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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석미화 시인 / 오늘 하루 어땠나요?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16.
석미화 시인 / 오늘 하루 어땠나요?

석미화 시인 / 오늘 하루 어땠나요?

 

나는 안부를 물어주는 사람이 되었다

 

하루 종일 허둥댔다는 말은

선량한 당신들에게 정직하지 않은 말이 되었다

 

당신들에게서 마른 잎인 채 암흑이 오는 밤

영원히 삭제된 풍경을 보내오는 한밤

무릎 꿇고 용기를 달라고 기도할 때라고

좋은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되었다

 

열락하지 마라

두려움의 먹이였다고 생각하지 마라

 

매일 안부를 물어주는 사람이 되면

영원토록 그 일을 하게 될 것 같아

부끄럽고 무서워졌다

세상 끝은 아직 멀었지

제 풀에 죽을 것 같아 검푸르러졌다

한여름에도 얼음을 이고 있는 당신들

뜨거움이 녹아내리는 표정은 과장되지 않았다

 

여기만 아니면 될 것 같아

산을 떠나면서 섬에게 안부를 묻고 있었다

 

오늘 하루 어땠나요

대부분의 당신들이 나에게서 무사하기를 기다렸다

나는 산란하는 안부를 묻고 있었다

당신들의 눈빛에서 내 눈빛을 가리면

 

슬쩍 초사흘 눈썹달이 걸렸다

 

-<시인수첩> 2023년 봄호 수록

 

 


 

 

석미화 시인 / 명옥헌

 

 

 ㅡ 한 시인이 도착했을 때 나비 두 마리가 놀고 있는 줄 알았다고 했다 여자는 눈이 멀었고 딸은 얼굴이 꽃같이 예뻤다고 했다

 하지를 훨씬 넘어서였다 긴 눈썹 그림자를 두른 때문일까 연못에는 꽃나무의 구불거림이 흘러넘쳤다 바람이 없으면 좋을까

 꽃가지에서 빛을 뽑아내는 여자의 눈빛이 아물거렸다 낮달에서 부서지는 딸은 나비를 쫓으며 놀고 있었다

 여자와 딸이 서로를 간질이는지,

 간지럼나무는 물가로 드러눕고 있었다

 물속으로 멀어지는 구름, 주름 접힌 꽃들, 실가지는 길을 자주 바꿨다

 붉은 꽃그늘이 깔리고, 여자와 딸은 싸온 도시락을 언제쯤 먹을까, 바람이 불어오면 더 좋을까 물소리가 물소리와 부딪쳤다

 

 


 

 

석미화 시인 / 베르너 사세라고 들었다

 

 

 사세 씨, 당신이 사랑하는 한국 여자,

 그 여자의 모국어로 쓰인 월인천강지곡, 용비어천가를 독일어로 번역했다지요

 

 당신 나라의 움라우트(..), 내 나라의 아래 아(.)가 어떻게 만나는지 더듬어 보는 낮 월인천강지곡, 용비어천가는 신비한 낮별처럼 들리고

 두 나라의 옛 왕이 시인이었다는 생각에 가뭇가뭇 들이치는 햇빛

 

 만리 바깥의 일이지만

 눈에 보이는 듯 생각하소서

 

 천년 전의 말이지만

 귀에 들리는 듯 생각하소서

 

 오늘은 여기, 당신이 살던 집 대청마루에 앉아 보아요 저 화단, 백 년 된 영산홍만큼 한글 자모에 붉은빛 비췄을까요 천장을 올려다보면 두 개의 커다란 느티 대들보, 양국을 오가는 배로 써도 무리가 없겠다 싶지요, 여름 한나절 마당으로 물바람이 불어

 

 한국 이름을 사세(世)라고 지은 마음이 환한 빛에 나앉습니다 처음과 같이 첫소리와 끝소리 모은 물망장(章)닛디 마셔 이제 독일어 노래집을 펼쳐 보면

 

 서로의 바다를 건너가는 문자향이 환한 빛을 여닫습니다

 

