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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언 시인 / 중독 1
식탁 흰 테이블에 놓인 와인보다 나는 독주가 되고 싶다 오래전 강화도 전등사 부처님 뵈러 가는 길에 흙먼지 뒤집어쓴 해장국 집 길옆으로 파헤쳐진 황토보다 벌겋던 시큼하고 씁쓸했던 깍두기 맛 판잣집들 늘어선 청계천 동대문 시장 뒷골목 누런 빈대떡에 말간 소주가 생각나는 이를테면 해진 무명옷에 묻은 김칫국물 얼룩진 눈물 같은 맛 케케묵은 하찮은 기억들을 지워내 버리지 못하는 나는 붉은 와인보다는 바람부는 오지의 그늘에서 음습한 시간을 견딘 향이 독한 술이 되고 싶다 몽롱한 네가 나를 찾아 마실 때 불타듯이 넘어가 기억으로 통하는 목구멍을 찌릿하게 갈라놓고 싶다 나를 질식 시켜 몸을 가루로 빻아 발효시킨 오크통을 부수고 나온 스모키한 향으로 중독된 몸을 태워 날리고 싶다 독주가 된 나는 병실에 걸린 주사액같이 너의 마른 팔뚝에 꽂혀 지독한 불구의 핏줄을 타고 흐르고 싶다 -시집 <국경지대> 중에서. 시산맥. 2021년.
이용언 시인 / 국경지대
프리웨이 끝 국경지대의 동네가 돌아앉아 있었다 우두커니 서 있는 몇 채의 집 져가는 해마저 외면하듯 비껴가는 거리였다
그 사이를 의심스럽게 부는 바람에 가시덤불, 부둥켜 안고 제 몸을 찔러 대며 뒹굴고 있었다
근심스레 가라앚아가는 안개 펜스가 시커멓게 파먹어 간 배를 내놓고 광야가 쓰러져 누워 있었다
솔개 서너 마리 낮게 맴도는 국경지대, 엉겅퀴가 뒤덮인 아벨의 들판이었다
가인의 증오가 넘치는 들개가 몸을 숨기는 곳이다
이용언 시인 / 술렁거리는 정원
정원이 수상하다 사과나무가, 석류꽃이, 장미가, 바람도 없는데 술렁인다 술렁임을 날며 오는 나비 한 번도 듣지 못했던 말을 듣는다 말을 걸고 있는 식물들 이슬을 깨문 푸른 입술을 보고 알았다 갑자기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밤의 구석을 뒤적거리던 잠 속에 긴 꿈을 꾸었고 누에, 잠을 자는 아내를 빠져나와 아직도 꿈인 양 공기를 헤엄치며 산호꽃 장미로 날아가다 벤치에 앉은 내게 환희의 눈빛으로 다가오는 식물들 사과가 사과의 말을 걸어 석류가 석류의 말을 걸어 눈빛이 흐르는 초록으로 소리 없는 말이 웃음 짓는 눈짓으로 말의 색색 향기를 쫓아 나는 나비, 경계 안과 밖이 바뀌는 순간 사과의 석류의 장미의 말이 햇빛에 씻겨 눈부시다 활짝 열려 있는 내 안의 모든 창문 정원이 술렁거린다
이용언 시인 / 까마귀 울음
집 앞에 고래 등 같은 큰 나무가 서 있었다 푸른 저녁이면 까마귀들이 날아와 나무 지느러미 이파리에 까칠한 몸을 싸고 별이 하얘지는 까만 밤을 잤다 동이 트면 빛을 물고 굴뚝에 나와 앉은 까마귀들 일 나가는 나를 향해 까-악 날갯짓하다가 섬으로 날아갔다 더위가 한풀 꺾인 바다에서 안개가 수시로 올라왔다 아침부터 나타난 낯선 일꾼들 나무에 올라 가지치기한 그날 이후 벽이 숭숭 뚫린 나무에는 허공을 틀어막는 바람만 통과할 뿐 그 많던 까마귀들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늦가을 이맘때가 되면 바다에선 고래 무리가 남쪽으로 철 이동을 한다 낙엽 태우는 등불이 걸린 저녁 굴뚝 연기 속에 흩어지는 날개를 보았다 빈집을 살피듯 나무 주위를 돌다 고래가 지나가는 바다로 나가는 날개 까-악 날아가는 노을 한 조각 찬바람 내 가슴의 문을 한번 흔들고 보랏빛 섬을 지나 불꽃 펄럭이는 이승의 경계를 지나 지금은 전설 같은 북극성을 향해 날고 있을 까마귀 울음
이용언 시인 / 소리 없는 감옥
여보, 개미! 아내의 비명을 개미는 들을 귀가 없다
