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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빈 시인 / 멜로
날개를 활짝 편 채 구름이 문지방에 걸터앉는다
곧 비가 내리고 어둠 속으로 태양이 얌전하게 발을 뺀다 검은 시간 밑에서 자라온 탓이다
비 맞는 하루가 녹아내린다
첫사랑을 벗긴 후 남겨둔 껍질에서 뒤늦게 향이 난다
별 것 아닌 말에서 톡 쏘는 맛을 듣고 잠깐 혀가 뻣뻣해진다
아랑곳하지 않고 비누를 문질러 거품을 내며 손을 씻는다 아슬아슬하게 떠 있던 거품이 물에 잠긴다 누군가 문을 열어놓았다
-『詩로 여는 세상』 2012 여름호
최호빈 시인 / 발치拔齒
너는 그 시각의 나를 목격했다는 말을 전해 들으며 어떤 인생으로 나를 밀어낸다
한 쌍의 소음 속 스스로에게만 결백해진 후 얼굴에 뒤집어쓰는, 잠시 긴 호흡 내가 끌어안는 불편함이란 이런 모습을 하고 있겠지, 라는 표정을 짓는다
수평이 사는 들판에선 나를 만나지 않겠다
내 몸 안에 들어와 나보다 더 아파줄, 약 같은 말들 진심에 잘 듣는 속삭임
대량의 슬픈 긍지를 작은 목소리에 공들이는, 대답하면 차분해지는 말 아름다울 정도로 건강한 미문迷文이 각 숨에 붙어 있다
심장에 가까운 손으로 너의 말버릇에 거슬리는 행간을 집으면 머릿속에서 기대했던 다른 꽃들이 내게 손짓을 한다 오라는 건지 가라는 건지 알 수 없는 인사 그런 손짓은 여행처럼 보이게 멀리 두거나 꼭꼭 씹어본다
배웅이 서툴러 쳐든 팔을 사라지게 만들 때 조바심 쪽으로 부는 바람 입 속에는 떠난 이들의 이름으로 가득한데 뽑아야 할 이齒하나를 나는 건전히 키워낼 수 있을까
최호빈 시인 / 그늘들의 초상肖像
외팔이 악사가 기타를 연주하는 하얀 레코드판 위로 한 아이가 돌면 걸음마다 붉은 장미가 피어난다 오선지에 적힌 외팔이의 과거를 한 페이지씩 뒤로 넘기면 검게 변해버리는 장미, 같은 자리를 다시 지날 때 멈추는 음악, 검은 장미의 정원 줄이 끊어진 듯 문은 닫히고 검은 레코드판 위로 한 줌의 꿈을 꾸었다고 고백하는 잿빛 음악이 무책임한 허공을 읽는다
*
안전선 밖으로 물러나주십시오, 안내 방송이 끝나기 전 먼저 도착한 바람에 몸이 흔들린다
*
태어나자마자 걸친 인간의 가죽이 낯설어서 울면, 목에서 흘러나오는 짐승의 잡음을 따라 다른 영아들도 울었다 우는 자에게 위안은 더 우는 자를 보는 것 전생과 후생 사이를 감지하는 나의 두개골은 밀봉되기를 거부했고 뒤늦게 나타난 간호사가 기껏 홀린 피를 지워 주었다 차지해야 할 자리를 잡지 못한 오감의 무중력 속 나는 갈라 진 틈의 눈으로 울다가 낯선 요람에서 잠을 깨기도 했다
*
울음마저 피곤하게 느낄 때 내게 열리는 것 보일 듯 말 듯 소중해지는, 잘 보이지 않는 것들이 움직인다
기묘하게 균형을 유지하려는, 책상과 옷장과 침대가 말없이 싸운다
젖은 옷을 입은 채 나를 말리기 위해 회의적인 귀를 바닥에 대면 잠든 나에게 속삭이는 누가 있다 집으로 돌아가진 못한 소식들이 무언가에 부딪혀 움푹해진 순간으로 흘러든다 예전의 마른 상태로 돌아가는 소매 팔보다 긴 그림자를 흔드는 소매
나조차 없는 느낌의 눈 속엔 아무도 없는데 속삭임이 멈추지 않는다 지금 내 귓속엔 하루를 순환하는 입이 살고 있다
최호빈 시인 / 착란錯亂
다음 해의 초록을 선택하려는 나무들이 껍질 속으로 떠난다 손끝에서 심장까지 검은, 햇살을 닮기 위해 저녁은 새의 단편을 따로 떼어 단단한 가지에 물들인다
