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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구경 시인 / 짧은 시는 어렵다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14.
박구경 시인 / 짧은 시는 어렵다

박구경 시인 / 짧은 시는 어렵다

 

 

1.

멸치 몇 마리로 국물을 내

국수를 말아 먹는다

 

국수 속엔 국수를 닮은 이야기가 있고

그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람들의 그 사람들이 거듭 얽혀 있다

 

국수,

짧고 긴 생명의 이야기

 

2.

쓸수록 어렵고 힘든

시의 본령

 

자르고 토막 내고

겹쳐진 의미의 말들을 거둬내고

너무 짧아져

여백의 미에 낙서하고픈

짤막한 또는 한줌

 

뭘 하자고 처음 생각했던가?

촌철살인

 

나이 먹어가며 하나씩 버리고

정리하는 것과 같이

 

 


 

 

박구경 시인 / 눈물바다

 

 

삐뚤빼뚤 글자가 기어 다니는 것 같아도 찬찬히 보면 엄마 편지다

 

해 좋은 날

바구미 먹은 팥 자루 밑에 숨겼던 찹쌀로 찰밥 해서 같이 먹고 싶다고 딸아

 

이 하나밖에 없는 엄마는 2000년에 돌아가시고 돌아오지 않았다

여태

 

 


 

 

박구경 시인 / 달걀 삶아 먹는 겨울밤은 깊고

 

 

지나가는 전깃줄 쉭쉭, 우는 그림자가

창문에 커튼에 다 떠나지 못한 누구의 울음처럼 찾아오는 밤

따뜻한 삶은 달걀을 먹다가 그만 사이다처럼 치어 오르는 아버지

 

 


 

 

박구경 시인 / 바보 삼촌

 

 

주렁주렁 매달린 붉은 감들처럼 담을 넘어

남루에 더벅머리가 잔칫머리를 벙글거리며 기웃거린다

시끌벅적

그저 사람들이 모인 게 좋은 듯 웃고 어슬렁거린다

눈 흘기고 있던 서울 막내딸이 쫓아낼 듯 핀잔을 주자

분주히 무얼 하던 큰딸이랑 막내고모 허리를 펴 빙그레 웃는다

저렇게 착한 이는 곰골마을 어디에도 없다는 것 같다

너도 아는 사람이라는 것 같다

 

 


 

 

박구경 시인 / 들녘이 서러운 가을에

 

 

시골길 가게에 뭘 사러 멈췄다

한적하다

한유하다

핸드폰 삐삐 누르다 말고

끊었다

 

어차피 못 잊을 사람들이 들판에 드문드문 서 있고

엄마 아버지 대신

사이다 같은

환타 같은

허둥거리며 처오르는 눈물이 있다

나 있다

 

 


 

 

박구경 시인 / 응시

 

 

치매에서 깨어 오똑 일어나 앉으니

마을 건너엔 꽃 한 송이

무얼 그리느라 환하고도 밝은 꽃

 

유리잔 가득 막걸리를 부어

붕어처럼 소리 없이 웃어요 엄마,

 

엄마는 두 살 박이 우리 아기

 

지금은 나

 

낡은 괘종시계가 마루에 걸린

마루 속의 낡은 괘종시계와 마주앉아

 

 


 

 

박구경 시인 / 전쟁이나 평화적인 것

 

 

전쟁은 터진다

평화는 불붙는다

그리고 조용해진다

 

극도로 평화만을 누려왔기에!

군수사업자와 석유재벌은 평화만을 갈구했다

또 다른 캐터필러를 밀어 넣고 전쟁복구사업을 하고

또다시 극도의 평화가 휩쓸고 간다

 

전쟁을 위해

오로지 전쟁만을 위해!

철부지 뒷집 아이처럼 생긴 부시가 배시시 웃고

CNN의 화면은SARS를 뿌려대며

아시아를 전면적으로 공략하기 시작했다

 

아시아에도 군수사업자와 석유재벌의 평화가 닥쳐올 것이다

 

 


 

박구경 시인 (1956-2023 향년 67세)

1956년 경남 산청 출생. 경상대 간호학과 졸업. 1996년 《문예사조》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 『진료소가 있는 풍경』 『기차가 들어왔으면 좋겠다』 『국수를 닮은 이야기』 『외딴 저 집은 둥글다』 『형평사를 그리다』 등. 경남일보 기자를 지냄. 현재 민족문학작가회의·경남작가회의 회원, '얼토' 동인으로 활동 中. 제1회 '경남작가상' 고산 윤선도문학대상, 토지문학제 하동문학상 수상. 사천시북사동 보건진료소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