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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철 시인 / 깨달음의 삶 지난 젊은 시절을 저울질 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의 삶을 편안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깨달음의 삶이다 잘못 뒤바뀐 생각을 접고 높음, 더 좋음, 더 귀함을 바라지 않고 지금 주어진 삶 다가오는 삶이 무엇이든 그대로 순응하며 하루를 열고 하루를 닫고 그렇게 하루하루 평안하게 오늘도 아침을 열고 저녁을 닫는다.
강병철 시인 / 나비의 꿈
나비를 꿈꾸는 자의 눈물에서는 아린 냄새가 난다
애벌레로 살다 눈부신 날갯짓으로 활공하는 시간은 짧다 기어가는 생은 길지만 날아가는 생은 찰나刹那다
순간瞬間을 나는 나비의 꿈은 화려한 슬픔이다
석양이 붉은 휘장을 내리는 것은 흩어진 날개를 모으고 활공하는 찰나의 삶을 위해서다
강병철 시인 / 주상절리 벼랑에 서다 -서귀포 중문 주상절리
수축의 중심점에 응고된 육각기둥 침묵의 모서리가 날 선 검처럼 차갑다
서귀포 중문 지삿개 바닷가에서 고래들 자유로이 노니는 멀고 먼 푸른 수평선까지 달려 나갈 수 없는 수직의 기다림은 파도에 할퀴어 우는 벼랑의 검게 굳은 가슴
하루를 살아가는 일이 절벽으로 느껴지는 날 파도 소리에 울음 묽혀 홀로 마냥 울고 싶어 나만의 그 바닷가를 찾아 파도가 되고 싶을 때 주상절리 그 바닷가 벼랑에 선다
앞 단추를 후드득 열어젖히고 아찔한 암벽에 서서 바다를 마시면 거품으로 흩어지는 버리지 못한 꿈들 파도를 따라와 암벽 모서리에 부서진다
수평선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손길 움츠린 어깨를 포근히 감싸준다
*제19회 푸른시학상 수상작
강병철 시인 / 파도
부서지고 싶다 그대 향해 달려가 부서지고 싶다
온몸에 푸른 멍이 들고 산산이 부서져 공중에 흩어지도록 그대에게 달려가 부딪치고 싶다
비워야만 채워진다는데 다 비우고 다가가면 그대 들어올 수 있을 텐데
오늘도 다 비우지 못한 채 그대에게 달려간다
그대 다가올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하얗게 부서져 돌아와서 다시 그대 향해 멍석을 펼친다.
강병철 시인 / 술잔에 어리는 눈물
지나간 날을 억지로 기억하려는 사람 목소리에서 슬픈 냄새가 난다
정년퇴직하던 날 '왕년에는 잘 나갔다'고 술잔을 앞에 두고 푸념하는 친구
술잔을 쳐다보는 슬픈 눈, 기억은 후퇴를 거듭하다가 돌아온다
슬픔은 물 냄새를 따라 뒷걸음친다.
강병철 시인 / 피지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성장했는지 알고 싶다면 피지로 가라
내 것과 네 것이 구분이 안 되는 우리의 것에 익숙한 이들 사람들은 대지를, 나무와 숲과 바람을, 공유하며 살고 있다
이처럼, 한때는 세상 모든 사람이 내 것이 없었던 때가 있었다
내 것이 없으면 불안한 이들과 내 것이 없어도 편안한 이들이 이 세상에서 함께 숨 쉬고 있다
피지에서는 걱정하는 사람을 찾기가 어렵더니 인천공항에서는 걱정이 없는 사람 찾기가 어렵다
지금도, 피지 미국대사관 앞에는 주인 없는 망고가 간간이 툭툭 떨어지고 있을 것이다
강병철 시인 / 꽃이 눈물이다
눈 내리지 않던 겨울 새순 뻗던 희망이 죄다 눈물임을 안다 마른 땅에 내린 뿌리털들 돌조각 모질게 삼켜 대면서 탱탱이 부푼 저 나뭇가지들, 봄바람에 자르르 터질 것 같더니
너를 찾는 저 벌판은 온통 아지랑이다 벌판 뒤켠으로 얼핏 비친 그림자 이마를 ‘딱’ 때린다 ‘저놈 새꺄’ 손짓하는 언덕길 치달려 ‘옳다구나 드디어 나타났구나’ 팔 벌리니 산수유 개나리 그 너머로 진달래 그 모든 봄꽃들 노랗고 빨간 눈물로 치렁치렁 매달려 있다
꽃샘 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싱크대 틈새기로 빠져 버린 참기름 병뚜껑 그 사소함에 온 세상 우지끈 뒤집어지는 것이 문제다 동굴 속에 안주하던 온갖 잡동사니들 ‘틈입자 빗자루’와 맞붙으며 아우성이다 먼저 썩은 행주 조각이 모서리에 발목 묶은 채 안 된다 안 된다 살려 달라며 이를 옹문다 이번에는 식칼로 바닥 긁기다 사이다병 뚜껑이 뽀얀 먼지 뒤집어 쓴 채 ‘아아 형광등은 너무 눈이 시려요’ 옷고름 부여잡고 얼굴 붉힌다 마지막으로 효자손 갈퀴질이다. 찌그러진 볼따구 지줏대 삼아 치켜올린 둔부가 끙끙 수치심에 떤다 모가지 힘줄 때마다 우두둑 구기며 이를 갈지만 녹슨 젓가락 하나 토해 냈을 뿐 딸깍딸깍 밀려만 가는 병뚜껑
동트는 새벽 출근길 밥고리 찾아 허발나게 달리자 삼월 아침 하늘 뚜껑이 열려 대설주의보가 내렸던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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