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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화 시인 / 사과와 피아노의 거리
야생장미 노래의 독 흔들리는 중심
건널목 가는 허리가 뱀의 사슬 휘감는다
멍하니 앉은 몸으로 열린 채 닫힌 두 눈
수원역* 거칠게 오려붙인 밤의 얼굴 정육들
*청소년 보호구역.
서정화 시인 / 대나무의 서書
대숲 여는 행간 사이
뼈의 활자가 새겨있다
밀경密經으로 길어 올린
대바람 갈피마다
소리가
곧게 세운 길
한 권에 들어있다
-《가람시학》2022. 제13회
서정화 시인 / 눈먼 자들의 도시
고뇌에 찬 춤곡이 절절이 울려 퍼지는 이태원가 가면을 쓴 틈에 끼여 몸을 섞고 어둠에 얽혀 들어가 민얼굴을 더듬어 본다
흔들리고 비틀대다 사납게 짖어대던 강철로 된 관棺 안에 갇힌 시간이 멈춘 채로 조문길 구름의 신발들 비의 거리로 출렁인다
안개의 미로로부터 늘어서서 보던 장님들 시간의 흰 해골이 줄을 잇다 전락된 눈 먼 길 마음이 닫힌 그 속을 걷고 있다
-《시조시학》2022. 겨울호
서정화 시인 / 물구나무종 ―주산지*
책을 여는 행간 사이 뼈의 활자 새겨있다 별바위 곁 춤을 추다 물 위에서 구부러지고 계절에 재깍거리는 나뭇잎들 거느린다
공통되는 세계와 태어나는 전망들 세상과 동떨어진 시간 활활 타오른 안으로 영원을 꿈꾸며 너머를 나아간다 시대의 어둠 안을 통과해 읽어내고 종이가 한 허공을 밀며 가는 소리들 장엄히 서늘한 그늘 핏빛 연륜**이 감기었다
*경북 청송 주산지 **연륜 : 나무의 줄기나 가지 따위의 단면에 나타나는 둥근 테.
-《가희》 2023년 가을호
서정화 시인 / 반얀나무*
뿌리들이 땅을 뚫고 일제히 솟아 있다
가지마다 기둥이 된 사원의 나무 한 채
모두가 한 몸이 되어 허공을 받들고 있다
널따란 품 안 가득 그늘이 물든 소리
뒤틀리고 휘어져도 제 안의 길을 가는
갈라진 힘들이 모여 푸르게 퍼 올린다
바깥으로 가는 길은 다 하나로 통한다며
찬이슬 맺힌 가지 소름 돋듯 빛날 때
어둠의 발끝에 닿아 함께 몸을 흔들었다
*반얀나무: 뿌리가 내려와 땅에 닿아 새로운 줄기로 솟아오름. 반얀나무 한 그루가 1000개 이상의 줄기를 이루어 거대해진 것도 있음
-시집 <나무무덤> 천년의시작, 2015
서정화 시인 / 스팸시대
집요한 공짜 성인물이 치즈처럼 웃고 있네
무료 머니 당첨도 출금해주는 이벤트 하루 벌고 한 달 노 세요 야한 동영상 보러 와요 날마다 잠자리도 점령하는 음 란 문자에 오로라 같은 전술에 살짝 터치한 죄 이달도 속수 무책으로 소액결제 빠져나갔네 전쟁 후 미군부대가 살포했 던 스팸이 부대찌개와 햄버거, 오키나와 소바에 들어가고 명절엔 한우와 굴비 대신 선물세트*로 대접 받네 음식보다 최대 수출품은 고객의 개인정보라지 이메일과 사기 전화 무작위로 폭격하는
오, 이런 분단을 먹고 자란 불멸의 스팸이여
*스팸: BBC는 "왜 스팸은 한국에서 고급스러운 음식일까?"라는 기사에서 "스팸은 한국인들의 삶에 중요한 부분이 됐으며,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스팸을 많이 소비하는 나라이다"라고 보도했다.
-시집 <나무무덤> 천년의시작, 2015
서정화 시인 / 장님물고기
굳어지기 전 네 눈은 무수한 길이었다 적으로 표변하여 칼끝을 겨누는 동굴 속 숨어드는 길 모질게도 사는구나!
-시집 『나무 무덤』 천년의 시작, 2015
서정화 시인 / 기억의 고집
늦은 저녁 엎드려 잠든 내 등의 한가운데 질기고 억센 뿌리로 태양을 움켜쥔 한 그루 야자수 나무 순식간에 돋아났다. 한가로이 해먹에서 낮잠을 자는 아이 코코넛을 통통 던지며 뛰노는 아이 풍랑에 부서진 배를 고치는 아이 게으른 섬 하나, 장난꾸러기 아이들 염소에게 나뭇가지를 내리치며 깔깔댄다 늙은 저, 목줄에 묶여 이리저리 피해 도는 램프를 건 야자수는 벼랑에 뿌리내려 녹아내리는 시계로 가지를 뻗고 있나 뿔 나고 수염 단 염소, 빙빙 도는 수밖에
-시집 『나무 무덤』 천년의 시작,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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