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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재춘 시인 / 마당을 건너가는 새
문을 열자 숨었던 고요가 빠져나간다 고요의 틈
고양이가 담장 안에서 털을 고르고 있다 시들어 매달린 나팔꽃씨와 마른 포인세티아 줄기가 말을 뚝 그친다 주워놓은 솔방울에서 날개 달린 씨앗들이 쏟아졌다 싹을 틔운 뾰족한 잎들이 햇빛의 틈을 촘촘희 깁고 있다 틈새를 헤치고 뻗어간다 내가 꾸던 꿈들이 허공으로 날아간다 틈 사이로 보이는 똑같은 키의 아파트들 어깨를 나란히 지나간다 어디에선가 돌멩이 떨어지는 소리 담장 꼭대기 잠에서 깨어난 고양이 훌쩍 날아가는 새
-『문학과창작』 2020-여름호
임재춘 시인 / 반딧불이 집
고목나무 샘을 돌아온 바람이 빨래집게 하나 덜렁거리는 빈집 마당을 들여다본다 작은 산새 발자국이 혼자 놀고 눈물이 빛바랜 벽에 얼룩으로 남아있는 집
아직 자리 잡지 못한 방황의 그림자가 문득 고향 쪽을 향해 멈춘다 뜰 안 능소화 한 줄기 붉은 노을 뚝뚝 떨구며 늘어진다. 잠시 머물던 초승달, 희미한 꼬리를 감추면 반딧불이 환하게 불을 밝힌다.
임재춘 시인 / 너무 깨끗한 것은 안 보인다
못 보는 것은 부끄럽다 난 유리를 못 보았다 통유리였는데 테두리만 찾아 열고 안으로 들어가려했다 오랜만에 반갑다고 얼른 카페로 들어가려는 버릇이 내 입술을 부딪치게 했다 투명한 유리에 입술무늬가 찍히니 비로소 보였다 너무 깨끗한 것은 안 보일 수도 있다는 걸 몰랐다 쑥스러움을 던져버리고 안 보이는 것들을 사랑할까 태연하게 안부며 얘기를 풀어놓는 입술이 아프게 부풀어 올랐다 쓸쓸한 기분이 내딛는 발길 가로등이 환하게 웃었다
-《열린시학》 2019. 겨울호
임재춘 시인 / 아버지별
지상의 불이 다 꺼지면 별들이 불을 켠다 오래 전 깜깜한 밤에 별을 보며 남쪽으로 걸어온 아버지 뒤따라가는 우리에게 길을 알려주느라 깜빡깜빡 신호를 보내고 있다 비 오는 밤에는 우리들 안부가 궁금하신지 빗줄기에 숨어 내려와 창문의 불빛에 들키고 만다
—2016 봄호 『문학청춘』
임재춘 시인 / 답을 기다리는 사람
빗소리를 끌고 오는 당신 정중한 답은 위로다 다시 빗속에 열심히 이력서를 쓰는 것은 떨어졌다는 답을 꼭 해주는 그 세상 때문이다 새 이파리를 소개서에 붙이고 사진은 꽃봉오리를 매달아 다시 꾸민다 들여다보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계곡은 깊어진다 서성거리는 발자국에 구름이 덮인다 세상의 어두운 소리는 귓바퀴 안에 다 모인다 젊은 기억은 곁을 떠나지 않고 메아리로 돌아오는 답신을 기다리는 사람 골똘함에 빠진 이력들이 유연함을 놓친다 떨어졌다는 소식을 기다리는 답은 먼 섬 기다림이 오래됐으므로 그는 멈출 수 없다 기다리는 답은 삶의 끝까지 흘러간다
-『문학청춘』 2019-겨울호
임재춘 시인 / 어제에게
오후에 널어둔 빨래를 걷는다 팔을 벌려 깨끗함을 부여안는다 따뜻한 햇살의 냄새 땀이 가득했던 옷들은 너의 종일이었다,
어깨에 힘을 뺀 옷들이 환하게 부드럽게 나를 끌어안는다, 매일 너의 땀을 깨끗이 씻는 일이 사는 일이다
임재춘 시인 / 아름다운 변신變身을 위하여
자리마다 제 모습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사물들, 행위들, 순간적으로 다가가기도 하고 천천히 지켜보기도 했다. 시월 어느 날 친구가 새로 집을 지었다는 양평으로 가는 길들은, 붉고 노랗고 다양한 빛깔로 제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고 감추기도 하면서 들판에 퍼질러 눕기도 하고 산자락을 보듬어 우뚝 서 있기도 했다. 나는 가슴 속에 일어나는 아름다운 계절이 주는 감동의 파동을 감싸 안으며 추억과 환상에 빠져들고 있었다.
지난여름 난 오랜만에 시집을 엮었다. 시를 써온 지 꽤 오래되었다. 등단한 지 일이 년 만에 곧바로 시집을 내는 사람을 보면 부러웠고, 나의 게으름을 돌아보기도 했다. 그래도 얼른 서둘러지지 않았다. 미리 준비되지 못 했던 점도 있는 터였다. 더 좋은 시를 써야 돼, 감동을 주는 시집을 내야지 하는 그, 주제 넘는 욕심 때문에 미루고 미뤄왔던 터였다. 좋은 소재를 찾기 위해 발길 닿는 데로 돌아다녀 보기도 하고 혼자 동굴 속에 들어가 웅크리기도 했다. 그렇게 시들은 발길 닿은 곳에서 나를 바라보았고 많은 대화를 나누려했다.
안개가 그 마을을 지우고 있습니다 꽃잔디도 납작하게 엎드려 있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밖에는 나오지 않고 아직 놓아둔 난로에 잠시 불을 지피거나 무명천으로 덮은 탁자에 김이 오르는 찻잔을 놓아둡니다 슬그머니 의자에 깊게 앉아 옷깃을 잠시 여밀 뿐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습니다 마음속 깊이 고요가 자리잡습니다 안개가 소리 없이 사라지고 가까운 냇물소리가 징검다리 건너오는 걸 듣습니다 산들이 다가와 벚꽃 뿌연 바람을 날립니다 꿈에서 깨어난 개똥지빠귀는 여기저기 마을을 날아다닙니다 나는 다시 산으로 올라 부모님 묘비명 뒤에 사라진 이름 자리를 찾아봅니다 사라진 시간이 언제인지 쉽게 보이지 않습니다
-첫 시집 『오래된 소금밭』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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