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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홍 시인 / 코르크 왕국
차창 밖으로 코르크나무가 줄지어 서 있다 빨간 하초가 드러날 때까지 사람들이 껍질을 벗긴다 놀란 눈의 나무들 유리창 너머 나를 보고 있다
리스본의 골목길에 파두 가락이 뒹군다 길을 묻는 내게 소년이 이스쿠두를 보여 준다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이 한때 세계를 주름잡던 포르투갈의 후손들이라니 지금은 코르크 마개를 만들며 생을 보내고 있다니
붉게 짓이겨진 상처도 언젠간 다시 아문다 새살이 돋고 딱지도 떨어져 나가겠지만 기억이 아물 때쯤 사람들이 다시 낫을 들고 올 것이다
이베리아반도에 해가 지고 닻을 내린 선원들이 왁자지껄 골목으로 들어선다
낯선 거리에 서서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 망설인다 작은 창이 있는 카페에서/ 이국적인 여인을 만날 상상을 한다
뒷골목의 게스트하우스에 들어선다 내일은 비가 그칠 것 같다
정연홍 시인 / 밥무덤
다랭이 마을에 밥무덤이 있다
손바닥만한 논뙈기, 식구들 배불리 먹게 해달라고 해마다 밥무덤에 하얀 쌀밥을 묻는다 무덤이 넙죽 밥을 받아 먹는다
나도 나에게 매일 밥을 올린다 솥무덤에서 지은 밥 숟가락무덤으로 퍼서 나에게 먹인다 내가 무덤이다 무덤이 밥을 먹고 자란다
구멍 속으로 들어간 양식들 다시 세상에 뿌려진다 날 닮은 인간, 얄팍한 지식 내가 싼 똥 다 무덤에서 나왔다
오늘도 집무덤으로 퇴근한다
정연홍 시인 / 쟁기질은 멈추지 않는다
아버지가 넘어지셨다 경지정리가 끝나지 않은 돌밭 숨겨진 돌부리의 이빨에 허리 잘린 보습날 검붉은 녹물이 수두두 떨어진다 머리를 처박고 쓰러져 버린 경운기
아버지의 어깨에 봄바람이 머물러 있다 돌기를 멈추어 버린 심장 플라이휠이 마지막 회전을 꿈꾼 흔적이 논바닥에 각인되어 있다 아버지는 죽어가는 기계소를 일으키려 애쓰시지만 숨을 놓아 버린 문명의 가축은 깨어날 줄 모른다 손짓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착한 소를 닮아 있다
정연홍 시인 / 색(色)연필
시인은 하늘의 얼굴을 그리는 형형색색의 연필
물안개 피는 호숫가에선 은빛 이슬 머금고
싱그러운 숲속에선 초록빛 편지를 쓰고
노을 흥건한 나루터에선 연짓빛 음성을 싣고
그리움 묶인 휴전선에선 청동빛 울음 담는다
세월의 백지 위에서
정연홍 시인 / 염소와 함께 잔 적이 있다
작은 방 한편에 합판을 덧대고 볏짚을 깔았다. 어미 염소와 아기염소를 옮겼다. 마른 풀을 먹이면 한약 같은 까만 똥을 누었다. 합판 너머로 아기염소의 젖 먹는 소리가 생생히 들렸다. 음 메 에 자기 전 늘 어미를 불렀다. 똥 냄새는 견딜 만 했으나, 지린내가 방 안에 진동했다. 종종 오줌이 합판 벽을 적시며 내게로 넘어왔다. 나는 전생에 염소였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기 염소의 눈은 사람의 눈과 닮았다. 자세히 보면 사람 얼굴이다. 섬사람들은 염소를 잡으러 포수를 동원했다. 섬에는 한동안 총소리가 요란했다. 그 겨울 우리 식구와 염소는 한 가족이 되었다. 밤에는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대나무 부러지는 소리가 쩌엉 울렸다. 아기염소는 겨우내 새록새록 잠만 잤다.
정연홍 시인 / 이소離巢
최초의 비행은 바람을 만지면서 시작된다 낮은 곳엔 바람이 오지 않으므로 새들이 바위로 오른다 날개를 활짝 펴고 흔들어야 비로소 바람이 온다
생의 첫 바람을 만져 보는 근육 안쪽 팽팽한 긴장으로 살이 떨린다 아직은 바람이 연약하다 날개를 퍼득이면 비로소 바람의 근육이 선다
한 무리의 바람이 몸을 밀어 올려 주는 순간 날개는 바람을 품고 하늘과 평행이 된다 바람을 밟고 하늘에 오르면 허공은 모두 내 것이 된다
내가 원하는 곳 어디든 날개를 펼 수 있다 바람의 뼈를 놓치면 바닥으로 곤두박질친다 새는 바람의 주인이다
바람은 새를 모시려고 우우 운다
정연홍 시인 / 철탑에 집을 지은 새
철탑 위 집은 위태롭다 까치 두 마리 비닐 천막으로 집을 지었다 철기둥 위로 일만 오천 볼트 특고압이 윙윙거리고 땅에서는 날아오를 수 없어 철탑에 집을 지었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다 같은 새인데 하늘 한번 날지 못하는 새보다 못한 사람인데
하늘에는 신이 있고, 땅에는 신을 만드는 사람이 있다 법은 만인 앞에 있을 뿐이다 바람이 불면 집은 흔들린다 땅에서 모든 것은 흔들린다 붉은 머리띠를 매고 주먹을 불끈 쥐면 세상이 흔들리고, 빌딩이 흔들리고
누가 새 아닌 새라고 말할 수 있나 사람 아닌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나 높은 데서 내려다보면 세상은 그 자리인데 세상의 상처도 그대로인데 빌딩 밑 음지를 옮겨 집을 짓고 스스로 새가 된 사람들
하늘을 날아 올라 새가 되어야만 새가 있다는 것을 안다 부지런히 집을 짓는 새들 희망이 부활할 때까지 알을 품는 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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