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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서하 시인 / 대숲소리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15.
서하 시인 / 대숲소리

서하 시인 / 대숲소리

 

 

구름이 달을 옆구리 끼고 있는

송광사의 밤은 푸르기만 한데

화엄전 월조헌 뒤뜰 대숲이 애터지게 운다

대숲은 마디마다 바다를 들여놓았나

쓰러질 듯 일어서며

쏴아 쏴아 쏴아

뱉어내는 파도소리에

내 몸이 자꾸 뒤로 쏠린다

탁 풀어놓지 못하고 참았던 울음보따리들

오늘은 모조리 불러내어

며칠 굶은 짐승처럼 퍼지른다

짓물러 짭쪼름한 저 울음은

창망대해 일었다 사라지는 씀벅씀벅한 허기

등 구부린 채 밤새 목탁 치는

스님은 아는지 모르는지

소리 위의 소리, 비릿하다

 

 


 

 

서하 시인 / 노숙자

 

 

동대구역 지하도 한 켠에

구겨져 있는 노숙자

접힌 허리에서

한숨 쉬듯 새어나오는 글씨들

밝은 빛도 빚으로 읽히는지

알몸뚱이로 등을 뒤집는,

손끝에 침 묻힌 바람이

건둣건듯 다가가

귀를 어루만졌다가

어깨 쪽을 넘겨보지만

쭈그리고 돌아누운 그에게 숫자는 없다

노 숫자다

던지고 가는 차가운 외면이 몇 번인지

한 방향으로 누워있는 게 며칠째인지

굶은 날은 또 얼마나 되는지

밀려드는 한기 밀어내며

오지 않은 봄을

몇 번이나 끌어 당기려했는지

그를 일으켜 세울 비밀번호도

타고가야 할 열차 번호도 없다

노숙자는 노 숫자다

 

 


 

 

서하 시인 / 별들도 나이를 먹을까

 

 

두 눈으로 똑똑히 보지 않아도

세간이 점점 늙어간다

하늘의 별들도 나이를 먹을까

장농도 늙고 거울도 늙고

만성피로증후군에 시달리는

손잡이 떨어진 양은냄비

버릴까말까 고민하다 수세미로 박박 닦았더니

두꺼운 껍데기 아래 숨어 있던 새살이

맑고 투명한 얼굴로 반짝인다

냄비에 비친 사람이 문득 낯설다

낯가죽이 더 얇았으면 티 없이 살았을까

문득 건너다본 하늘에

한 쪽 눈썹이 희미한 별들 반짝인다

 

 


 

 

서하 시인 / 메주

 

 

날더러 못 생겼대요 생각해 보면

그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누구나 조금씩은 못 생긴 부분들

감추며 살지만 적어도 난

겉 다르고 속 다르지는 않잖아요

긴 콩밭이랑 사이

불쑥불쑥 말 걸어오는 잡풀 하나

아는 체 하지 않은 고집 때문에

절간의 목어처럼 오랫동안

매달려 있어야 한 대요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동안

틈새 쩍쩍 갈라지는 일들 많지만

때로는 훈훈한 바람 만나

속 열어 보이며 적당히

자신을 익힐 줄도 알지요

봄을 준비하는 사람은

봄보다 먼저 발효되어야 한 대요

돌보지 않은 기왓장의 이끼처럼

누구도 쳐다보지 않는 동안

못 생긴 얼굴도 때로는

푸르디푸른 새살 밀어내는 거 보셨나요

 

 


 

 

서하 시인 / 당신 참 시다. 詩다

 

 

입속에서 터져버린 고백이 샐까봐 아무 말 못하겠다

 

다 빼앗기더라도 마음만은 뺏기지 말라는 뜻을

가지가지에 붉게 매달고 상화 고택 가는 길가에

청사초롱 밝혀 든 석류나무 한 분

 

불을 바라보는 나와 나를 바라보는 불빛이

약속도 없이 우연히 만난 첫사랑처럼 아득하다

 

세상에 없는 애인은 어디로 갔고

저 불빛은 어디서 왔나

 

석류 위에도 석류

석류 아래에도 석류

 

석류 어깨에 걸린 시린 사랑 길 잃을까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지나가는 저 여자

끌어당기지 않아도 늘어난 석양처럼 눈자위기 붉다

 

참 난처해라

오늘도 어제도 끝내 터뜨리지 못하고

입속에 차오르는 이름으로 침이 한가득 고이는지

 

그림자 입에 넣고 굴리다 사리 같은 별 툭툭 내뱉는 밤

 

당신 참 시다, 詩다

 

 


 

 

서하 시인 / 사일못

 

 

들고 다닐 수 없는 못물이 거기 있어

내 마음 들고 내가 가네

물의 낯바닥 간지르는 햇살과 늙은 산은

일부러 흘림체로 누운 채

발 담그고 살고 있네

사람들이 흩어져 살 때

갈대꽃처럼 모여 사는 게 아름답다고

못물은 모인 만큼 젖어 있네

모난 데 하나 없는 저 고요

바람은 잘게 부서져 쌓이고

햇살은 물속 뒤지다가 그냥 가네

못물 움켜잡은 둑에 앉아 생각하네

잔물결처럼 그렁그렁한 내 마음도

낮은 산들 벌거벗고 사는 이곳 주소 옮기면

저 물고기로 살 수 있을까

 

 


 

 

서하 시인 / 이만 총총

 

 

 사랑요양원 복도 양쪽으로 관 같은 방들이 가파르게 늙어가는 중이다

 

 구름 타고 멀리 간 어머니 같은 누런 얼굴들, 묘수 없이 완전무결한 것은 늙음뿐, 이따금 문 쪽으로 아프게 돌아가는 눈빛에 바람만 왔다 간다 공벌레처럼 몸 말아 죽음을 치대는 중인가 저 부드러운 모서리들 진지함에는 후진이 없다

 

 삶의 비루함은 요약되지 않는 것이라지만 그녀는 요양원에서 요약하기로 한다

 

 요약하며 살아온 것이 아니어서, 요약할 것에게도 무슨 위로가 필요할까 할 말은 해야겠다고 시작한 편지도 할 말 다 못하고 이만 총총이라고 하듯 누군가를 그리워했던 일도, 제 이름조차도, 냇물 소리에 모서리를 깎는 오후 두 시

 

 저승꽃이 오래 들여다본다

 

 


 

서하(徐河) 시인

1961년 경북 영천 출생. 1999년 계간 《시안》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 『아주 작은 아침』 『저 환한 어둠』 『먼 곳부터 그리워지는 안부처럼』. 현재 한국 시인협회 회원, 대구시협 이사, 대구문협 회원. 현대불교문인협회 회원. 2015년 제33회 대구문학상. 2020년 제1회 이윤수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