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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신구자 시인 / 월차를 내다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16.
신구자 시인 / 월차를 내다

신구자 시인 / 월차를 내다

 

 

때로는 태양도

쉬고싶을 때가 있는지

오늘은 일찌감치 월차 내어

구름속에서 쉬고 있는 모양이다

 

나도 이따끔씩

내 생 월차 내어

주유천하하고 싶을 때 있다

 

 


 

 

신구자 시인 / 소멸

 

 

단풍 물든 사람들

계룡산 단풍 함께 물들러 갔다

단풍 재촉하는 것 서러웠던가

비 내려 도중에서 마음 접은 채

머지않아 계곡 물소리도 춥겠다 다독이며 내려오다

계룡산 축제 한마당

"봄날은 간다" 춤 보았다

환희의 페달 밟던 한 무더기의 꽃송이들,

흰 날개옷 나비처럼 生을 피워올리며

스러지듯 스러지듯

풍경 밖으로 지워져 갔다

찬란했던 저 봄날 같던

 

 


 

 

신구자 시인 / 떠나고 싶을 때 있지

 

 

떡잎 같은 일상의 비늘들

후두둑후두둑 털어버리고

문득 어디론가

떠나고 싶으 때가 있지

두 눈 반짝이며

줄레줄레 따라 나서는 강물이든,

얼기설기 인연의 씨줄처럼 얽혀있는 산이든,

잡초밭이든, 연꽃밭이든,

꽁무니에 매달고

지나온 수많은 길들을 뜯어

가슴팍에 품고

너에게로 열려 있는 이끼낀 세월

한 알씩 한 알씩 부화시키며

그것이 끝내 닿을 수 없는 벼랑의

끝에서 추락한다 해도

덜컹거리는 삼등 열차를 타고

흔들흔들 떠나고 싶을 때 있지

 

 


 

 

신구자 시인 / 조화調和

 

 

비틀비틀 갈지 자 걸음 걷는

뒷모습 보여주는 세상

서로 부딪히지 않고

굴러가는 이치 보려거던

봉황산 기슭 결가부좌한 채禪定에 든

부석사 석축 가서 보거라

잘 여문 바람결에 고개 끄덕이는 나뭇잎들처럼

절로 고개 끄덕여지리니

큰 수레덩이만한 것에서 갓 태어난

아가의 주먹만한 것들이

하나도 닮지 않은 사람들 모습처럼

둥것 것 모난 것 길죽한 것 넙적한 것들

위에서 아래서 그리고 옆에서

희망과 절망,적막까지도 서로 받치고 끌어안은 채

푸른 이끼 낀 세월 흐트러짐 없는

자태 만날 수 있으리니

 

 


 

 

신구자 시인 / 절정은 다 있다

 

 

응달의 목련

이제 겨우 눈뜨기 시작했는데

양달의 목련 고개 빳빳이 들고

서릿발 고고함 공작깃처럼 펼쳐 보이더니

어느새 고개 떨구었네

 

세상의 모든 만물들

어느것이나 인연따라

절정은 다 있는 법

다만 높고 낮고,

앞서거니뒤서거니 할 뿐이다

 

-시집  <낫골가가는길>에서

 

 


 

 

신구자 시인 / 중앙로에서

 

 

오늘도

중앙로에서 성긴 바구니에

꿈을 줍는다

 

가을날

에메랄드 눈처럼 반짝이던

영혼의 조각들과

 

언제나 통곡같은

절절한 목마름으로 엉겨피던

불꽃 사르비아

 

지금은 썰물처럼 지워버린

황량한 이 거리에서

영혼이 은비늘 같이 퍼덕이던 곳은

어디쯤 일까?

 

낮선 대문 기웃대는

지천명의 아낙이여

 

오늘도 중앙로에서

성긴 바구니에

꿈을 줍는다

빛을 줍는다 물러선

세월의 잔해를 줍는다

 

 


 

 

신구자 시인 / 수계 받는 은행나무

 

 

송림사 해우소 앞

어둠 닦아내며

묵언수행 하고 있던 은행나무

온종일 내리는 비에 온몸 닦고

삼귀의례 합장하며

살며시 땅 위로 몸 나투어

수계 받던 노란 수행자들

 

 


 

신구자 시인

1939년, 경북 칠곡 약목 출생. 1994년 『대구문학』 신인상 시 당선. 1999년 『불교문예』 신인상 시 당선으로 등단. 시집 『낫골 가는 길』 『지금도 능소화는 피고있을까』 출간. 2015년,「한민족作家賞」수상. 한민족작가회, 현대불교문인협회, 대구문인협회, 대구시인협회, 여류문학회, 칠곡문학회 회원. 반짇고리문학회 회장 역임. 대구시인학교 <사림시>, <솔뫼> 동인으로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