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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주병율 시인 / 패랭이꽃을 위한 기도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16.
주병율 시인 / 패랭이꽃을 위한 기도

주병율 시인 / 패랭이꽃을 위한 기도

 

 

그 날 나는 너를 위해

기도를 하였던가

해거름에 집을 나간 여자처럼

거리를 헤매다가

밤이 늦도록 집 앞 가게 슈퍼 백열등 아래에서

대머리 주인아저씨와

늦은 술추렴을 끝내고 돌아온 날 저녁

칠흑의 밤하늘은 너무 멀고

패랭이꽃 같은 너를 위해 했던

지난날 기도가 생각나지 않는다

울지 말자

오늘은 너를 위해

하늘 가까이

사위어 가는 별 하나가

창백한 이마를 씻고 깊이 깊이

가라 앉는다

 

 


 

 

주병률 시인 / 숭어

 

 

지난겨울에도 나는 바다의 숭어를 사랑하고

 

눈이 멀었네

 

어두워지는 포구의 뱃전에 앉거나 기대어서 귀기울여 보지만

 

삼남 천지에 네가 왔다간 소리는 듣지 못했네

 

먼 바다를 건너와 하루 종일 내리던 눈보라 속

 

아직도 젖은 하늘에 길이 있다면

 

지워버리고 지워버리고 싶은 은종이 같은 비늘 하나

 

이제 어디로 가랴고 내게 다그쳐 부는 바람만 곁에 있어서

 

지난겨울에도 여전히 나는 바다의 숭어를 사랑하고

 

눈이 멀었네

 

 


 

 

주병률 시인 / 지금

 

 

누가 찾거든

어제 저녁 밤늦게까지 돌아다니다가

나는 잔다고 해라

어제는 가고

내일은 아직 여기 없으니

누가 찾거든

옛날 방에서

아주 잔다고 해라

 

 


 

 

주병률 시인 / 지리산4

 

 

꽃피는 봄에

배추꽃 노란 꽃잎 뒤로

새 한 마리 아스라이 파묻히는

하늘을 보다가

기다리는 사람없이

홀로 저무는

외딴집

 

 


 

 

주병율 시인 / 소금

 

 

기차를 타고 있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들판 가득 저녁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바다는 보이지 않았다.

새들도 보이지 않았다.

마른 풀은 이미 다 말라서

더 마를 것 없이 바람에 흔들려도 마르지 않았다.

너무 먼 숲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기차를 타고 있었다.

들판 가득 저녁연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시집 <빙어> 천년의시작

 

 


 

 

주병율 시인 / 생강나무가 가득한 마을

 

 

생강나무 열매마다 흙냄새가 가득한 마을입니다

열매는 추분 무렵에 익는다고 합니다

수피마다 화분(花粉)과 바람이 익어서

어혈과 팔다리가 아픈 사람들이 쓴다고 합니다

추분에는 팔다리가 아픈 사람들이

거르지 않고 다녀간다고 합니다

이맘때엔 할미새도 어치도 귀밑머리가 하얗고

해가 지자 마을은 금세 적막해집니다

무등받이 마을이어서 불빛들은 더 빨리 꺼집니다

멀리서 늙은 개 울음소리가 찬 공기에 실려옵니다

둥에 무거운 짐을 진 개임이 분명합니다

생강나무 마른 잎새마다 달빛이 사각거리는 밤입니다

할 수 없이 늙은 개도 잠을 자고

생강나무 열매마다 흙냄새가 가득한 밤입니다

 

 


 

주병율 시인

1960년 경북 경주 출생. 본명 주병진. 고려대학교 대학원 한국어문학과 졸업. 1992년 월간 《현대시》에 〈오후의 잠〉 외 5편으로 등단. 시집 『빙어』. 현재 도서출판 <생각과표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