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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구경 시인 / 짧은 시는 어렵다
1. 멸치 몇 마리로 국물을 내 국수를 말아 먹는다
국수 속엔 국수를 닮은 이야기가 있고 그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람들의 그 사람들이 거듭 얽혀 있다
국수, 짧고 긴 생명의 이야기
2. 쓸수록 어렵고 힘든 시의 본령
자르고 토막 내고 겹쳐진 의미의 말들을 거둬내고 너무 짧아져 여백의 미에 낙서하고픈 짤막한 또는 한줌
뭘 하자고 처음 생각했던가? 촌철살인
나이 먹어가며 하나씩 버리고 정리하는 것과 같이
박구경 시인 / 눈물바다
삐뚤빼뚤 글자가 기어 다니는 것 같아도 찬찬히 보면 엄마 편지다
해 좋은 날 바구미 먹은 팥 자루 밑에 숨겼던 찹쌀로 찰밥 해서 같이 먹고 싶다고 딸아
이 하나밖에 없는 엄마는 2000년에 돌아가시고 돌아오지 않았다 여태
박구경 시인 / 달걀 삶아 먹는 겨울밤은 깊고
지나가는 전깃줄 쉭쉭, 우는 그림자가 창문에 커튼에 다 떠나지 못한 누구의 울음처럼 찾아오는 밤 따뜻한 삶은 달걀을 먹다가 그만 사이다처럼 치어 오르는 아버지
박구경 시인 / 바보 삼촌
주렁주렁 매달린 붉은 감들처럼 담을 넘어 남루에 더벅머리가 잔칫머리를 벙글거리며 기웃거린다 시끌벅적 그저 사람들이 모인 게 좋은 듯 웃고 어슬렁거린다 눈 흘기고 있던 서울 막내딸이 쫓아낼 듯 핀잔을 주자 분주히 무얼 하던 큰딸이랑 막내고모 허리를 펴 빙그레 웃는다 저렇게 착한 이는 곰골마을 어디에도 없다는 것 같다 너도 아는 사람이라는 것 같다
박구경 시인 / 들녘이 서러운 가을에
시골길 가게에 뭘 사러 멈췄다 한적하다 한유하다 핸드폰 삐삐 누르다 말고 끊었다
어차피 못 잊을 사람들이 들판에 드문드문 서 있고 엄마 아버지 대신 사이다 같은 환타 같은 허둥거리며 처오르는 눈물이 있다 나 있다
박구경 시인 / 응시
치매에서 깨어 오똑 일어나 앉으니 마을 건너엔 꽃 한 송이 무얼 그리느라 환하고도 밝은 꽃
유리잔 가득 막걸리를 부어 붕어처럼 소리 없이 웃어요 엄마,
엄마는 두 살 박이 우리 아기
지금은 나
낡은 괘종시계가 마루에 걸린 마루 속의 낡은 괘종시계와 마주앉아
박구경 시인 / 전쟁이나 평화적인 것
전쟁은 터진다 평화는 불붙는다 그리고 조용해진다
극도로 평화만을 누려왔기에! 군수사업자와 석유재벌은 평화만을 갈구했다 또 다른 캐터필러를 밀어 넣고 전쟁복구사업을 하고 또다시 극도의 평화가 휩쓸고 간다
전쟁을 위해 오로지 전쟁만을 위해! 철부지 뒷집 아이처럼 생긴 부시가 배시시 웃고 CNN의 화면은SARS를 뿌려대며 아시아를 전면적으로 공략하기 시작했다
곧 아시아에도 군수사업자와 석유재벌의 평화가 닥쳐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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