) 파도에 휩쓸려간 백장미가 석영의 부스러기에 쓰러져 눕는다 시간의 신은 통점(痛點)이 쓰라려 울던 자들의 살을 발라 죽음을 순결이게 한다 모래사장은 순결의 관(棺)들이 잠든 우주이니
나는 당신이 한순간 두 손에 담아 올린 바다에 살던 눈물의 생명체 이 바다가 모두 당신이 베어버린 신의 눈물에서 태어난 생명체임을 알기에 당신은 태양을 올려보았다 태초의 시간과 종말의 시간에 따로 사는 쌍둥이처럼 우리의 운명인 별회(別懷)
바다의 문이 열리고, 세계의 문이 닫힌다 세계의 문이 닫히고, 당신이 떠난다
* 히브리어로 갈빗대
오주리 시인 / 장미릉(薔薇陵) 1 시는 릉이다 자신 안에 고귀한 존재(存在), 신(神)을 간직한 자는 머리카락에 관(冠)을 흘린 채 영원한 잠 속에서 냉기로 숨을 쉰다 2 피아노 의자에 앉아 악보만 바라보았다 가슴이 건반에 닿도록, 숨도 쉬지 않는 듯 눈동자의 미동은 오너먼트에서 떨렸다 그것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악보였다 나의 손끝이 그의 악보에 흐르는 음의 고저와 속도를 따라갈 때 울려 퍼지는 음향이 천상(天上)에서 내려와 나의 안과 밖을 음의 환으로 둘렀다 모차르트의 오너먼트는 나의 목소리로 노래할 수 없는 영역 너머에 아름다운 음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가리키는 기호였다 고대문명의 문자처럼 아직 해독할 수 없는 진리의 비밀을 품은 것처럼 천상적인 존재성을 띠고 있었다 그 기호가 나의 시로 와 수사학으로 초재(超在)한다 ‘초재의 수사학’이라는 악보에 엮인 시어들이 지면 너머 내면의 시공에 선율을 그릴 때 시는 존재의 진리를 펼친다 유한의 경계를 입김으로 불듯 이 화성(和聲)을 위해 따르던 손이 바람에 장미를 놓지듯 멈출 때, 발레리나의 그랑쥬떼(grand jeté)처럼 날아오르는 비화성음들의 자유, 자유는 존재가 스스로 자신을 여는 창조이다 존재의 열린 문으로 부터 음들의 날개가 신(神)으로의 계단을 하나하나 놓는 것이다 신의 외존(外存), 신과 나의 거리만큼이 그에게 다가갈 수 있는 시간이다 그 시간이 살아있음이다 3 다시 나 자신의 존재로 돌아와서 거울 속에 여자의 형상인 나를 발견한다 나는 ‘하나’이지만, 불완전한 완전, 완전한 불완전으로 서의 ‘하나’인 것을 본다 거울 속 나의 음영을 짚어 숨을 불어보는 것은, 거기가 나의 빈 곳임을 차디차게 응시하기 때문이다 미래의 당신으로부터의 온기가 부재한다 거울에 얼음이 테두리 친다 빛의 부스러기가 떨어진다 나의 현재라는 시공에서 기댈 당신의 어깨가 먼 시간의 그늘로 유예된다 그러나 변함없이 ‘당신과 나’라는 ‘우리’를 믿는다 사랑의 공동체로서만 나는 고유해진다는 것을 믿는 다 ‘당신과 나’ 사이의 투명 위에 표현되는 언어는 장밋빛 상처의 음각에 바닐라를 녹인다 그 투명에 액자를 둘러 그것을 당신과 함께 창조한 나의 우주라 불러본다 무구한 영혼에 던져진 문자들을 세공하여 존재의 진리를 미(美)로까지 승화하는 표현존재(表現存在, Ausdrucksein)가 됨으로써 구원에 이를 것이다 ‘시의 성전(聖殿)’을 지키는 푸른 불꽃의 언어가 얼어붙은 탁자에 엎드린 나를 응시할 것이다 * Ausdrucksein: 하이데거의 『존재론-현사실성의 해석학』에서 계간 『상징학연구소』 (2023년 겨울호)
오주리 시인 / 눈물 형이상학의 서(序)
정원이 보이는 서재에 눈물이 떠 있다 진초록의 동그란 비애들 희랍어 어근의, 영생의 잎들 열매의 알 속에 우주가 있다 액체의 막에 둘러싸인 미미(微微)한, 불멸의 존재들 덩굴이 빛의 입자로 떠돌며 비어(秘語)로 우주의 교향곡을 일깨운다 신의 계단으로써 아직 이름 불리지 않은 책들을 쌓는다 나의 책은 문자의 고름을 서광 아래 날리고 백지로 다시 태어난다 눈물이란 잉크로 존재를 위한 형이상학의 서를 쓴다
오주리 시인 / 천사의 잉태
우)입 없는 '진실의 돌' 에 갇힐지라도 백합의 알뿌리에 싹이 틀지니 우)
친구, 천칭자리를 든 너의 손에 황금률의 리듬이 보여
친서親書의 이면
백합, 아흔아홉 비늘 흩어져 핏줄 없이 천사의 편족
-시집 <장미릉>에서
오주리 시인 / 생을 사랑할 마지막 시간
내 생의 마지막 장章 세상과 작별 인사를 위해 남겨진 시간
비 오는 4월의 벚꽃길 사랑한다 말하면, 나도 봄빛 수채화의 풍경이 되면, 신은 죽음의 병 오던 걸음 멈추라 할까
생을 사랑하지 않은 죄로 죽음의 병 찾아와 당신의 섭리 깨쳤으니, 신이시여, 이젠 눈물 닦아주소서
나의 짧은 생, 태어나 내내 우울이라는 생명체의 연인이던 나의 흰손 끝에서 태어난 건 눈물의 시뿐
메마른 벚나무 가지, 꽃눈은 봄밤의 어둠에도 피어났건만, 나의 여체만은 스스로 목 조르듯 이 세상 아니라 죽음으로 피어나는 꽃
비바람에 벚꽃잎이 나비의 영혼처럼 유계幽界로 흩날린다
존재하자마자 사라지는 꽃잎들, 시들고 마를 새 없이 꽃의 운명이란 떨어지는 것이니, 봄비에 벚꽃의 순간은 영원도 하였다
목숨이란 이처럼 가벼운 것을 목숨이란 가벼워 아름다운 것을
신이시여, 왜 하필 지옥보다 더 한 죽음의 길 주시나이까 나의 가슴 긋던 칼, 빼앗으시던 당신이여
생을 사랑하지 않은 죄, 죽음의 병은 신의 섭리 깨우쳐 주지만
생의 텅 빔이여, 나는 눈물로써 존재할 뿐 생의 텅 빔이여, 병 낫거든 무얼 위해 더 살아야 할까
생을 사랑할···사랑할 마지막 이 시간에
-『현대시』 2023-7월(40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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