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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길 시인 / 직립을 소원하다
전동 휠체어를 탄 노부부가 막비 그친 아스팔트 길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가고 있다
가지런히 접힌 무릎 위에는 조그만 손가방 하나
손가방 속에는 귀가 다 닳은 성경책과 꽃무늬 손수건과 돋보기 안경이 착하디착한 표정으로 포개져 있다
절벽을 지나는 듯 심각한 표정으로 앞만 보고 가는 노부부를
어떤 이는 가없다 하고 어떤 이는 그래도 둘이라며 다행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저렇게라도 다닐 수 있는 것이 부럽다 하고
나는 그들을 따라 교회 문 앞까지 가다 되돌아오고 만다
아직 다리가 성하기 때문이라며 나의 미래를 걱정하지만
두 발로 걷게만 해달라고 밤낮없이 기도하며 착하디착하게 살아가는 저 부부의 다리를 기어코 분질 러 앉혀 놓은
저들의 신이 지옥보다 더 무섭기 때문이다
-시집 『입으로 쓴 서정시』 (2019. 9. 천년의시작)
조은길 시인 / 8월
풀지게를 한쪽 어깨에 걸치고 들로 나가신 아버지는 아가리가 석류 속 같은 뱀 한 마리를 지게작대기에 친친 감고 돌아오셨다
어머니는 황급히 마당가 무쇠솥단지에 장작불을 지피고 아버지는 그것 을 무쇠솥바닥에다 패대기치고는 잽싸게 솥뚜껑을 눌렀다
나는 뱀이 솥뚜껑을 컹컹 치는 소리에 놀라 집 밖으로 튕겨 달아나고
처음으로 어머니아버지가 징그럽다고 생각했다
그날 밤 아버지는 모깃불 한복판에 시퍼런 쑥대다발을 꽂아놓고 어머니 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온 집에 뱀 비린내와 쑥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뱀이 붉은 아가리를 치켜들고 방으로 기어들어오는 꿈을 꾸고 놀라 깨어 보니 아버지 코고는 소리가 방구들이 크렁크렁 울렸다
처음으로 내가 징그럽다고 생각했다
머리맡에는 창을 넘어온 달이 죽은 모시나비처럼 주저앉아 있었다
조은길 시인 / 거북이는 그때 바다로 갔다
나는 왼손잡이였다 갯벌을 옆걸음질 치는 게처럼 숟가락을 쥘 때도 연필을 쥘 때도 흙장난을 할 때도 아버지의 눈치를 살폈다
나는 형을 제키고 아버지를 제키고 싶었다 형과 이리처럼 뒹굴며 씩씩거렸다 어쩌다 형이 코피가 터지는 날엔 아버지께 뺨을 얻어맞았다
사람이 슬픈 까닭은 사람의 천적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세상에 없는 그릇 하나 빚어내고 싶었다 흙을 주물러 맨 처음 빗살무늬를 그려 넣던 사람처럼 그런 그릇 하나 빚어내는 기쁨으로 내 서글픈 강을 초연히 건너가고 싶었다
나는 날마다 그릇을 깨뜨렸다 바람이 부는 날엔 내 안에서 하루종일 그릇 깨지는 소리가 났다 그런 날엔 죄인처럼 뺨을 쥐고 아버지의 눈치를 살폈다
햇살 환한 운동장에서 음악에 맞춰 율동하는 아이들을 보면 팔딱팔딱 이리저리 발맞추는 아이들을 보면 덜컥 겁이 날 때가 있다 저 푸른 벽 뒤에 전능한 누군가가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아 교회에 뛰어 들어가 무릎 끓고 싶을 때가 있다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고 싶을때가 있다
거북이는 단 한 번도 저 밀려오는 검은 파도가 무섭지 않았을까
조은길 시인 / 샅바
