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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서정화 시인 / 사과와 피아노의 거리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14.
서정화 시인 / 사과와 피아노의 거리

서정화 시인 / 사과와 피아노의 거리

 

 

야생장미 노래의 독

흔들리는 중심

 

건널목 가는 허리가

뱀의 사슬 휘감는다

 

멍하니 앉은 몸으로 열린 채 닫힌 두 눈

 

수원역*

거칠게 오려붙인

밤의 얼굴

정육들

 

*청소년 보호구역.

 

 


 

 

서정화 시인 / 대나무의 서書

 

 

대숲 여는 행간 사이

 

뼈의 활자가 새겨있다

 

밀경密經으로 길어 올린

 

대바람 갈피마다

 

소리가

 

곧게 세운 길

 

한 권에 들어있다

 

-《가람시학》2022. 제13회

 

 


 

 

서정화 시인 / 눈먼 자들의 도시

 

 

고뇌에 찬 춤곡이 절절이 울려 퍼지는

이태원가 가면을 쓴 틈에 끼여 몸을 섞고

어둠에 얽혀 들어가 민얼굴을 더듬어 본다

 

흔들리고 비틀대다 사납게 짖어대던

강철로 된 관棺 안에 갇힌 시간이 멈춘 채로

조문길 구름의 신발들 비의 거리로 출렁인다

 

안개의 미로로부터 늘어서서 보던 장님들

시간의 흰 해골이 줄을 잇다 전락된

눈 먼 길 마음이 닫힌 그 속을 걷고 있다

 

-《시조시학》2022. 겨울호

 

 


 

 

서정화 시인 / 물구나무종

―주산지*

 

 

책을 여는 행간 사이 뼈의 활자 새겨있다

별바위 곁 춤을 추다

물 위에서 구부러지고

계절에 재깍거리는 나뭇잎들 거느린다

 

공통되는 세계와 태어나는 전망들

세상과 동떨어진 시간 활활 타오른

안으로 영원을 꿈꾸며

너머를 나아간다

시대의 어둠 안을 통과해 읽어내고

종이가 한 허공을 밀며 가는 소리들

장엄히 서늘한 그늘 핏빛 연륜**이 감기었다

 

*경북 청송 주산지

**연륜 : 나무의 줄기나 가지 따위의 단면에 나타나는 둥근 테.

 

-《가희》 2023년 가을호

 

 


 

 

서정화 시인 / 반얀나무*

 

 

뿌리들이 땅을 뚫고

일제히 솟아 있다

 

가지마다 기둥이 된

사원의 나무 한 채

 

모두가 한 몸이 되어

허공을 받들고 있다

 

널따란 품 안 가득

그늘이 물든 소리

 

뒤틀리고 휘어져도

제 안의 길을 가는

 

갈라진 힘들이 모여

푸르게 퍼 올린다

 

바깥으로 가는 길은

다 하나로 통한다며

 

찬이슬 맺힌 가지

소름 돋듯 빛날 때

 

어둠의 발끝에 닿아

함께 몸을 흔들었다

 

*반얀나무: 뿌리가 내려와 땅에 닿아 새로운 줄기로 솟아오름. 반얀나무 한 그루가 1000개 이상의 줄기를 이루어 거대해진 것도 있음

 

-시집 <나무무덤> 천년의시작, 2015

 

 


 

 

서정화 시인 / 스팸시대

 

 

집요한 공짜 성인물이 치즈처럼 웃고 있네

 

무료 머니 당첨도 출금해주는 이벤트 하루 벌고 한 달 노

세요 야한 동영상 보러 와요 날마다 잠자리도 점령하는 음

란 문자에 오로라 같은 전술에 살짝 터치한 죄 이달도 속수

무책으로 소액결제 빠져나갔네 전쟁 후 미군부대가 살포했

던 스팸이 부대찌개와 햄버거, 오키나와 소바에 들어가고

명절엔 한우와 굴비 대신 선물세트*로 대접 받네 음식보다

최대 수출품은 고객의 개인정보라지 이메일과 사기 전화

무작위로 폭격하는

 

오, 이런 분단을 먹고 자란 불멸의 스팸이여

 

*스팸: BBC는 "왜 스팸은 한국에서 고급스러운 음식일까?"라는 기사에서 "스팸은 한국인들의 삶에 중요한 부분이 됐으며,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스팸을 많이 소비하는 나라이다"라고 보도했다.

 

-시집 <나무무덤> 천년의시작, 2015

 

 


 

 

서정화 시인 / 장님물고기

 

 

굳어지기 전

네 눈은

무수한 길이었다

적으로 표변하여 칼끝을 겨누는

동굴 속

숨어드는 길

모질게도 사는구나!

 

-시집 『나무 무덤』 천년의 시작, 2015

 

 


 

 

서정화 시인 / 기억의 고집

 

 

늦은 저녁 엎드려 잠든 내 등의 한가운데

질기고 억센 뿌리로 태양을 움켜쥔

한 그루 야자수 나무 순식간에 돋아났다.

한가로이 해먹에서 낮잠을 자는 아이

코코넛을 통통 던지며 뛰노는 아이

풍랑에 부서진 배를 고치는 아이

게으른 섬 하나, 장난꾸러기 아이들

염소에게 나뭇가지를 내리치며 깔깔댄다

늙은 저, 목줄에 묶여 이리저리 피해 도는

램프를 건 야자수는 벼랑에 뿌리내려

녹아내리는 시계로 가지를 뻗고 있나

뿔 나고 수염 단 염소, 빙빙 도는 수밖에

 

-시집 『나무 무덤』 천년의 시작, 2015

 

 


 

서정화 시인

1977년 서울에서 출생. 경기대학교 한류문화대학원 시조창작학과 졸업. 2007년 백수 정완영 전국시조백일장 장원으로 작품활동 시작. 2018년 《서정시학》신인상 당선. 시집 『바다 거미 출력소』 『유령 그물』 『나무 무덤』(2016. 세종도서 선정). 『서이치에 기대다』, 현대시조 100인선집 선정 『숲 도서관』. 2021년 ARKO 창작지원금 수혜. 2018년, 2020년 경기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2021년 수원문화재단 창작지원사업 우수대상 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