벽에 생긴 틈을 살펴보다 커진 눈의 동공을 따라 들어가 보았다 안은 어디고 연결된 게 아닌가 개미 박멸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겠군, 하며 나오러는 순간 미로로 빨려 들어가며 온몸이 심하게 가려웠다 외계의 전파에 접속되는 느낌이다 이미 그때 머리에 안테나 촉수가 돋아난 나는 캄캄한 동굴 속을 척척 다니는 개미 촉수를 따라 나간 곳에 세상에! 벌레 하나 비리게 죽어 있다 입의 집게로 물기도 전에 벌써 촉수가 어디로 무전을 친다 이때 알게 된 건 여왕님께 먼저 알리는 게 으뜸가는 미덕 순식간에 명령을 하달 받고 모여든 일꾼개미들 허기를 가는 허리로 졸라매고 물어뜯어 운반하는데 갑자기 불벼락이 떨어진다 또 개미야! 여보, 어디갔어, 지 네 땅에서나 살지 왜 자꾸 들어오지, 더러워, 다 죽여, 치-익, 치-익, 혼비백산 세상 어느 구멍으로 나왔는지 화장실 바닥에 쓰러져 헐떡이는데 내 귀 안에 사는 달팽이 안테나에 잡히는 신호 메이데이-메이데이-메이데이 거품을 물고 내 입에서 비틀대며 기어 나오는
이용언 시인 / 입양인
그때 우리는 비행기 타는 것을 행운이라 여겼지 공항에서 발버둥을 치며 우는 너를 손을 흔들고 웃으며 떠나보냈지 나중에 비행기를 타고 알았다 너무 새파래서 눈물이 나던 조국의 가을 하늘 학교 조회 때 전교생이 부르던 애국가 동해를 벗어나는 데는 한 시간도 채 안 걸렸지 그런 조국이 올림픽을 성공리에 마치고 네 또래 아이들이 커서 이룬 월드컵 4강 신화에 우리는 무턱대고 열광했었지 그때쯤 우리말을 깡그리 잊은 너는 대신 영어를 너무 잘했지 그런 네가 누군가의 실수로 다시 조국으로 추방되어 돌아갔을 때 조국은 말 그대로 아버지의 나라이고 밝은 사회 현대화된 거리는 숱한 영어로 넘쳐나는데 우리말 못하는 게 무슨 대수였을까 싶었다 그런데 네가 어쩌다 길을 잃어 아파트에 올라가 떨어지는 실수를 했는지 믿을 수가 없다 우리 인생이 송두리째 입양된 이 나라 오늘 우리말 신문에서 너에 관한 기사를 읽고 너의 두 이름을 알았지 고아원 원장 아버지가 어린 네게 지어준 이름 너를 파양한 파란 눈 양아버지가 지어준 이름 지금 너를 데려간 나라 그 나라의 아버지는 어떤 이름으로 너를 부르는지 뭐라 불러도 무슨 상관이 있겠니 다만 너를 불러놓고 문밖에 세워두고 있지는 않은지 그 이름들을 엇갈려 놓은 십자가十字街 경계에서 두리번거리고 있을 글썽이는 너의 눈초리 세상에 태어난 죄가 뻔뻔하게 빛나는 아침 해의 뺨을 때린다
이용언 시인 / 아가미
쾅, 할 때마다 몸이 뒤척이어지며 저절로 깜짝깜짝 놀라게 된다
익숙했던 건 물이다 거기는 내가 헤엄쳐 들어간 곳 아직 빛이 생기기 전 위아래가 없이 물로 빈틈없이 채워진 둥근 우주 같은 곳 나는 영락없는 올챙이 아가미로 숨을 쉬며 어디든 자유롭게 헤엄치고 다녔다 그러다 조금씩 불어난 몸이 좁은 터널 가까이에서 빨려 들어갔다 으스러질 것 같은 압력을 온몸으로 견디다 간신히 나온 데가 지금 있는 곳이다
귀 안에 붙어서 소리를 넣어주는 게 무언지 알 수가 없다 껌벅거리며 눈을 떠본다 뿌옇기만 한 것을 입에 넣어 오물거려 삼켜본다 바람이 몸 안을 들락거린다 내가 놀던 물은 다 어디로 빠진 걸까 뭔가 닿는 듯해 벌린 입으로 비릿한 물이 들어온다 전에 뻐끔 거린 맛과 비슷하다 가슴 배가 벌름거린다 휴-우, 이건 분명히 아가미다
아가미의 힘으로 지느러미 수족을 쥐었다 펴고 흔들다가 차본다 아, 이제 내가 빠져나온 둥근 물속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
-시집 『국경지대』 (시산맥사,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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