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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문이레 시인 / 스파이 게임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14.
문이레 시인 / 스파이 게임

문이레 시인 / 스파이 게임

 

 

여럿이 모이면 놀이가 되고

한 이불을 덮은 우린 상대의 스파이

 

집마다 범인으로 몰리는 누군가가 있는, 선량함과 시민은 의미를 잃은 가족의 또 다른 이름

 

우리의 게임은, 룰rule이 없다는 것

너와 내가 사랑으로 놓여도

게임은 돌고,

서로의 눈빛은 네가 아니라고 답하죠

 

어둠은 모함을 번식시키고

의식을 공조해도 이곳은 이미 속임수의 전장

 

눈빛이 흔들릴수록 스파이일 수 있는 확률도 높아지죠

 

서로의 체온은 핏기를 잃고 숨기는 게 많은 사랑은 의심을 낳는, 시민도 스파이도 아닌 그냥 그저 서먹한 관계가 된다는 것

 

시기와 질투는 기본이죠,

애절함이 사라져도 웅크린 너의 등은 눈물로 들썩이네요, 보이는 게 다는 아니라고 말하는 당신

시민과 스파이 사이

지루함만 남은 게임에는 얼굴이 없고

한 이불을 덮은, 마주 앉아 밥을 먹어도

서로만 남는

 

가족이란 게임은 한자리에 모여도 이해가 없는

 

 


 

 

문이레 시인 / 사라진 풍경

 

 

 무늬 없는 얼굴이 거울을 붙잡는다

 이건 쌍방과실이다

 

 둘 다 여기 있지 않은 모습으로 말을 건다

 현관문은 그대로 열어둔 채

 

 들어올래! 말래

 돌아설까! 말까

 

 네가 좋아하던 사탕 바구니 들고 달려온 날 이 문은 열려있었다

 그날의 넌 그늘을 지웠을까

 

 표정은 그대로

 둘까! 말까!

 

 망설이던 것이 이곳에 들어서지 못하는 동안, 결혼사진 속 하나둘 새겨지던 음각들, 오늘을 모르고 요일을 모른 채 하얀 액자 속,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상처로 파인 얼굴이 집의 기억을 잡는다 어떤 표정은 아직 무늬를 버리지 못한 채, 각인된 꿈으로 들어서고, 반갑다 손 내 밀고 싶은 네가 문 앞에서 반쪽의 얼굴로, 잘 웃지 않는 얼굴의 나를 기다리며,

 

 현관문은 잠긴 채

 명암처럼 하나둘 사라지던

 걸음이 걸음을 이끄는, 아득한 그 끝으로 그리움이 쏟아진다

 

 문 앞을 서성거리면

 오늘은 네가 보이지 않는 마음까지 들춰내

 때 묻지 않은 얼굴로 나를 반길 것 같다

 석류처럼 붉은 입술로

 

 이제 오세요, 당신

 

―『모던포엠』(2020. 11월호)

 

 


 

 

문이레 시인 / 늘 같은 방향의 입꼬리

 

 

죽을 사이에 둔 너의 입꼬리가 흔들릴 때마다

컵을 만지작대는 손가락의 부착력은 한계선에 이르고

 

당신의 주문은 왜 반대편 테이블 위를 향하는지

바닥으로 꽂히는 고개를 세울 수가 없다

 

호박죽 한 그릇을 뚝딱 비운 이마에서 송골송골 땀이 채이면

매생이죽, 굴죽, 잣죽, 사이로

얼굴에 읽히는 환한 달빛

 

허겁지겁 호박죽을 비운 채 입꼬리를 감춘 너의 그림자

봄을 기약하던 새 한 마리 후드득 날아올라

입술 가득 여정을 묻히고 달아난다

 

어디에도 붙잡을 곳 없는

내 허기진 소갈증을 달래듯

컵을 만지작거리던 테이블 위 손을 내려놓으면

 

달까지 달아난 너의 날개

안착하는 동안

시퍼런 매생이가 섬으로 돌아간다

 

 


 

 

문이레 시인 / 선침蟬枕

 

 

잡아도, 잡히지 않는 저 매미 소리 베고

먼 별의 이야기처럼, 우리의 잠은

 

긴 장례행렬이 지평선을 물들이는 아침 바닷가에서,

어제의 시체들을 부려 놓는 것,

 

여름을 베개 삼아

못다 한 이야기로 새벽이 오면

 

오랜 풍화의 흔적 눈동자에 담으며,

쉴 새 없이 찰칵 찰칵 셔터를 누르는 연인들은

먹다 버린 맥주 캔과 피서객이 놓고 간 튜브 위에 걸터앉아,

해변을 더 어두운 심연으로 끌고 들어간다

 

잠의 예법禮法에도 애도의 시간은 필요해!

 

내일도 노랑부리백로는 깨진 유리 조각에 다리를 절룩거리며

노을에 깃든 그리움은 파도의 허연 거품으로 하나, 하나 거둬 내는데

 

폭죽은 수평선 끝 쪽에서만 터지는지,

 

밀물과 썰물의 오랜 숙명을 묵인한 황폐한 갈림길엔

사라짐에 대한 두려움으로 우린, 시체 위에 누운

소라고둥의 웅웅-대는 소리에 잠긴다

 

스무 발이 선사하는 마지막 불꽃에 허물어지는 축제의 성,

 

지독한 여름은

두고 갈 것에 몸 기대 새벽잠을 설치는데

 

*蟬枕 선침: 매미 소리에 베개를 베고 든 잠.

