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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손준호 시인 / 버킷 리스트 외 9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16.
손준호 시인 / 버킷 리스트

손준호 시인 / 버킷 리스트

 

​손깍지 베개로 풀밭에 누워 하늘 우러를 것

턱 괴고 앉아 먼산바라기 할 것

잠자리 편대의 비행을 따라 날갯짓해 볼 것

뻐꾹새 우는 방향으로 귓바퀴 굴릴 것

검은 고양이의 독백을 들어줄 것

말라 가는 지렁이의 혼을 주머니에 담을 것

회초리로 종아리 내리치고 길게 울 것

매에에에, 아기 염소처럼 어린양 부려 볼 것

아차, 등에 깔린 풀들의 심정을 헤아릴 것

벌떡 일어나 손등으로 살살 어루만져 줄 것

 


 

손준호 시인 / 구름생각

 

구름이

움직이지 않는다

움직이지 않는 구름은

없겠으나 있다고 생각하면

있는 것이나, 누구나

마음 한편 젖중동으로

흐르듯 멈추듯 뻐근하게

사람 하나 들앉아 있는 것이다

누구는 그것을 추억, 이라 하고

누구는 그것을 가시,라고 부른다


 

 

손준호 시인 / 우울한 아이스크림

​ 먹이 찾아 수백 km를 남하해 아스팔트에 출몰한 북극곰을, 사람들은 차에서 내려 구경했다. 빙하로만 둘러싸인 3200m 그린란드 정상에선 눈, 대신 비가, 내렸다. 줄줄 녹는, 처름 맛본 지구였다.


 

 

손준호 시인 / 생명 보험

​죽은 줄 알았던 길고양이 살아 돌아오고

죽은 줄 알았던 길고양이 살아 돌아왔다

위험한 생명은 대개 보험이 안되는데

이 보험 저 보험 쏟아부은 엄마는

요양병원 가서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손준호 시인 / 능소화

 

청 저고리 주홍 치마 죄다 벗은

미친년이라 비웃어도 좋아

이빨로 물어뜯고 힘줄로 옥죄어

돌담의 숨통을 끊어놓을 테니

내가 얼마나 독한 년인지 겨울은 알고 있어

 

 


 

 

손준호 시인 / 서핑

 

 

 낙산사 홍련암에 석양이 부서지고 있었다 큰 불길에 절 활활 날아가는 것을 목도했던, 등허리 시커멓게 화상 입어도 입 다물었던 바위, 저녁이 까만 서핑족을 뱉어내고 있었다 의기양양, 파도가, 해변에 발자국을 토해내고 있었다

 

 목어가 슬픔의 알방구리 같은 풍경을 맵차게 때렸다 황금빛 파문이 일자 흩어지는 늦자두 내음, 저녁의 두레박이 허공의 우물에 몇 차례 출렁거리자 집어등 앞세운 오징어잡이 배가 속도를 붙이고 있었다

 

 트렁크에서 트렁크를 빼내 펜션에 짐을 부렸다 열사흘 달빛이 주르르 바다의 지퍼를 열고 있었다 여행은 나를 비우는 망명, 나를 버리러 갔다가 말쑥이 빨아서 개켜 돌아오는 노래, 빈 아파트는 발라드처럼 느리게 표류할 것이었다

 

 갯배 타고 아바이마을 돌고 온 뒤에도 서핑족은 물러서지 않았다 의기양양, 하얗게 밤을 불태우고 있었다 엇송아지같이, 물덤벙술덤벙 힙한 클럽 음악에 젖고 있었다 고공 서핑을 즐기는 바비큐 연기와 고성, 디스크자키가 비트에 속력을 가하고 있었다

 

 비틀비틀 서핑족 스텝이 짝을 구하고 있었다 시퍼런 입술로 술을 건네주고 있었다 불면을 앓는 수면, “마을을 폭파하고 싶어!” 최동숙(86) 할머니* 계단에 앉아 울먹이고 있었다 돌아가신 엄마가 제사 때 못 찾아올까 봐, 흥청대는 어촌 마을에 산 귀신으로 눌러앉아 있었다 의기소침 새벽이 망연자실하고 있었다

 

