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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허영둘 시인 / 나이를 먹다 외 10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16.
허영둘 시인 / 나이를 먹다

허영둘 시인 / 나이를 먹다

 

 

찬밥 더운 밥 가리지 않고 참 많이도 먹었다

웃음은 팝콘처럼 튀겨 먹고

스무 살은 선짓국처럼 후후 불며 먹고

시어머니는 고추장에 쿡 찍어 칼칼하게

잠은 파자마처럼 헐렁하게 먹고

그리움은 공중에 둥실 띄운 살구꽃 한 채

만개한 분흥으로 흐드러지게 먹고

 

채우고 비우며 예까지 오는 동안

내 나이에도 조금은 깊은 맛이 들었을까

 


 

허영둘 시인 / 바늘

 

 

입을 열어

따끔한 말로 일침을 놓을까

말이 산을 이루는데

나까지 말보태어

무엇하리

 

귀 하나만 열어둔 채

실금 그어지는 소리까지

들을테야

 

나는 본래 무쇠덩어리

꼿꼿한 정신 세우는 데

얼마나 호된 연마였더냐

 

너희가 부드럽고 따뜻한 혀로

편 가르기 할 때

나는 뾰족하고 차가운 머리로

남루를 쓰다듬을 거야

 

한땀한땀

균열을 다스릴 거야

 

 


 

 

허영둘 시인 / 토마토의 감정​

 

 

칠월의 토마토들이 나를 에워싼다

모자를 쓴 토마토들이 접시에 누운 나를 내려다본다

뜨거운 토마토의 농담이 심장을 푹 찌른다

나는 토마토의 붉은 감옥, 토마토의 묽은 생각

증오 없는 토마토의 폭력 속에 한없이

평화로운데

태양이 쏟아진다 토마토의 내면이

뭉클뭉클한 감정이 쏟아진다

이목구비 없는 나의 사상이 함께

쏟아져 내린다 나는 생각할수록 반 토마토 적이다

나의 사상은 생각할수록 광물적인 것

지평선으로 뜨거운 즙이 흘러내린다

너를 떠올리는 나의 오후가

번져간다

토마토는 토마토의 시선으로 평화롭고

나는 토마토의 감정으로 너를 기억하려 하는데

토마토는 말이 없고

어느새 토마토는 지평 너머로 멀어져 가고

-계간 <시향> 2015년 봄호 현대시 펼쳐보기 50선 수록

 

 


 

 

허영둘 시인 / 은행털이

 

 

백성의 은행(銀杏) 털이는 유죄, 나으리의 은행(銀行)털이는 무죄

공적(公的)자산을 公敵자산으로 착각하신 분들이 하 많다보니

공적(共敵)말이야 공공의 적,, 뉘신지 몰라?

 

 


 

 

허영둘 시인 / 거꾸로 가는 정치는

 

 

정치를 거꾸로 읽으면 치정인데

거꾸로 가는 정치는 치정(癡情)이랑 결말이 같아

10년 전으로 되돌아간 민생에 파탄 난 가계 수두룩

 

 


 

 

허영둘 시인 / 뱉지도 삼키지도 못해

 

 

지난 한 해 株式이 주식(主食)인 사람 많았지

主食인 줄 알고 뒤늦게 꿀꺽 삼키다 목에 걸린 사람들

후식 먹고 입 닦는 사람 발견했을 적엔 이미 때 늦은 후

 

 


 

 

허영둘 시인 / 보소 있소 아소!!

 

 

미친소 미친소 하지마소 근본적인 인식의 촛불을 켜 보소!

한 조각 고기에서 동물의 고통을 느껴본 적 있소?

고기 없으면 밥 못 먹는 인간들 탐욕이 광우병 주범인 줄 아소!!

 

 


 

 

허영둘 시인 / 난세에는 난(飛)새가

 

 

난세에 어느 섬은 철새들 천국이 되지

나는(飛)새 날갯짓에 가려 한 치 앞이 안 보이는 정국에

사람들은 조류독감에 걸린 듯 기침을 해대고

 

 


 

 

<풍시조>

허영둘 시인 / 지구의 콩팥

 

 

숲이 지구의 허파라면 간석지인 습지는 지구의 콩팥

콩인지 팥인지 모르는 사람들 간석지 메워 간척지 만드느라 혈안

지구 병들어 죽음의 늪에 빠져봐야 정신 차릴 건가

 

 


 

 

허영둘 시인 / 펀펀이 펑펑 되었으니

 

 

반토막 난 펀드에 중산층 파산 경고등 켜져

아버지는 잠 못 이루고 아들은 결혼 계획 무기한 연기

펀 펀(fun) 하던 펀드에 강펀치 맞고 부자가 눈물 펑펑

 

 


 

 

허영둘 시인 / 밤보다 무서운 건 밥이라는

 

 

외딴산속의 밤길은 망망대해같이 두렵고 고독한데

도깨비불처럼 깜빡이는 가게를 지나치며 깨달은 무서운 진실

밤보다 무서운 건 밥이로구나, 채워야 하는 밥숟갈

 

 


 

허영둘 시인

1956년 경남 고성 출생.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 수료. 2012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 『달의 엄지발가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