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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남상진 시인 / 탁주 한 잔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16.
남상진 시인 / 탁주 한 잔

남상진 시인 / 탁주 한 잔

 

 

“죽은 후

천추만세까지 이름이 전해지는 것보다는

살아생전에

탁주 한잔만 못하다”

(死後千秋萬歲之名 不如生時濁酒一杯)는 말이 있다.

 

사후의 세계보다

살아생전이 더 소중하다는 뜻이다.

 

고려의 대문호

이규보(李奎報)가

아들과 조카에게 준 시(示子姪)를 보면 노인의 애틋한

소망이 그려져 있다.

 

죽은 후

자손들이

철 따라 무덤을 찾아와 절을 한들

죽은 자에게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세월이 흘러 백여 년이 지나

가묘(家廟, 祠堂)에서도 멀어지면

어느 후손이 찾아와

성묘하고

돌볼 것이냐고 반문했다.

 

찾아오는 후손 하나 없고

무덤이 황폐화되어

초목이 무성하니  

 

산 짐승들의 놀이터가 되어

곰이 와서 울고

무덤 뒤에는 외뿔소가 울부짖고

있을 것이 자명하다고 했다.

 

산에는

고금의 무덤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지만

넋이 있는지 없는지 누구도 알 수 없다고

탄식하여

사후세계를 연연하지 않았다.

 

이어서

자식들에게 바라는 소망을

다음과 같이 그렸다.

 

“조용히 앉아서 혼자 생각해 보니

(靜坐自思量)

살아생전

한 잔 술로 목을 축이는 것만

못하네

(不若生前一杯濡)

 

내가

아들과 조카들에게 말하노니

(我口爲向子姪噵)

이 늙은이가

너희를 괴롭힐 날 얼마나

되겠는가

(吾老何嘗溷汝久)

 

고기 안주 놓으려 말고

(不必繫鮮爲)

술상이나 부지런히 차려다 주렴

(但可勤置酒)”

 

조용히 생각해 보니

사후의 일보다

살아 있을 때의  삶이 더욱 소중함을 깨닫고

 

자손들에게

한잔 술로

목이나 축이게

부지런히 술상을 차려주는 것이

효도라고 했다.

 

자신은 이제

서산에 지는 태양과 같은 신세인지라

자손들을 괴롭힐 날이 얼마나 되겠느냐면서,

 

힘들게

고기 안주 장만하려 하지 말고

나물 안주와

탁주라도 좋으니  

 

날마다 술상을 차려 달라고

쓸쓸하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만년의 이규보가

간절하게 바란 것은  

 

쌀밥에

고기반찬의 진수성찬도 아니요

부귀공명도 아니며

불로장생도 아니다.

 

다만

자식들이

“살아생전에 목이나 축이게

술상이나 부지런히 차려다 주는것 뿐이었다.

 

이 얼마나

소박한 노인의 꿈인가?

비록

탁주일망정

떨어지지 않고

항시 마시고

싶다는

소망이

눈물겹다.

 

이 시가

우리의 가슴을 아리게 하는 것은

노인들의

한과 서러움이 진하게 묻어 있고

꾸밈없는 소망이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원(悲願)은

시인만의 것이 아니다.

 

이 땅에 사는

모든 노인들의

소망이기도 하다.

 

아!

요즘 세상에

어느 자식이 이 소망을 들어줄

것인가?

 

사후의 보다

생시의 효가  

 

진정한 효인가

나는야  나홀로  오직 사랑뿐인나 나는

사랑뿐인 나 사랑밖엔 없는 바보 화순 바보 남상진

 

 


 

 

남상진 시인 / 발

영산홍 밭, 긴 이랑

할머니 몇 분 웃자란 영산홍 가지 자른다

-이 눔을 땅에 꽂으면 발이 달리능겨-

얼마가 지나면

밋밋하던 그 끝에 거짓말처럼 발이 생기는 것이다

나무도 웬만큼 자라면 저렇듯 제 발로 서는데

여러 번 장사에 실패한 나는

뒷걸음질로 돌아온 고향에서

아직도 뿌리 내리는 중이다

낯선 땅에 뿌리내리는 일이 녹록하지는 않은 법

밤낮으로 잘라온 나무를 살피며 곰곰 해진다

물주고 거름 주니

뿌리가 아래로 내린다는 것을 알았다

아래를 살피는 일 없이

이파리 무성한 위만 올려다보며 발을 뻗었던 시간

이른 아침

꺾어 꽂은 이랑에는

영산홍 앳된 순이 파릇하고

물을 뿌리던 나도

근질근질한 발가락을

연신 만져보는 것이다

​​


남상진 시인 / 일몰과 일출사이

 

차창 밖으로 보이는

해 질 녘 무늬는 모세혈관이다

긴 통로를 따라 구분된 이쪽과 저쪽

각각의 경계가 선명하게 흐르는 시각

절름거리며 들어서는 어둠이

토막 난 불빛의 깃발을 걷는다

색깔 있는 것들은 모두 떠나고

흑백만 가득한 들판

밤새 책임 지지 못할 것들을 잉태하는 달빛

늘 명쾌한 결론은 유보되는 세상

그 달빛 뒤로 다시 동이 트면

나는 어깨 위에 내려앉은

달의 비늘 툴툴 털어버리고

투명한 경계 그 안에

절름거리는 내 발목 하나 밀어 넣을 수 있을까

​​

-2017 『시인시대』 봄호

 

