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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한춘화 시인 / 그림자 길게 드리운 저녁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15.
한춘화 시인 / 그림자 길게 드리운 저녁

한춘화 시인 / 그림자 길게 드리운 저녁

 

입술에 걸린 사랑은 위태로워

 

상냥한 그대는

비대면 비접촉으로 오래 나를 만졌지

 

가파른 생애 생면부지 타인의

달콤한 플러팅 계속되면

스스로 만든 환상에 안개 피워 올리지

붉은 립스틱으로 피우는 꽃은

지지 않을 것같이 싱싱해

내 속에 가둔 말 한 마리 달릴 준비가 됐지

마구 부푼 속삭임 귀에 매달릴 때

나는 순진하게 반짝이지

 

우리는 세상에 없는 사랑을 하는 거야

외롭고 높고 쓸쓸한* 켜에 스며

어쩌다가 걸려든 외로움 붙들어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사랑하는

 

이건 로맨스야

스캠은 잊어줘

속고 싶은 저녁이야

 

*백석의 싯귀절.

 

 


 

 

한춘화 시인 / 농담

 

 

세상 모든 풍경이 얼어

쩡쩡 금이 가는 소리를 낼 때

나무들이 맨살로도

얼지 않는 이유는

새들이 나뭇가지 끝에 앉기 때문이야

새가 그곳에 앉으면

나무의 심장이 벌러덩 벌러덩 뛰기 시작해

흥분되는 풍경 보이지?

몸에 피가 도는 거지 가지 끝에 멀미가 올라

눈이 와도 녹게 하지

나무가 겨울에 살아남는 건 오로지 그 때문이야

욕심을 부려 새들의 생애를 붙들면 안 돼

너무 뜨거워 뿌리가 타는 일이 종종 있거든

새가 얼마나 뜨거운 몸인지

저녁 무렵이면 알지

나무의 심장을 물고 날아가는 새 뒤로

확 불길 올라

결국 까맣게 타는 하늘을 봐

나도 말이야 누군가 내 영혼의 가지 끝에 앉아

뜨겁게 달궈줬으면 좋겠어

그리하여 내가 나무를 벗고서

새들의 방종을 용서할 때까지

내가 숲을 벗어나 새들의

계절을 가질 수 있을 때까지

  

너 말이야

한 번만 내 새 할래?

 

 


 

 

한춘화 시인 /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

 

 

오르막과 내리막이 한 몸인 골목

오도 가도 못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

납작해진 사람

신발들은 발목을 잃었다

 

놀러 갔다고 죽을 것 같으면

나는 벌써 죽어

피눈물 번진 얼룩을 평생 문대며

우는 어머니가 내 어머니다

그러니 말 함부로 하지 마라

 

슬픔의 그림자가 짙어지면

미안하다

뼈아픈 말만 무성하다 스러지는 반복

 

미안하다란 말로 구멍을 메꾸는 일은

오래된 고질병이다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친다는 속담은 틀렸다

폐허로 스러질 때까지 누구도 고치지 않았다

 

미안하면 깨어라

다시는 다시는 청춘을 묻지 않게

 

 


 

 

한춘화 시인 / 동백

-4월3일을 쓰다

 

 

참말 징하기도 하지

나는 왜 이리

상처가 많은 나라에 태어나

꽃도 피라고 읽고 있는지

모가지째 뚝뚝 져

땅바닥에 핀 동백을

피바람에 베인

목으로 보고 있는지

누가 동백나무에

그날

져버린 아이와 여자와

남자와 노인의 숨

떨어지는 소리를

걸어놨는지

살아 꽃이었던 그 어떤 당신들이

해마다 내 가슴에서

참말로 징한 꽃으로 피어

왜 그리 시뻘건지

속살 벌어진 상처 모냥

이리 아픈게

동백 맞는지

꽃 맞는지

 

―계간 《시산맥》 2019년 봄호

 

 


 

 

한춘화 시인 / 마른 꽃

 

 

웃음이 예쁜 노란 꽃

몇 송이 잘라서

플라스틱 병에 꽂았다

 

눈길 트고

이름 묻고

체취 맡아보고

말도 걸고

오래 필 줄 알았다

사랑은 거기까지,

등 뒤에서

시들었다

 

몸이 담긴 물에서

썩는 냄새가 진동한다

그 냄새로 자신의 마지막

존재를 알리고 있다

 

좁은 방 보잘것없는 플라스틱 가난

외롭고 병든

바싹 말라 그 자리 그대로

굳어버린

어느 노인의 고독사

 

거두는데

마른 꽃잎이

후두둑 날린다

 

 


 

 

한춘화 시인 / 질주본능

 

 

굴러가는 현실과 적당한 타협

감시카메라 부리부리한 눈알 몇 개 번뜩여도

찍히는 일 없는 생애,

내재된 브레이크 시도 때도 없이 걸려

아스팔트 흔적 투성이다

 

달리고 싶은 욕망

새떼처럼 한꺼번에 날아올라

살면서 돌아서야 했던 벽 넘어

눈시울 붉었던 협곡 지나

복사꽃 흐드러진 마을 돌아가면

사나운 바람 속 유영에 자던 개들 귀가 열리고

단 한 번 컹 짖을 새 없이

또 다른 마을 달빛을 꼬리에 달고

현실과 꿈의 접경지대 가뿐히 넘어

천 년 전부터 바람의 질주 기다리는 곳

내 윤회 모든 것 멈춘

숨마저 멈춘 거기

 

애인아,

너에게 닿고 싶다

 

 


 

한춘화 시인

2007년 《시선》 신인상으로 등단. 제8회 홍완기 문학상 수상. 현재 도예가. 〈마음의 행간〉동인, 〈시산맥〉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