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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완 시인 / 블랙에서의 변주 변명처럼 검은 옷을 걸칩니다 넓은 호수는 밤을 닮아 잠잠 해집니다 해 집니다 마음의 벼랑이 어둠을 붙들고 이를 악뭅니다 혁명은 후유증에 가깝습니다 사라진 것들을 추억합니다 달콤한 편지를 찢어버립니다 등을 돌립니다 나부끼는 깃발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죽음을 살아가는 정부가 무정붑니다 예의상 나누던 목례가 그립습니다 아무 말이 없습니다 석양을 맴돌던 붉은 눈동자를 삼킵니다 뱃속에 뜨거움이 있을 따름입니다 흔적은 아주 조금씩 사라져 놀랍게도 새살이 됩니다 그때 완벽한 망각을 알게 되는 건 변명처럼 입은 검은 옷 때문입니다
성기완 시인 / 눈 ㅡ2013.02.26. (화) 아버지 돌아가시던 날 오후
눈을 한없이 뜨고 깜박이기는커녕 뜨고 있는데 눈물도 안 흘리고 뜨고 있으나 바라보지도 않고 너무 멀리 보고 있어서 여기에는 관심도 없고 눈을 마주치려는 엄마를 쳐다도 안 보고 보고 있으나 보는 것이 아니고 영원히 영원을 목격한 그 눈은 안개 너머 새 세상에 가 있는 무심히 남겨진 육체의 등잔 손으로 꺼드리니 스르르 감기고 육체는 절대적으로 순응하고 학원에서 아이들 가르치다 소식 듣고 막내가 뒤늦게 달려와 곁에 서자 비로소 아버지 눈가에 미소가 돌고 누런 오후 하늘에 달무리 지고
-시집 《빛과 이름》에서
성기완 시인 / 쉼표에서 시를 듣다
사라짐, 터울림, 전체
리듬은 비트들이 만들어내는데 그 비트는 사라짐을 통해서만 자신을 드러낸다. 꺼지지 않는 비트란 존재하지 않는다. 사라짐은 비트의 존재 조건이다. 한번 시작된 소리는 언젠가는 사라진다. 이론적으로 한 번 떨린 파장은 영원히 0의 상태, 다시 말해 궁극적인 '리퀄리브리움(Equilibrium)-평형상태'에 도달하지 않는다. 한번 움직인 목숨은 영원히 떠돈다. 그러나 그 목숨은 지각되지 않을 만큼의 작은 파장으로 숨을 죽이며 사라진다. 그것이 죽음이다. 소리는 사라짐이라는 본질적인 위爲, 또는 무위無爲를 통해 스스로를 증명한다. 소리가 사라진다는 건, 없어진다기보다는 전체로 '퍼진다'는 뜻에 가까우리라. 나는 이처럼 퍼져 나가 전체 안에 수렴되는 소리를 '터울림'이라고 이름 지은 바 있다.
터울림은 개별 존재와 그 터전이 대화한 결과다. 목숨을 지닌 영혼은 죽음을 통해 전체로 복귀하면서 물질적인 개별성을 내어준다. 그 짧은 틈들이 명멸하며 다양한 비트들을 구성하고, 그것들이 수많은 장단을 만들어낸다. 이 사라짐은 덧없는 것이기도 하고 영원히 상승 또는 하강하는 나선의 회전력을 발진해 내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긴 침묵을 청하는 쉼표 하나를 마주한다. 우리는 과연 '말하기 위해' 시를 쓸까, 말하지 '않기 위해' 시를 쓸까. 힘들의 자기장이 그려내는 보이지 않는 곡선들처럼, 말과 말 '사이'에 시가 존재한다.
-계간 『문파』 2022-여름(64)호
성기완 시인 / 서시 ― 틈과 마디
틈과 마디를 다오 빛이 옹이지게 해다오 봄볕 아지랑이처럼 춤추는 그림자를 다오 땅바닥 위로 일렁이는 돋아난 마디를 다오 틈서리 비집고 크는 비밀을 문틈으로 들여다본 어둠 속에서 찰랑이는 너를 내게 다오
-시집 『쇼핑 갔다 오십니까?』에서
성기완 시인 / 게으른 기타리스트의 발라드  ̄Ou` sont les neiges d'antan?*
나는 흥얼거렸지 배 위에 기타를 얹고 귓가에 떠오르는 오래된 노래를
나는 노래하며 어떤 여행을 떠올렸다네 여기에서 저기가 아니라 지금에서 어느 때로 아주 먼 옛날로 어쩌면 영원으로
볕 좋은 겨울 오후였네 장독대의 항아리들은 눈이 부셔도 말이 없고 배 안에서 사각사각 김치가 익어가는 날 언 땅을 덮은 눈물은 반짝이며 사라지네 어린 눈동자가 바라보았지 저 빠른 빛은 어디로 가는지
나는 기타를 치네 시간의 배 위에 누워 눈을 감고 영원을 보네 할머니 할아버지 아버지 모두 참하게 버리를 빗고 살도 없이 포동포동하시네 내 머릴를 쓰다듬어주시니 마음의 마당이 부풀어 올라 무한한 들판이 되네
나는 기타가 되네 기타가 된 나무가 되네 그 나무 밑에서 이파리를 질겅질겅 씹으며 소가 되어 앉아 있지 바람이 속눈썹을 스쳐 서늘한 꿈속에서 눈을 뜨네
푸르른 언덕이었네 해 뜰 시간 대청마루였네 한가한 벤치였네 마시고 행복하여 끝없이 노래하네
* "지난해의 눈은 어디 갔나?" 프랑스 중세의 도둑 시인 프랑수아 비용 Frac,ois Villon의 유명한 시구절.
성기완 시인 / 자목련 불루스
봄날 오후에 할 일도 없는데 자목련이 흐드러져요 그러고 보니 당신에게서 꽃 한 송이 받은 적 없네요 아 구체적으로 서러워 내 마음 확인도 안 하고 떠나셨죠 봄날 숨 막히는 오후에 퍼플의 물감을 헤프게 쓰는 자목련이 흐드러져요 꼭 당신이 준 것인 양 한 아름에 눈에 들어와 매우 정확히 현실적으로 서운해 구체적으로 서러워 눈물이 나버려
성기완 시인 / 캘리포니아 산 연기
박물관장의 따님이 캘리포니아 산 연기를 디저트로 내놓았죠 단 한 모금에 캘리포니아의 저녁 하늘 전체가 가슴속으로 빨려 들어와요 문을 살짝 열어놓고 잠든 일층 침대의 나와 이층 침대의 너 벽은 점점 얇아지고 저쪽의 소리가 들리네요 뼈의 모히칸 족 쾡한 두 눈 속으로 어둠의 시녀들의 발광 다이오우드들이 끊임없이 달아나요 벽 저쪽의 그들은 싸우면서 웃고 있었어요 다음날 아침이 이미 어제 속에 있어요 우리는 그렇게 똑같이 웃으며 안녕히 주무셨어요 하고 인사할 테니까 그러나 날은 다른 날이죠 확실히 너는 나를 사랑하기 시작했고 나는 문틈으로 빠져나와 어제의 너를 외면했으니까 24시 광적인 달 lite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나를 스쳐갔던 그 바람 영원한 DJing을 하라는 캘리포니아 산 연기의 말씀 하비비, 야 누르 엘 아인* 아음의 눈
우리는 맛보고 싶어진다구요
-계간 『세계의 문학』 2005년 겨울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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