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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순 시인 / 나무와 잎사이
비가 비를 맞으면 비는 죽음의 싹이,
비가 웅덩이에 떨어지면 소리의 꽃이 피어 사방으로 날아간다
날과 날이 만나면 하루가 공중으로 흩어질지 흙으로 돌아갈지
돌처럼 앉아 돌처럼 생각하다 돌처럼 입을 허공에 벌리고 잠을 잔다
당신과 나 사이 입의 허공이 살고 있다
잎과 잎사이 바람이 살고 있다
멀리 있는 당신과 당신 사이 가까운 곳으로부터 눈물이 마르고 있다 씨앗이 될 때까지
장자순 시인 / 깨진 사랑
입을 다물었다 귀에서 꽃이 피기 위하여 망설이는 눈망울 매달려 있다
네가 바라는 그 자리에 비집지 못하는 언어들이 추락으로 흐르는 물들의 이야기 아픈 바람이 될 것이다
상처는 지워진지 오래되었지 그렇게 생각하며 물은 흘렀다
흘러간 물소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깨진 사랑의 색깔은 무엇일까
흐르는 질문이 좁은 창틈으로 끼어들었다
엎질러진 아픔들이 무표정하게 떠날 기차를 기다리고 있다
어디로 가는지 난간에 기대는 마음으로 예감은 적중을 향하여 날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흙탕물이 제 위치에서 웃고 있는 줄은 몰랐다
풋풋한 사랑과 비릿한 아픔은 짧았다
날리는 먼지처럼
-시인정신 2014년 여름호
장자순 시인 / 기억의 바람소리
햇살이 은행나무 꼭대기에 우수수 떨어진다 흔들리는 입새 아래로 햇볕의 그림자가 땅바닥으로 자신의 지문을 지우듯이 흙은 차가워지고 있다 사람의 발자국이 묻어있는 길을 걸어갔다 소리에 예민해진 귀들이 공중의 바람소리를 바라보고 있다 바람과 돌과 나뭇잎의 간격 사이에 빈 눈빛이 살고 있고 그 사이로 산의 언덕들 산을 넘어가고 있는 산의 자세를 기억하고 있다 내가 바라본 사물은 형태를 유지 못하고 하루를 건너뛴다 매일 다가오는 이별법의 기억 저녁이 되면 풀의 바람과 함께 밖으로 넘어 선다 아무리 걸어도 기억은 형태를 남기지 않는다
장자순 시인 / 습관
문 밖으로 물 흐르는 소리 풀들은 시야에서 시야를 벗어나 바람을 따라가고 있다
내 눈높이로 다가서는 풀의 움직임 눈에서 풀의 바람이 인다
가깝고도 먼 땅덩어리들 우리들은 각자에서 풀의 뿌리냄새가 난다
생각이 멈춘 그곳에서 오래도록 서있는 나무들은 내가 태어난 자리 하늘은 끝을 모르는 공간의 속도
공중으로 떨어진 새의 깃털은 바람이 되어가고 풀잎에 이는 바람은 풀잎이 되어 지상의 손금을 그리고 파도의 음율을 따라간다
늦어지는 바람 속에 물은 물소리만 어둠을 뚫고 나뭇잎은 어둠에 몰두하는 어둠의 깊이가 있다
어둠의 색칠이 끝나자 검정 바람이 불기 시작하였고 생각의 밀도는 바람으로 수렴하여 어둠이 머리카락과 수평을 이루고 있다
장자순 시인 / 바람을 키우는
바람이 나무를 세우고 있다 바람이 나무를 늘려간다 나무의 방향은 나무의 말에 나무로 서있다 바람은 불기만 하고 나무는 하늘 위를 향하여 목을 세운다 바람이 약해지면 나무들은 성장을 멈춘다 그것은 나무와 바람의 시작 공허한 메아리는 바람을 따라가고 구름의 빈곳을 찾아 길을 떠난다 나무와 바람의 재회 나뭇잎이 먼저 땅으로 고개를 숙일지 바람이 창 밑으로 고개를 숙일지 서로 모르는 곳으로 길을 떠나 누구의 장소에서 만날 것을 예약한다 바람의 높낮이가 나무의 한쪽 귀를 키우고 있다 나무 밑에 바람 바람 밑에 나뭇잎이 크고 있다
장자순 시인 / 쌓인다
종이박스를 기울어진 리어카에 반쯤 싣고 지나가는 노인의 손목은 힘줄로 가득하다 한 생애의 무게가 낱 장의 종이에 묻어 있듯이 삶의 생은 가물가물하다 정오의 햇빛이 직선으로 서있어 그림자의 여운은 남아 있지 않듯이 삶의 여운은 바싹 마르는지 시간은 꼬불꼬불 뭉쳐 있다 한 발자국으로 밀고 가는 리어카 숭숭한 바람 속으로 흙먼지 폐지 위에 쌓인다 그 위로 여분의 시간이 미끌어지고 있다 비어있는 가지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풍경들만이 아무렇지 않게 리어카에 쌓여간다 손등 위 움폭 파인 세월의 무게 위로 검버섯 한 송이가 소름으로 돋는다 -반연간지 『작가마당』 (2023년 하반기)
장자순 시인 / 그렇게 불어왔다
바람에 흔들리는 구름과 그림자 그 그림자를 부여잡고 있는 모습과 기억처럼 바람은 그렇게 불어왔다
바람의 촉수에는 바람이 없어 물의 흐름은 물 밖과 물 안에 있는 파노라마
옷을 뒤 짚으면 내 안의 바람 바람은 밖으로 흐르고 빈곳은 언제나 무색으로 이루어진 색계
자신을 기다리는 것은 나를 둘러싼 내 피부의 광장 앞뜰에 바람소리가 차고 있는 풍경들에 눈물이 점을 찍는 지경을 바라본다
눈은 흐려지거나 멀어지고 잡히는 것은 금방 자리를 떠나고 그곳 자리를 따라 걷고 있는 구름 속으로 조각보처럼 뜯겨지는 울음의 덩어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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