 


 

 

남상진 시인 / 접(接)

 

똘망한 눈알 세 개 남기고 사정없이 잘랐다

키 큰 놈은 가늘다 싶고

굵기가 괜찮은 것도

싹이 노랗게 부풀어 오른 것이 물건이 될 것 같지 않았다

이리저리 찾아 헤매다

이거다 싶어 가려 뽑은 것이다

먼저 허리까지 늘어진 이파리를 솎아내고

햇볕 닿지 않아 하얗게 웃자란 가지를 잘라내자

단면이 촉촉이 젖어왔다

긴밀한 밀착을 위해서 과거 따윈 잊어야 하는 법

속살 제외한 온몸에 파라핀 보호막 입히고

아랫도리 살짝 벌려 속살 맞대 끼운다

어딘가에 이질감 느끼지 않고 스며드는 것은

자신을 온전히 버리는 일

낮은 자세로 수액의 통로에 입술을 대고

세상의 양분을 빨아들이는 거지

부드럽고 따스한 체온

깊은 뿌리까지 박힌다

꽁꽁 동여맨 몸뚱어리 하나 되어

웅숭깊은 눈매까지 닮는다

단 하나의 맹세만 기억하는 낙타처럼

세상 끝에서도 쓰러지지 않는 존재를 위해

스스로 묶이는 우리

알고 보면 뿌리가 다르다

 


 

 

남상진 시인 / 뿌리는 닫힌 문이다

 

 

스스로 잠근 문이다 너는,

빛도 들지 않는 깊이로 내려가는 남자

어둠의 두께로 구분되는 지상과 지하

끝장이라고 여겼던 골목이

깊고 푸른 강으로 눕는다

흐르지도 못하는 무늬는

겨드랑이에서 자랐다

건너지도 못할 강

발자국만 젖어 있다

남자가

잠긴다는 것을 물의 깊이로 읽었다

오해는 깊이 구덩이를 팠다

뿌리는 보이지 않았으나

굵고 깊게 진화했다

흔들리고

젖고

부러질수록

속으로 자라서 터지는 근육

깊이 뿌리내린 것들은 모두 젖는다

젖어야 스며드는 문장

어둡고 깊은 곳엔

단단한 뿌리가 산다

 

 


 

 

남상진 시인 / 출항

 

 

닻줄을 풀자

정박해 있던 어둠이

산등성이를 서서히 밀어낸다

차가운 냉기가 소의 혀처럼

까칠하게 손등을 핥으며 따라온다

어둠을 향해 나설 때

두려움은 지긋이 발에 밟히는 것이다

고개를 내미는 두려움을 밟고 핸들을 잡았다

어슴푸레 보이는 솔섬에서 시작된 바람이

뱃전을 슬금슬금 갉아 먹는다

하얀 이빨 사이로 듬성듬성한 어둠 물고

선두를 앞서던 파도가

자꾸 나를 타고 넘어

내 상처 꿰맨 그물코에 철퍼덕 매달린다

파도가 몸을 푼다

몸부림이 거세질수록

내가 흔들리고, 배가 흔들리고, 만선의 꿈도 위태롭게 흔들렸다

산고의 고통 이겨내는 파도는 잦아들 줄 모르고

밤의 외피 같은 파도를 맨발로 넘는데

어느새 아침이 온통 붉은 구름옷을 하늘 가득 내건다

 

 


 

 

남상진 시인 / 수직상승과 계단의 상관관계

 

 

주차장에 자동차 세우고 리모컨을 누른다

보이지 않는 직선이 나를 관통해

내가 머물던 영역을 체결한다

몇 걸음 걸어가자 어떻게 알았는지

엘리베이터가 1층까지 마중 나와 있다

타임머신 같은 그 안으로 빨려든다

상승 모드로 변환된 캡슐, 기계음을 내며 공간이동 시작한다

아내는 그런 상승이 싫다고 했다

빨리 올라서는 것들은 어지럼증을 유발해

정신을 못 차리게 한다고 했다

언제 헛발 내디딜 줄 모른다며

그 긴 계단을 걸어서 오르곤 했다

한 계단 한 계단 밟고 올라설 때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읽을 수 있는 거라며

욕심내지 않는 아내

산다는 것은

높이 올라갈수록 더해지는 무게를 책임지는 일

하나하나 밟고 오르는 계단이 단단하다

 

-시집 <현관문은 블랙홀이다> 중에서

 

 


 

남상진 시인

1967년 경북 상주 출생. 경남대학교 졸업. 2005년 <현대시문학> 신인상. 2014년 《애지》를 통해 등단. 2008년 시흥문학상, 2009년 민들레문학상을 수상. 시집 『현관문은 블랙홀이다』(세종나눔도서로 선정) 『철의 시대 이야기』. 현재 영남시 동인, 시산맥 회원, 민들레문학회, 경남문인협회. 마산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