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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우 시인 / 회색이 될까 하루가 망가졌다고 생각하면 손을 씻었다 시간을 부순 공구가 철로 된 연장은 아니겠지만 마음을 망치는 것들은 피 냄새가 나니까 시를 읽는 사람이 무대에 올라 조명을 쬐고 있다 빛과 소리가 섞여 객석으로 넘친다 관객들이 말을 가두고 저녁에게 어둡고 차분한 길을 터주고 종일 무거웠던 목젖을 누르며 걸어 지나가는 목소리 면접관 앞에서 떨었던 오후에는 햇빛에 다른 빛이 들떠 번들거렸다 한참을 걷다가 간이화장실에 들어가 표정에 비누칠을 했다 웃음과 울음이 빠르게 점멸하는 얼굴을 세척하는 박수 소리 낭독자는 인사의 예절로 빛에 머리를 헹군다 빛은 그다음의 빛을 견디기 위해 잘 섞어두려고 했는데 나는 수많은 질문을 놓치고 허튼 대답을 했다 허공에 떠다니는 먼지들의 찬란 속에서 운명을 반사할 별자리의 모양을 찾으려다가 모르겠어요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가장 아끼던 빛깔을 쏟아버렸다
최현우 시인 / 거짓말
내가 그랬어요, 그애는 나빴고, 지켜주고 싶은 사람이 있
었어요, 세제를 탔어요, 물병에, 내가 그랬어요, 죽이고 싶
었어요
없는 아들이 불쑥 말하고 침대에서 튀어나와 현관을 열고 유치원으로 갔다 어린 아들과 아들의 어린 친구는 손을 잡았다 어른처럼 울기 시작한 아이들의 앞에는 다른 아이가 쓰러져 있고 백발이 자라고 있었다
(죽이고 싶었니? 정말 독을 넣었니?)
다친 아이를 싣고 가는 구급차 안에서 아들이 대답 없이 친구를 더 꼭 안았고 그 작은 애인이 나를 무서워했다 나를 무서워하는 친구를 끌어안은 나의 없는 아들 쪽으로 길이 가라앉고 있었다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찼어요, 가위로 몰래 머리를 자르
고, 울면 웃었어요, 선생님에게 들키지 않았어요, 그애는 나
빴고, 지켜주고 싶었어요, 힘이 세니까, 죽이고 싶었어요,
미안해요, 내가 그랬어요
( 죽이고 싶었니? 정말 때렸니?)
돌아온 집에서 아들은 계속 울었다
말랑말랑한 눈물이 내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지켜주세요, 제발 지켜주세요 같이 울던 친구를 돌려보내자 아들은 사라졌다
새치를 모조리 뽑고 잠이 들어도 아침이면 흰머리가 자라기 시작했다 아들이 밤마다 다가와 울고 있었다 나를 단단히 끌어안고 놓을 수 없다는 듯
실려간 아이가 마신 물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지만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고 어떤 울음소리가 웃으며 내 흰머리를 하나씩 세고 놀았다
-시집 『사람은 왜 만질 수 없는 날씨를 살게 되나요』 문학동네
최현우 시인 / 면도하는 밤
날씨는 태어난 곳의 기억을 버리지 않는다. 허공의 봉합선에서 구름 몇 가닥 풀려나오고 병실 밖 하늘을 보면 지구도 아픈 곳 같다. 간호와 감호의 차이가 모호해지는 밤. 병원 건물이 지상과 하늘 사이에서 자꾸 짙어 진다. 어린 날, 아버지의 면도가 부러웠던 때, 몰래 따라 하다 인중에 생긴 흉터가 입술을 누르는 시간. 이 밤에 빨리 수염을 밀어달라는 아버지 를 앉혀놓고 달빛이 날카롭다. 창밖으로 면도칼이 지나간다. 아버지는 날씨를 뒤집어쓴 듯 먼 곳을 향해 식어가고 있다. 인중 앞에서 애를 먹는다. 줄곧 만져본 적 없는 저 얼굴. 아침마다 잘 깎아놓아 대리석 기둥 같던 얼굴. 모국어가 그리운 사람처럼 말이 없다. 오늘, 아버지의 인중 속에서 몇 마리의 구름을 보았다. 돌산을 오르고 있었다. 구름의 길은 사람이 가지 못할 곳, 몇 마리는 오르다 떨어져 죽은 곳, 멀리서 보면 길인 줄 모를 곳, 오래된 발굽 자국이 꽃으로 보이는 곳. 침상 위로 하얀 편자 하나 떨어진다. 세이브 크림의 냄새만 싱싱하고 옆으로 누운 아버지는 짙어지고 있다. 그 모습을 몰래 따라하고 싶었다.