눈뜨자마자 호각소리 쩌렁쩌렁하는 씨름판을 전전하던 그 사내 장딴지가 객사기둥만한 몸 꾀가 남달라 한창 때는 샅바만 잡았다하면 상대의 등짝을 모래바닥에 파묻어버리는 소문난 씨름꾼
서릿바람 사납던 늦은 가을날 서리 맞은 초목처럼 판판이 엎어지고 자빠지더니 술 끊고 담배 끊고 여자마저 끊고 너덜너덜 헤지고 헐거워진 샅바 산속의 산속 청산노인요양병원 일회용 똥오줌샅바로 갈아 차고부터
반으로 줄어든 밥 반으로 줄어든 물 반으로 줄어든 기억
칸막이커튼이 절벽처럼 둘러싼 청산노인요양병원 한 뼘 침대 위에서 마스크를 쓴 간병인 여자와 엎치락뒤치락 마지막 샅바싸움을 하고 있다
-《서정과현실》 2013. 하반기호
조은길 시인 / 꽃과 시와 히키코모리
아가야 이 꽃 너무 예쁘지 향기도 끝내주지 지금 문밖에는 이 꽃이 만발했단다 이 꽃 옆에는 천리향꽃 개나리꽃 매화꽃 목련꽃 벚꽃 명자꽃 진달래꽃 복사꽃 라일락꽃 모란꽃 백합꽃 장미꽃 수국꽃이 만발해 세상이 온통 꽃천지란다
어서 문을 열고 나와 보렴
아가야 어쩌자고 엄마 말을 못 믿는 거니 그럼 저 꽃들이 피는 족족 꺾어서 너에게 보여 줄게 엄마가 꺾어준 하나같이 순하고 어여쁜 꽃을 보며 향기를 맡으며 골똘히 생각해 보렴
이토록 순하고 어여쁘고 향기로운 꽃천지에서 무슨 나쁜 냄새가 생겨나겠니 누가 누굴 시기 질투하고 뒤통수치고 배은망덕한 일을 꾸미겠니 도무지 말이 안 되잖아
어서 문을 열고 나와 보렴
아가야 엄마가 꺾어준 그 많은 순하고 어여쁘고 향기로운 꽃을 직접 만져보고 향기도 맡아보고도 어쩌자고 엄마가 문밖에 나갔다 올 때마다 몸에서 이상한 냄새가 난다느니 표정이 너무 어둡다느니 시가 너무 어둡다느니 억지 핑계를 대는 거니 도무지 말이 안 되잖아
제발 정신 똑바로 차리고 똑똑히 들어 지금 문밖에는 네가 제일 좋아하는 이 꽃이 만발했고 엄마는 꽃처럼 사랑받고 싶어서 문밖에 나갈 때마다 꽃향수를 온몸에 뿌리는 시인이고 문밖에서 엄마가 만나는 사람이라야 꽃향수 풀풀 삐져나오는 시인뿐이고 엄마는 시를 썼지 일기를 쓴 게 아니잖니 저저증말이야 증말이라니까 제발
조은길 시인 / 장미
너를 사랑하기 시작한 그 날부터 너는 세상의 모든 것이었다
옆집 담장 너머로 통통한 장미가 피어날 때나 하얀 우유 거품이 얹어진 카페라떼를 마실 때나 발 끝에 동그라미를 그리던 빗방울을 볼 때에도 나는 너만을 생각한다
어느덧 너는 내 삶의 전부가 되어버렸다
미치지 않고서는 사랑할 수 없으리
조은길 시인 / 토끼 이야기
우리에 감금된 채 털을 빼앗기고 온몸을 난자당해 죽는 짐승이 있다 피비린내 앙등하는 주검 위로 불덩이 같은 해가 뜨고 해가 지고 천 년이 흘렀다 살아남은 피붙이들은 틈만 나면 머리를 맞대고 우리를 빠져나갈 궁리를 했다
누구든 어떤 예리한 감각으로도 감지하지 못하는 극한의 구렁텅이는 있기 마련인 것
그들이 가슴을 치며 후회하는 것은 천 년 전에 검은 부리 독수리들이 우글거리는 밀림이 싫어서 이곳으로 망명해 왔다는 사실이다
겁먹은 듯 등을 바짝 웅크리고 빨갛게 뜬 눈으로 연신 사방을 살피며 낮고 연한 풀잎만을 고집해서 먹는 것은 밀림의 시절 검은 부리 독수리를 피하려다 붙은 어쩔 수 없는 습관이겠지만 그것이 그들의 살결을 연하고 향기롭게 하고 털을 솜처럼 따뜻하고 부드럽게 하는 치명적인 결점이 되고 말았다
천 년 동안 수많은 신이 그들의 우리를 다녀갔지만 그들에게 등을 쭉 펴라든가 낮고 연한 풀잎은 먹지 말라든가 우리를 빠져나가는 방법을 귀띔해주지는 않았다
-<문학수첩> 2007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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