어제의 길 위에서 다시 날개를 접는 새처럼 나는 그림자를 따라 그리며 저녁을 뒤진다 외로운 곳에선 그림자도 한 사람 눈을 감았다 뜨며 깜박하는 소리를 들으면 속이 궁금한 항아리처럼 천천히 볼록해지는 날들 바람이 불면 목소리를 잃어버린 영혼들이 인간이라는 창문을 긁고 지나갔다
검은 하늘의 내부에 숨을 남겨둔 물방울 비가 내릴 때마다 벌레 우는 소리가 내 이마에 감긴다 떠도는 집들이 담벼락에 난 자국을 따라 모이는, 별보다 밤이 빛나는 밤 외벽의 이끼는 다른 어둠에 귀를 기울였다
발을 내딛어 발자국을 구기듯 별들은 죽은 이의 가장 아름다운 꼬리를 닮아가고 떨어진 자리에 얼어붙은 낙엽은 어디로 갈지 아는 듯한 표정을 붙잡고 있다 불평 없이 걸음을 멈춘 구름과 골목에서 사는 동물은 그림자로 눈에 띄는 법을 알고 있다 먼 발소리에 일제히 움직인다 문득 고개를 돌렸을 때 마주하는 유리창의 이상한 침묵같이 숨을 멈추고 지나가는 길 손을 붙잡아도 나눌 수 없는 지문처럼 나는 홀로 주위를 맴도는 사람 흔한 얼굴들을 감추는 밤이 조용히 위태로워졌다
최호빈 시인 / 마린 스노우 marine snow
군청빛 세계에 눈이 내린다
지하철 문 옆에서 우리는 눈 속에 그려지기도 눈으로 지워지기도 한다 반복적으로 눈은 계속 내릴 것 같았으나 잠깐씩 역마다 그치고 사람들은 익숙하게 떠오르거나 가라앉는다
우리의 게임은 다의적이지 않았다 오늘은 당신의 차례 나를 무덤덤하게 더하거나 나를 무덤덤하게 빼거나 혹은 당신만을 열정적으로 부를 수 있었다
당신은 지금 나의 엄지손가락을 바라보고 있다 눈 속으로 당신의 열 손가락이 내린다 잊어줄래 새하얗게 게임은 즐기기만 해 당신은 무덤덤하게 더하거나 당신을 무덤덤하게 빼거나 혹은 나만을 허무하게 부를 순 없다
최호빈 시인 / 호흡공동체
먼 친척뻘 되는 사람을 만나러 갑니다 당신의 뿌리와 나의 뿌리가 아프리카의 깊은 땅속에서 만난다지요
먼 친척뻘 되는 사람을 만나려는 여행자들이 긴 줄을 만듭니다 공항을 한 바퀴 돌고 와도 줄은 그대로입니다 줄이 아프리카의 깊은 땅속에 먼저 도착할 것 같습니다
밤이 되면 비행기는 거꾸로 날아갑니다 새가 달 속에 있는 위를 봐도 달이 구름 속에 있는 아래를 봐도 뜻밖의 별이 있는 광경을 보게 됩니다 10만 년 전에 사라진 별빛과 15만 년 전에 사라진 별빛이 함께 날아갑니다
오래전부터 서로 다른 종끼리 짝짓기를 해왔던 우리들의 이주가 시작됩니다 10만 년 전으로 15만 년 전으로
서로가 서로를 몰라보는 풍토병에 걸린 것처럼
최호빈 시인 / 거미집에서의 밀회
숨죽인 채 별들은 지붕의 결을 따라 귀에 고이도록 검은 젖을 흘리고 각기 다른 궤도로 핏줄기가 점점 얇게 퍼져가는 눈꺼풀로 밤이 고백처럼 스며든다
잠들었던 걸까, 거미가 세밀하게 제도製圖를 했는지 시계視界엔 유례 없는 안개가 포개어져 있다 방울방울 촛농들이 식어가며 색의 변천사를 써내려갔던 수 세기 중심을 잃은 것에 대해 아름답게 변명하고 싶다 제때에 눈물이 나온다면
지붕에 올라 달의 사열을 받을 때 텅 빈 하늘의 배후背後에서 들려오는 생각의 냄새 멀리서 구름을 입에 문, 빨간 맨발의 아이가 춤을 추며 날아든다
무너지는 별들의 기하학적 성채, 공석空席들 나는 언어의 형태로 데생된, 감히 물감이 닿지 않는 기사騎士.
한때 울타리였던 목탄으로 동그라미와 사과 반 쪽을 뒤섞으며 거칠게 밤을 지새워도 죽은 씨앗을 골라 줍는 새벽은 온다 내 속에 비친 길마저 아득할 것처럼 하늘에선 여전히 어떠한 결점도 발견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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