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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레 시인 / 스파이 게임
여럿이 모이면 놀이가 되고 한 이불을 덮은 우린 상대의 스파이
집마다 범인으로 몰리는 누군가가 있는, 선량함과 시민은 의미를 잃은 가족의 또 다른 이름
우리의 게임은, 룰rule이 없다는 것 너와 내가 사랑으로 놓여도 게임은 돌고, 서로의 눈빛은 네가 아니라고 답하죠
어둠은 모함을 번식시키고 의식을 공조해도 이곳은 이미 속임수의 전장
눈빛이 흔들릴수록 스파이일 수 있는 확률도 높아지죠
서로의 체온은 핏기를 잃고 숨기는 게 많은 사랑은 의심을 낳는, 시민도 스파이도 아닌 그냥 그저 서먹한 관계가 된다는 것
시기와 질투는 기본이죠, 애절함이 사라져도 웅크린 너의 등은 눈물로 들썩이네요, 보이는 게 다는 아니라고 말하는 당신 시민과 스파이 사이 지루함만 남은 게임에는 얼굴이 없고 한 이불을 덮은, 마주 앉아 밥을 먹어도 서로만 남는
가족이란 게임은 한자리에 모여도 이해가 없는
문이레 시인 / 사라진 풍경
무늬 없는 얼굴이 거울을 붙잡는다 이건 쌍방과실이다
둘 다 여기 있지 않은 모습으로 말을 건다 현관문은 그대로 열어둔 채
들어올래! 말래 돌아설까! 말까
네가 좋아하던 사탕 바구니 들고 달려온 날 이 문은 열려있었다 그날의 넌 그늘을 지웠을까
표정은 그대로 둘까! 말까!
망설이던 것이 이곳에 들어서지 못하는 동안, 결혼사진 속 하나둘 새겨지던 음각들, 오늘을 모르고 요일을 모른 채 하얀 액자 속,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상처로 파인 얼굴이 집의 기억을 잡는다 어떤 표정은 아직 무늬를 버리지 못한 채, 각인된 꿈으로 들어서고, 반갑다 손 내 밀고 싶은 네가 문 앞에서 반쪽의 얼굴로, 잘 웃지 않는 얼굴의 나를 기다리며,
현관문은 잠긴 채 명암처럼 하나둘 사라지던 걸음이 걸음을 이끄는, 아득한 그 끝으로 그리움이 쏟아진다
문 앞을 서성거리면 오늘은 네가 보이지 않는 마음까지 들춰내 때 묻지 않은 얼굴로 나를 반길 것 같다 석류처럼 붉은 입술로
이제 오세요, 당신
―『모던포엠』(2020. 11월호)
문이레 시인 / 늘 같은 방향의 입꼬리
죽을 사이에 둔 너의 입꼬리가 흔들릴 때마다 컵을 만지작대는 손가락의 부착력은 한계선에 이르고
당신의 주문은 왜 반대편 테이블 위를 향하는지 바닥으로 꽂히는 고개를 세울 수가 없다
호박죽 한 그릇을 뚝딱 비운 이마에서 송골송골 땀이 채이면 매생이죽, 굴죽, 잣죽, 사이로 얼굴에 읽히는 환한 달빛
허겁지겁 호박죽을 비운 채 입꼬리를 감춘 너의 그림자 봄을 기약하던 새 한 마리 후드득 날아올라 입술 가득 여정을 묻히고 달아난다
어디에도 붙잡을 곳 없는 내 허기진 소갈증을 달래듯 컵을 만지작거리던 테이블 위 손을 내려놓으면
달까지 달아난 너의 날개 안착하는 동안 시퍼런 매생이가 섬으로 돌아간다
문이레 시인 / 선침蟬枕
잡아도, 잡히지 않는 저 매미 소리 베고 먼 별의 이야기처럼, 우리의 잠은
긴 장례행렬이 지평선을 물들이는 아침 바닷가에서, 어제의 시체들을 부려 놓는 것,
여름을 베개 삼아 못다 한 이야기로 새벽이 오면
오랜 풍화의 흔적 눈동자에 담으며, 쉴 새 없이 찰칵 찰칵 셔터를 누르는 연인들은 먹다 버린 맥주 캔과 피서객이 놓고 간 튜브 위에 걸터앉아, 해변을 더 어두운 심연으로 끌고 들어간다
잠의 예법禮法에도 애도의 시간은 필요해!
내일도 노랑부리백로는 깨진 유리 조각에 다리를 절룩거리며 노을에 깃든 그리움은 파도의 허연 거품으로 하나, 하나 거둬 내는데
폭죽은 수평선 끝 쪽에서만 터지는지,
밀물과 썰물의 오랜 숙명을 묵인한 황폐한 갈림길엔 사라짐에 대한 두려움으로 우린, 시체 위에 누운 소라고둥의 웅웅-대는 소리에 잠긴다
스무 발이 선사하는 마지막 불꽃에 허물어지는 축제의 성,
지독한 여름은 두고 갈 것에 몸 기대 새벽잠을 설치는데
*蟬枕 선침: 매미 소리에 베개를 베고 든 잠.