 터널이 길어서 터질 것 같은 졸음의 목을 눌러 노독의 녹물을 오래 빼고 있었다, 오징어잡이 배가 채낚기로 햇귀를 끌어올리자 여름 바퀴가 아침을 공짜로 분양받은 양, 경로를 이탈해 통일전망대로 굴러가고 있었다 까만 길냥이가 북쪽 말로, 헛돌이 말고, 눈 좀 붙이고 가라고 냥냥냥냥 귀뜸해 주었다 건듯, 난기류가 철조망을 넘어가고 있었다

-일간 『한국일보』 2023년 8월 29일 게재

 

 


 

 

손준호 시인 / 안부

 

 

여기 책상머리 앉아 있어도

네 눈물짓는 소리 아프게 들린다

 

그렇게 메시지 보내고 나니

나도 늙나 보다, 어느새 희끗한 귀밑머리

 

사람이 고픈 저녁이다

저무는 해가 애달파

어디 부뚜막에라도 붙들어 매고 싶은 세밑

 

여기 멀리 물병자리 앉았어도

네 들썩이는 어깨 보인다

 

별이 차가워서 나는 슬프다

또, 보자

 

 


 

 

손준호 시인 / 거위가 낮달에게 발로 쓴 편지

 

 

5랜만 나 5늘 속상

자꾸 밀어 넣고 쑤셔 넣으면

견딜 수 있겠어? 플라스틱 b닐 플라스틱

빵 터질 텐데, 찢어질 텐데, 꺼우꺼우

 

정말 p가 말라 바짝바짝

물 마른 라인강에 배고픈 돌* 나타났대

글쎄, 쓸모없는 날개 찢어버리고

탈출하고 싶어 너의 행성으로, 뛰뚱뛰뚱

 

인간을 위해 난 모든 걸 바쳤어

 

푸아그라 접시에 살찐 간을 내줬어

9스다운 점퍼에 하얀 털을 뽑아줬어

자갈을 삼키면서 황금r 꿈꿨g, 젠장

 

내 몸의 북극 녹아내리고 옆구리 갈라 터지고

항문은 물 폭탄, 탱크는 서지 않고 서로 총질

g9력 탕진한 나의 5대양 6대주, 도망쳐

도망쳐 환청 속에 엉망과 진창을 자전하면서

 

누군가 내 삶으로 나를 때리고 있는 것 같다**

 

어디 안 좋아?

얼굴2 창백하네, 야간조 아니었어?

폐사한 광어 눈알을 붉은 사막에 뿌리는 악몽

불안e 공장 컨베e어처럼 돌고 돌아5고 있어

 

조심해! 탐사를 가장한 정복, 파괴, 돈 되는 인간의 습성

중력을 따돌리고 산소 용기에 탐욕을 공급하겠g

우주복 입고서 달나라 섹스는 가능한 거니?

 

여튼, 그 많던 꿀벌은 어d로 사라졌을까

아프g 말자, 그게 인간에게 복수하는 거거든

 

*헝거 스톤 : 유럽에서 심각한 가뭄 지표로 삼아왔던 돌.

**페르난도 페소아.

 

 


 

 

손준호 시인 / 편지

 

 

틀니 빠져 합죽한 할매

메주 쑤어 시렁에 묶으시다가

 

돌아가신 할배한테서

자꾸 편지가 온다고

 

우편함을 뒤적여 보여주는데

전기요금 고지서 보훈처 소식지

 

이제 그만 보내라고

가마솥 아궁이 불쏘시개로 쓰셨다

 

 


 

 

손준호 시인 / 욕쟁이 할매

 

 

기분이 저기압으로 꿀꿀할 땐

 고기 앞으로 가야 하는데

 

 돌아보지 마, 미친 새끼, 돌아보지 말라니깐

 지랄 염병하고 저러니까 욕 먹제, 개새끼!

 그냥 쌈빡하게 갈 길 가야지, 남자 새끼가

 

 티브이 연속극을 힐끗힐끗 보면서

 행주로 식탁을 닦으면서

 

-시집 《어쩌자고 자꾸자꾸》 2022, 시산맥

 

 


 

손준호 시인

1971년 경북 영천 출생. 계명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2021년 계간 《시산맥》 신인 시문학상 수상. 시집 『어쩌자고 나는 자꾸자꾸』 『당신의 눈물도 강수량이 되겠습니까』. 2022년 대구문화재단 문학작품집 발간지원 수혜. 현재 대구문인협회 회원, 〈다락헌〉 동인으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