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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찬세 시인 / 벽돌의 방식 외 8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15.
박찬세 시인 / 벽돌의 방식

박찬세 시인 / 벽돌의 방식

 

 

벽돌은 벽과 돌의 합성이다

 

시위 현장에서 벽돌은 깨어진다

깨어진 벽돌은 벽과 돌로 나누어져

벽을 남기고 순수한 돌로 돌아가 공중으로 날아다닌다

돌이 떨어지는 곳에서

상처가 생기고 견고한 벽이 만들어진다

벽돌이 깨어진 틈으로 석기시대가 흘러나온다

 

공사장에서 벽돌은 시멘트의 힘을 빌린다

서로 밟고 올라서면서 돌을 버리고 벽이 된다

벽이 모여 방이 되기도 하고 집이 되기도 하지만

순수한 벽이 되기도 한다

이 경우 장이란 말이 앞에 붙거나 성이란 말로 전환된다

여러 가지 색채를 띠면서

침묵과 사상을 가진다

어떠한 무너질 것이라는 가정을 함의한다

 

벽돌은 밟고 올라서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버린다

단단한 경계석 안, 평평한 모래 위에서

서로 어깨와 어깨를 나란히 할 때

벽돌은 벽과 돌을 버리고 반듯한 길이 된다

벌어진 틈마다 채워 넣은 고운 흙은 씨앗이란 말을 함의한다

벽돌과 벽돌 사이에서 꽃이 핀다

벽돌은 벽과 돌의 합성어이지만 쓰는 방식에 따라 이름을 달리한다

 

 


 

 

박찬세 시인 / 고양이

 

 

어른들은 만나면 맨날 묻는다

--넌 하고 싶은 게 뭐야?

--꿈이 뭐야?

 

나는 공부도 못하고

얼굴도 잘생기지 않았고

집도 잘살지 못한다

 

나는 내가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냥 가만히 있고 싶고

그냥 놀고만 싶다

나도 나를 잘 모르겠다

 

그냥 이렇게 살다가

그냥 이렇게 죽고 싶다

 

내 꿈은 그냥그냥 고양이다

 

-시집 <눈만 봐도 다 알아>에서

 

 


 

 

박찬세 시인 / 준비물 1

 

 

학교 가기 전 엄마에게 돈을 달라고 할 때는

절대 딴 곳을 바라보면 안 돼

엄마를 똑바로 쳐다봐야 하고 눈동자가 흔들리면 안 돼

말을 더듬어서도 안 되고 막혀서도 안 돼

실습 시간에 꼭 필요한 물건을 말해야 해

그리고 스스로 그렇다고 믿어야 돼

--엄마, 실습시간에 필요한 공구 사게 돈 좀 주세요

-뭐가 필요한데?

심장이 두근대지만 침착해야 해

--스크루 드라이버, 롱노우즈플라이어, 발광 다이오드요

엄마가 최대한 모를 법한 이름들을 준비해야 해

--얼만데?

여기서 방심하면 안 돼

너무 많이 달라고 해도 안 되고

너무 적게 달라고 해도 안 돼

너무 정확한 금액을 얘기해도 안 돼

--공구점 가 봐야 알아요 회사마다 가격이 달라요

사만 원주시면 남겨 올게요

엄마가 의심의 눈초리로 살짝 흘겨보겠지만

당당한 눈빛을 잃어선 안 돼

돈을 받고 무심히 돌아서야 해

그리고 꼭 인사는 잊지 말자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시집 <눈만 봐도 다 알아>에서

 

 


 

 

박찬세 시인 / 당개

 

 

거룩한 우라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은 맛세이는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다이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적구 굴러라.

 

아리땁던 그 큐대

곧개 뻗어나가며

그 석류속 같은 적구

두 개를 다 맞추었네

 

아! 강낭콩보다 더 푸른

그 다이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적구 굴러라.

 

구르는 적구는

길이길이 모이리니

그대의 꽃다운 다마수

어이 아니 오르랴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푸른

그 다이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적구 굴러라.

 

 


 

 

박찬세 시인 / 서시

 

 

오백을 칠 때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큐대에 이는 초크가루에도 나는 괴로워 했다.

쫑과 더블어 뽀루꾸로 모든 죽어 가는 공을 살려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가야시를 착실히 빼내야겠다.

오늘밤에도 흰공이 적구를 스치운다.

 

 


 

 

박찬세 시인 / 오시로 우라를 치겠소

 

 

오시로 우라를 치겠소

각이 없다하니 구멍을 파고

히네룬 적당히 주지요.

 

겐세히 있다 쫄리 있소

쫑은 저절로 피할려오.

 

가야시가 되거랑

하나 더 쳐도 좋소.

 

뽀루꾸가 아니냐면

그냥 웃지요.

 

 


 

 

박찬세 시인 / 다마화상

 

 

산모퉁이를 돌아 외딴 당구장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

 

다이 위에서 적구를 붉고 큐대가 흐르고 가야시가 펼치고

하이얀 다마가 구르고 겐세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한 틈이 있습니다.

 

어쩐지 그 틈이 미워져 돌려칩니다.

돌리려다 생각하니 히로가 날 것 같습니다.

도로 가 들여다 보니 그 틈은 더 좁아 보입니다.

 

다시 그틈이 미워져 돌려칩니다.

돌리려다 생각하니 빵꾸가 그리워 집니다.

 

다이 위에는 적구가 붉고 큐대가 흐르고 가야시가 펼치고

하이얀 다마가 구르고 겐세이가 있고 추억처럼 틈이 있습니다.

 

 


 

 

박찬세 시인 / 발치

 

 

 통증에 자다 깨 이를 뽑는다

 이번 달에만 두 개

 거울 앞에 앉아 명주실로 이를 묶고

 어린아이와 마주 앉는다

 술과 함께 이를 갈며 버티던 시간들

 못 이기고 흔들리던 날들

 찔끔찔끔 흘러나오는 핏물이 하얀 실로 스며든다

 거울 속 아이가 실을 움켜쥐고 머뭇거린다

 내 것인 줄 알았던 것들

 아무것도 아닌 것들

 흔들릴수록 아프게 하는 것들

 탕! 하고 바닥을 치면 사라질 것들

 이를 악물고

 탕! 주먹으로 바닥을 친다

 또 하나의 어둠을 입 안에 가둔다

 

 


 

 

박찬세 시인 / 선생님은 눈만 봐도 다 알아?

 

 

선생님은 맨날 말씀하셨다

-선생님은 너희들 눈만 봐도 알아

얼굴에 다 쓰여 있어

선생님 속일 생각 하지 마

오늘 선생님이 묻는다

-너 왜 말 안 했어?

일 년 동안 왕따를 당했으면 말을 해야지

니가 말을 안 하면 내가 어떻게 아니?

선생님은 아무것도 모른다

나는 일 년 동안 매일매일 말했는데

눈으로.....

 

-시집 <눈만봐도 다 알아>에서

 

 


 

박찬세 시인

1979년 충남 공주에서 출생. 대전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9년 제16회 《실천문학》 신인상에 Cold Bird외 3편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 <눈만 봐도 다 알아>(창비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