문이레 시인 / 엄마라고 부르면 엄마가 되는
벚꽃 잎 휘날리는 봄밤,
그녀의 프레임은 같은 장면만을 돌리고,
배경처럼 어둠이 익숙해질 때, 텔레비전에 비친 심드렁한 표정엔 감쳐둔 시간이 출렁인다. 그녀의 손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리모컨은 오늘 도 잠을 설치고 서로의 식어버린 손,
굳어버린 파라핀처럼 당신의 손에서 떨어져 나간 아이는 회전목마 위에서 지금도 빙글빙글 돌고 있는지,
어디쯤 돌아치는 바람이기에, 한곳에 머물 수 없던 나를 아직도 찾고 있는 기억 속
그녀의 닫힌 귓속 엄마라고 부르면, 엄마가 되는 인형처럼 핏기 잃은 기억들만 아직도 돌아다니고
손을 놓친 이후로 한 번도 내지 못한 엄마의 쉰 목소리
그녀의 신발은 현관문을 벗어나지 못한 채 볼륨을 0에 놓아도 빠져나오지 못하는 엄마
문이레 시인 / 하우스
가정(家庭)은 과장되게 부풀어 쿵, 쿵, 쿵, 어깨춤을 추어요, 쓴다
네가 안다고 말하는 그 입을 네 입이 쓴다, 밤을 낮을 소란스러운 집을 밤이 지나면 뿔뿔이 흩어지는 꽃잎들이 문 앞에서 기다리는데 여기까지 쓴,
난 나를 원하는 병실에 누워있다
문장이 이뤄지기를 더는 기다리지 말기를
서술되는 내가 쓴다, 삼인칭의 나를, 우리의 거짓을 사랑을 완성한다고 쓴, 다모클레스의 칼 밑에서 당신을 쓰다, 듣다, 한다
내일의 집은 불을 끄고 잠을 자는 동안 내가 갈겨 쓴, 흔들리는 그네를 타고 온 방의 불빛이 사라지는 꿈 눈물로 채워진 물병도 꽃을 버린다
눈 감고 기다리면 네가 매단 글자들은 완성을 할까 그것은 참을성을 잃은 풋사과의 결말
이어가지 못한 삶의 수수께끼 누워있는 실루엣은 말이 없다
잘 짜인 퀼트의 뒷면처럼, 풋풋하던 표정 또한 어수선해 이 집은 ‘여자가 없다, 아내가 없다’라고 글 앞에서 서성거려본다 여인이여, 울지 말아요!
쓰다만 집이 더 이상 잇지 못하는 집이 글을 완결하도록
숨은 그림은 숨어 있어서 슬프고 쓰리다
‘없다’라고 써본다 그러고 귀를 연다
문이레 시인 / 꿈의 얼개는 맞지 않고
제비꽃 향이 방 안 가득한, 엄마의 기도는 들리지 않네
괘종시계는 12시가 되기 전 멈춰버리고 난 유리 구두를 찾는 소녀의 뒤를 쫓고 있었지 빠져나간 그림자의 뒤 미세하게 떨리던 아이의 심장은 감기는 눈꺼풀을 밀쳐보는데 멈춰버린 시계 너머로 안개 자욱한 얼키설키 숲이 나오는, 요정들은 뽀얀 젖을 아이에게 물리며 멍하니 보고만 있던 엄마의 체취를 걸어둔다 가쁜 숨 몰아쉬는 이곳의 흑암은 이죽이죽 웃으며 돌아서지 않고……
거짓을 말하고도 눈은 깜빡이지 않는 게 제 특기인가요? 테스트를 마치고 돌아오면 문밖에 서 있던 토끼의 눈과 마주쳤다 죽어 나가도 모를 애꿎은 밤은 여기 없는데 미로 속, 헤매도 전혀 감각 없는 발의 물집
-빨리 이곳에서 도망쳐 -엘리스가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몰라
다급한 전령이 문을 쾅, 쾅, 두드렸다 놓쳐버린 건 발가벗긴 고열의 신음, 엄마의 목소리를 상상해도 더 깊이 가라앉는 숨 동화 속 얼개는 뒤죽박죽되어 사라진 부분을 이어 붙이려 또다시 말려드는 잠 꿈을 살 수 없는 기도는 찢긴 동화책 어디쯤 말라가는지 괘종시계에 묻혀 흔들리던 꿈의 종잇장 유리 구두는 신발장에 그대로 있는데 누가 깨어 울고 있었는지 쿨럭이는 소리에 책의 심장이 접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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