최현우 시인 / 꽃
누가, 아주 잠깐 만지고 간 거라고
꽃이 피었습니다 꽃이 자꾸 피었습니다
전부 죽고 다시 사는데
누가 꽃이 되었을까요
-시집 <사람은 왜 만질 수 없는 날씨를 살게 되나요!>에서
최현우 시인 / 나의 실패 -날개 달린 것들
여름과 매미 평범한 짝꿍 이제 짐짓 아는 체하는 일에 지쳤어 여름이고 다 자라버려서 매미가 울고 있을 뿐인데 거기서 비의와 교의를 찾는 일 따위
매미가 우는 일에 매미처럼 울지도 못할 거면서
통곡은 몸에서 멀고
늦은 오후, 흑색 도시는 매연으로 부풀어 사람의 마음에 기관지를 달고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게 있다는 걸 들어막아야 할 검은 입가가 있다는 걸 알게 한다
어디를 가려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은 대충 눈을 감고 팔짱을 낀다 길인지 굴인지 모를 갱도의 각도로 자신을 접는 방식으로 지하철과 버스에 앉아 퇴근을 하고
너는 높은 곳으로 갔다
나약하고 조악한 사람
우리가 조금 더 어렸더라면 손에 쥐여 줄 지폐와 동전을 가지고 다녔을 텐데 잡동사니 하나 없는 호주머니가 미래적인 것이라면 더 먼 미래에 갑자기 떠나가는 사람에게 황급히 무엇을 꺼내야 하나
주머니 대신 주머니가 되는 그런 게 미래의 아름다움이라면 아아, 이제 그만할래
골목에서 비스듬히 돌담에 기대 네게 하고 싶은 말, 문자메시지를 적고 있는데 하필이면 발밑으로 매미가 죽어 있다
새카맣게
날개를 접으면 양문으로 닫힌 관이 된다는 걸
여름의 모든 바닥, 네가 높이 갔으므로 이 말은 너에게 하지 않기로 한다
-사이버문학광장 《문장 웹진》 (2022년 10월호)
최현우 시인 / 회벽
유목을 멈춘 이후로 벽이 발명되었다 그때부터 밟혀서 지워지지 않도록 사람은 기억을 벽에 옮겨 보존하기 시작했다
하나의 전시를 철거하고 나면 차고 흰 벽에는 못 구멍들이 남았다 한 점으로 흘러나오는 벽의 내부 밀도 높은 어둠이 근육이라는 것을 알았다
다음, 다음으로 전람회는 열려야 하기에 벽은 회복을 시작하고
통증을 빻아 만든 가루 시간에 불행을 섞어 한웅큼 집어 바르고 모르는 거리에서 몸을 말리면
지구도 지구를 교체하기 위해 재앙을 사용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새벽을 펴 바르며 간밤의 별자리를 문질러 메우는 손
나는 복원되지 않는다. 무수하게 뚫고 메우다 보면 처음의 벽은 이미 사라진 벽 우리는 어둠을 갱신하며 서 있다
-시집 <사람은 왜 만질 수 없는 날씨를 살게 되나요>에서
최현우 시인 / 겨울의 개
눈 오는 날, 개는 불러도 오지 않는다 발자국을 물고 뛰어오려다 자꾸 놓친다 내가 잃어버린 줄 알고 나를 잃어버린 줄 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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