 

 


 

 

문이레 시인 / 엄마라고 부르면 엄마가 되는

 

 

 벚꽃 잎 휘날리는 봄밤,

 

 그녀의 프레임은 같은 장면만을 돌리고,

 

 배경처럼 어둠이 익숙해질 때, 텔레비전에 비친 심드렁한 표정엔 감쳐둔 시간이 출렁인다. 그녀의 손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리모컨은 오늘 도 잠을 설치고

 서로의 식어버린 손,

 

 굳어버린 파라핀처럼 당신의 손에서 떨어져 나간 아이는 회전목마 위에서 지금도 빙글빙글 돌고 있는지,

 

 어디쯤 돌아치는 바람이기에, 한곳에 머물 수 없던 나를 아직도 찾고 있는 기억 속

 

 그녀의 닫힌 귓속

 엄마라고 부르면, 엄마가 되는 인형처럼

 핏기 잃은 기억들만 아직도 돌아다니고

 

 손을 놓친 이후로 한 번도 내지 못한 엄마의 쉰 목소리

 

 그녀의 신발은 현관문을 벗어나지 못한 채

 볼륨을 0에 놓아도 빠져나오지 못하는 엄마

 

 


 

 

문이레 시인 / 하우스

 

 

가정(家庭)은 과장되게 부풀어

쿵, 쿵, 쿵, 어깨춤을 추어요, 쓴다

 

네가 안다고 말하는 그 입을 네 입이 쓴다, 밤을 낮을 소란스러운 집을 밤이 지나면 뿔뿔이 흩어지는 꽃잎들이 문 앞에서 기다리는데 여기까지 쓴,

 

난 나를 원하는 병실에 누워있다

 

문장이 이뤄지기를 더는 기다리지 말기를

 

서술되는 내가 쓴다, 삼인칭의 나를, 우리의 거짓을 사랑을 완성한다고 쓴, 다모클레스의 칼 밑에서 당신을 쓰다, 듣다, 한다

 

내일의 집은 불을 끄고

잠을 자는 동안 내가 갈겨 쓴, 흔들리는 그네를 타고 온 방의 불빛이 사라지는 꿈

눈물로 채워진 물병도 꽃을 버린다

 

눈 감고 기다리면

네가 매단 글자들은 완성을 할까

그것은 참을성을 잃은 풋사과의 결말

 

이어가지 못한 삶의 수수께끼

누워있는 실루엣은 말이 없다

 

잘 짜인 퀼트의 뒷면처럼, 풋풋하던 표정 또한 어수선해

이 집은 ‘여자가 없다, 아내가 없다’라고 글 앞에서 서성거려본다

여인이여, 울지 말아요!

 

쓰다만 집이

더 이상 잇지 못하는 집이 글을 완결하도록

 

숨은 그림은 숨어 있어서 슬프고 쓰리다

 

‘없다’라고 써본다

그러고 귀를 연다

 

 


 

 

문이레 시인 / 꿈의 얼개는 맞지 않고

 

 

 제비꽃 향이 방 안 가득한, 엄마의 기도는 들리지 않네

 

 괘종시계는 12시가 되기 전 멈춰버리고

 난 유리 구두를 찾는 소녀의 뒤를 쫓고 있었지

 빠져나간 그림자의 뒤

 미세하게 떨리던 아이의 심장은 감기는 눈꺼풀을 밀쳐보는데

 멈춰버린 시계 너머로

 안개 자욱한 얼키설키 숲이 나오는, 요정들은 뽀얀 젖을 아이에게 물리며 멍하니 보고만 있던 엄마의 체취를 걸어둔다

 가쁜 숨 몰아쉬는 이곳의 흑암은 이죽이죽 웃으며 돌아서지 않고……

 

 거짓을 말하고도 눈은 깜빡이지 않는 게 제 특기인가요?

 테스트를 마치고 돌아오면

 문밖에 서 있던 토끼의 눈과 마주쳤다

 죽어 나가도 모를 애꿎은 밤은 여기 없는데

 미로 속, 헤매도 전혀 감각 없는 발의 물집

 

 -빨리 이곳에서 도망쳐

 -엘리스가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몰라

 

 다급한 전령이 문을 쾅, 쾅, 두드렸다

 놓쳐버린 건 발가벗긴 고열의 신음, 엄마의 목소리를 상상해도 더 깊이 가라앉는 숨

 동화 속 얼개는 뒤죽박죽되어

 사라진 부분을 이어 붙이려 또다시 말려드는 잠

 꿈을 살 수 없는 기도는 찢긴 동화책 어디쯤 말라가는지

 괘종시계에 묻혀

 흔들리던 꿈의 종잇장

 유리 구두는 신발장에 그대로 있는데

 누가 깨어 울고 있었는지

 쿨럭이는 소리에 책의 심장이 접혔다

 

 


 

문이레 시인

1969년 대구에서 출생. 2019년 제14회 최치원 신인문학상 당선, 2019년 《시산맥》으로 등단. 《영남문학》 수필 등단. 2022년 《월간 모던포엠》 상반기 문학평론 신인상 수상. 제14회 동서문학 맥심상 수상. 현재 모던포엠 작가회 회원, 텃밭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