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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창규 시인 / 명랑한 편의점 광화문 육조거리에 편의점이 생겼습니다 어린애들이 담배, 기생이 잡백계를 사갑니다 양탕국처럼 캄캄한 도성에 명랑한 편의점 통금을 고하는 인경이 울립니다 감수성 과잉의 자시엔 예민한 언어들이 삐뚤어지는데 나는 지금 이곳에 왜 있는가를 생각합니다 식물원을 탈출한 나무가 유실수로 간신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겨울이 걱정스러운 건 나뿐만이 아닙니다 편의점엔 살인의 무감각과 고귀한 멸종이 있죠 애연가들은 담배 갑의 사진으로도 설득되지 않습니다 편의를 위해 누군가는 날을 새고 의자가 필요한 나무들 우유의 유통기한, 피해자와의 관계, 파라솔 아래에서 함박눈을 피하는 법을 이곳에서 배웁니다 야참으로 폐기된 삼각 김밥을 먹습니다 나의 시급은 최저임금이니까요 파루 소리가 울리자 계산대에 엎드려 자던 나는 벌떡, 꿈에서 깹니다
-「시현실」 2017. 겨울호
조창규 시인 / 궁합(宮合)
1 족발엔 새우젓이 제격이라 한복에 하이힐 신고 줄넘기를 폴짝 북극 바람, 남극 구름 보약을 먹고 흰 머리카락이 국수처럼 뽑아져 나오네 족제비 상남편과 닭상 아내 기울어진 책들 틈으로 이제껏 선본 여자들이 스쳐가 궁궐 안 왕, 사대문 밖 거지 우리는 가끔 정반대의 신분을 꿈꾸지 양반 속에 백정 있고 궁녀 중에 황후 있어 김홍도와 혜원은 찰떡궁합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오히려 금슬 좋은 법 -금침이 열 벌이라도 속궁합 못 맞춘다*
2 개띠와 용띠는 상극이라 밤에도 해지지 않고 낮에도 달 떠 있네 팔자 사나운 나에게 버려진 젓가락 한 짝이 서쪽을 가리키네 우물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내가 윤동주에게 말하기를 '고독은 나의 살(煞)'이었소 시대가 당신을 선대하지 못한 것뿐이오 그의 상돌에 내 애틋한 심령을 올리네 먼 서쪽에서 나를 찾아올 홍 씨 성을 가진 귀인 어긋난 태생들로 꿰맞춰지는 길흉 나는 밀가루 반죽으로 피리를 만들어 절뚝이는 것들을 불러 모은다 -유행은 시대와 배꼽을 맞춰 태어난 것들이다
*고추장 단지가 열둘이라도 서방님 비위 못 맞춘다」 속담 개작
- 월간 <현대시> 2020년 4월호, 신작특집 -
조창규 시인 / 스팸 여자
소변을 보는데, 우리 커플만의 닭살벨소리 허겁지겁 휴대폰을 꺼내다 그만 풍덩, 변기에 빠뜨렸네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게, 변기에 렌즈 떨어뜨린 후 첨이네 활들짝, 지퍼를 올리고 애인을 빼냈네 와인 한 잔 못 사 줬는데 오줌물 먹여 미안,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어? 그동안 화끈하게 다 벗은 스팸 여자, 이제 볼 수 없겠지 애인 몰래 저장한 누드 사진들과 이별을 준비하며 지린내 나는 당신을 휴지로 닦네 통화권 이탈한 그대 전원을 다시 켜도, 먹통이네 아, 씨발
조창규 시인 / 늦가을
사과나무는 선크림을 바르지 않아 새빨갛게 탔다 곶감처럼 건조한 늦가을 찬물에 서서히 집어넣는 맨발 가을과의 듀스 끝에 어드밴티지를 얻은 겨울 나뭇가지마다 바삭한 캐나다 국기가 달린다 신간이 나올 때까지 과월호에 낙엽을 끼워놓고 숲과 함께 번성한다*를 종이 냅킨에 쓴다
*벨리즈 국기에 적혀 있는 ‘SUB UMBRA FLOREO’ 문장
조창규 시인 / 불난 엉덩이에 댓글 달기
마취에서 깨니 어찌나 항문에 열불 나든지 뒤로 호박씨 짠 거유? 아님 뭐 찢어지게 가난혀서? 사실 치질 수술하러 갔다우 울다가 웃다 생긴 털두 깎구 아프고 쪽팔려서 증말 붉닭찜 먹구 피똥 싼 후로 올해 화재경보된 대참사유 학문을 힘스고, 넓히고, 닦자 소화불량에 치질 걸린 공부하기 싫은 항문! 다행히 수술이 잘 됐다 하니 앞으로 매운 학문을 먹지 말아야겠수
문병 온 이웃들
곰탕재료푸우 앗싸, 원빠 수박씨발아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고 닭큐멘터리 닭쳐! 밥 먹고 있는데 드럽게 둥근해가 떡씹니다 엉덩이에 소화기 뿌려여 변비대학 항문외과 다음엔 꼭 우리 병원으로 오슈 안졸리나 졸려 아녀, 휘발유 부어야 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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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창규 시인 / 푸른 달
새들이 공중의 묏자리를 살핀다 주검을 몸에 실은 새들은 죽은 자를 먼 하늘에 묻는다
사다리를 타고 하늘로 오르는 그녀 새의 사전에 하늘을 걷는 자의 신발은 구름이라고 적혀 있다 허공의 왼쪽으로 신발의 그림자가 지면 몇 겹의 정적이 조장터를 감싼다
부리에 찢긴 뼛가루가 잿빛으로 부서지는 밤 업을 마친 걸음에 전생의 뒤가 묻어 있다 토번족 여인의 흑발 같은 어둠이 자전의 방향을 따라가고,
오래된 천장 벽화에 푸른 달이 찍힌다
적도를 넘어온 바람이 마니차를 돌리고 피 묻은 야크의 울음이 서역으로 흘러간다
이생의 배경 밖에 서 있는 그녀, 영혼의 신발을 고른다
천국의 사자使者들이 마흔의 봄을 공중에 묻을 때 비로소 하늘은 묘비가 없는 신발장, 지난한 족적이 고스란히 따라왔다
절반의 순례를 마치고 내세의 동쪽을 향해 걸어간 그녀 잠든 육신마저 썩지 않는 이곳에서 제사란 죽은자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자를 잊는 것이므로 그녀의 유언은 계속 부패될 것이다
조창규 시인 / 국기를 덮고 잘 때, 삼나무는 움을 틔우고
레바논 국기에서 삼나무를 벤다 죽은 자로부터 생명을* 국목(國木)으로 순국자 관을 짠다
파란 담요 위에서 노란 고양이가 둥글게 몸을 말고 있다 일장기와 색깔만 다른 팔라우 국기 이불을 덮고 자면 순국자가 된 거 같다 담요 속으로 쏙, 들어간 고양이
붉은 십자가가 그려진 범선의 돛이 펄럭인다 대항해 시대, 바다가 미치면 깃발은 사이렌이 되었다 태극기에 대하여 경례 유니언잭은 에베레스트를 최초로 등반했다
옅은 하늘에 아르헨티나 국기가 펼쳐진다 눈, 코, 입이 있는 해를 포위한 무지개 햇무리에 갇힌 태양의 독립선언문
청색맹(靑色盲)에게 프랑스는 이탈리아로 보인다 욱일기로 덮였던 그루터기 전생이 이준 열사였던 삼나무는 벌목에도 불구하고 다시 움을 틔우고
*삼나무의 나무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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