 


 

 

석미화 시인 / 미암일기

 

 

 하루를 더 아껴 두어야 할 곳이 있다면 미암일기를 보러 가는 것이다 아내의 시를 엮어 둔 목판본 일기, 그의 서체를 보러 가는 날은 서둘러 나무향을 넘겨보지 말아야 할 일이다

 

 꼭 오늘이어야 한다는 이유는 없겠지만 비의 행간으로 묶인 날이었지 내게 남은 한 사람의 비가(悲歌) 형식이 아니어도, 아름다운 해서체를 흘러내리듯 썼을 거라는 짐작은 있었지 미음으로 마무리 지어지던 저녁, 당신을 부르는 것 같아 입이 닫히지 않았지

 

 책판은 유리 안에서 나를 내다보고 있지만 물 밑 수장고에 얼마만큼 쌓여 있는지, 어떤 행간이 숨어 있는지 숨겨 둘 일, 아내의 시구절을 자신의 마지막 서책에 붙여 일기의 형식은 무사히 마무리했다 그 시절의 꿈이 시편마다 스며든 아내의 종이책, 끝내 찾지 못해 마음이 거기까지 가닿았다

 

 


 

 

석미화 시인 / 나와 남자는 웃었지요

- 샤갈에게

 

 

 문구점 가는 길에

 염소를 몰고 오는 남자를 보았어요

 저 염소가 어디서 왔을까

 

 안녕, 작고 하얀 뿔

 만나는 구름 헤어지는 나무

 

 돌아오는 길에

 염소를 몰고 오는 남자를 다시 만났어요

 

 나와 남자는 웃었지요

 두 길이 합쳐지는 곳

 나는 붓펜과 크로키 북을 들고 있었어요

 

 “문득 내 오른손 손가락은 일곱 개인데 왼쪽에는 다섯 개”로 보일 때가 있지요

 그것을 그렸지요

 

 저기, 요

 남자가 말했어요

 우리 천변이라도 걸을까요

 

 나와 염소와 남자는 물 건너 언덕을 향해 갔어요 언젠가 본 일이었지요 그림 속 그림으로 들어간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뛰어놀던 들판, 염소와 연인이 흘러들며 빛나고 있었어요 이리 와 작고 하얀 뿔, 염소는 뿔을 바위에 긁어 대고 있었어요 손바닥에는 물결, 이마에는 풀냄새 마을의 잔치가 곧 시작될 거예요

 

 


 

 

석미화 시인 / 턴테이블

 

 

백년의 우물이 있었다

 

민박집 여자는 나와 마주 앉았다

 

이제 이 방의 주인은 당신이에요

 

무슨 소리지요, 밤새 물소리를 들어보세요 우물은 내려설 수 없는 물무덤이었다 나를 거기에 앉혔다

 

그러니까 앞으로 백년을 내려다보아야 했다

 

나는 나를 자주 비껴 앉았다

 

끝까지 들여다보는 사람이 드물긴 해요, 집 안으로 우물을 들여놓은 것이 아니에요 우물을 밖으로 내다놓지 않은 거지요

 

민박집 여자는 우물을 바라보는 데 백년이 걸린다고 했다 메꾸지만 않으면 된다고 했다

나를 올려다보는 일을 그만두었다

 

-계간 《시인시대》 2021년 가을호

 

 


 

 

석미화 시인 / 1945년생 닭띠들의 계모임

 

 

유리진열장 속 끝도 없는 색색의 알약들

 

밥보다 약이 더 많아진다는

45년생 해방둥이 그녀들,

 

잊은 듯 기억날 때마다 죽음이 봄날 흰 가루약처럼 퍼지고 있었다

 

 


 

석미화 시인

1969년 경북 성주에서 출생. 2010년 계명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대학원 졸업. 2010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2014년《시인수첩》 신인상 당선. 2019년 ‘아르코 창작기금’을 수혜. 시집 <당신은 망을 보고 나는 청수박을 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