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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영선 시인 / 할머니와 비둘기
할머니 호미로 산 밭을 콕콕 콩 두 알씩 심는걸 비둘기는 알지 비가 와 물 맞아도 싹이 안 난 걸 보고 비둘기 먹은걸 할머니는 다 알지 꼬부라진 허리로 쉬엄쉬엄 올라가 콕콕 다시 심는걸 비둘기는 다 알지 그래도 좋단다. 할머니는 말할 사람 없는데 산 밭에만 가면 만날 수 있다고.
안영선 시인 / 갯벌
달은 수음 중이다
달빛 속에서 바다가 출렁거린다 달이 바다의 물기를 빨아들이자 축축하게 감춰둔 갯벌이 열린다 여자 몇 질퍽한 갯벌 위로 다리 하나를 내놓고 휘젓는다 투명한 무게에 눌려 잠잠하던 생이 꿈틀거린다 널배 위 출산의 기억을 잃은 덩치 큰 자궁이 하나씩 놓여 있다 여자의 낡은 자궁이 지나간 자리마다 질퍽한 새 항로가 새겨졌다 자궁을 깨끗이 비워낸 여자의 손 몇이 꿈틀거리는 생식기처럼 갯벌을 더듬는다 한 여자의 섬세한 촉수에 출렁이는 갯벌이 황홀경에 젖는다 갯벌은 생의 비애를 맛보는 것과 깊이 숨어드는 것들로 분주하다 젊은 날 여자는 몸에서 어린 영혼을 분리해 낸 적이 있었다 하나를 덜어내면 다른 하나가 생길 거라는 기대는 무너졌다 여자의 갯벌은 더 이상 축축하지 않았다 여자는 바닷속 갯벌의 빈 자궁을 상상한다 무심코 지나온 길은 다시 돌아가야 할 미궁의 길 회귀의 항로가 혼미하다
수분을 토해 낸 달은 바다에 빠져 갯벌과 한창 교미 중이다
안영선 시인 / 동해를 지나며
삼봉호는 지금 독도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어디쯤 왔을까?수첩의 지도를 펼치니 바다 위에 이리저리 그어진 줄들 독도를 반듯한 사각형에 가둬 놓았다 마음 편하고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랑 하며 살라는 뜻일 것이다
이웃이라면서도 쉼 없이 걸어오는 퉁바리 광적 억지에 머리를 후려치고 싶었을 거야 평생 살피던 그곳을 아직도 잊지 못했을 거야 땅속에 자리 잡아 한 줌의 흙이 되어서도 두 손에는 움켜잡고 있을 독도를 대동여지도의 고산자를 생각해 본다
대한민국 동해 끝자락에 혼자 있는 섬 돌섬,독섬,독도로 이름이 바뀌어 왔는데 오늘도 출렁이는 파도 위에다 내 땅이라고 그어대는 빨간 줄들 누구의 말 하나 들으려하지 않고 남의 말에는 귀를 틀어막는 일 고산자 생각이나 했을까?
하기야 말할 것도 없긴 없어 총리훈령으로‘독도는 조선 땅’임을 선언했는데 뭐 또 우리나라 사람 김성도 내외가 살고 있잖아 우리나라 태극기가 펄럭이고 우리나라 해군이 바다를 지키고 있는데 뭐 독도에 도착하면 전화 한번 해 봐야지 우리 집에 손전화가 되나 봐야지 일본에도 전화 해 봐야지요. 우리나라 어디나 전화가 잘 되었어요 일본에는 국제 전화를 해야 됐고요
나 오늘 독도에 내 발자국을 찍고 본적을 독도리1-96으로 옮기고 ‘독도명예주민증’도 신청해서 받고 ‘독도야 우리가 지켜줄게 예금’도 할게요. 앞으로는 누가 물어도 당당하게 말할게요. 독도는 우리 땅 이라고 그리고 독도를 잡도리 할게요 김정호님 우리가 있습니다. 이제 걱정 마시고 편히 쉬십시오.
안영선 시인 / 빨래를 널다
황사 주의보를 안고 거실로 들어선다 문득 눈 끝이 머문 식탁 춘곤의 기지개로 손짓하는 아내의 필체 숨겨진 보물을 찾는 아이처럼 세탁기를 향한다 주인도 없는 사이 거친 숨을 몰아쉰 흔적이 하수구 거품으로 남았다 세탁기 속에는 아내와 딸 아들이 서로 부둥켜안고 있다 그사이 내 팔 하나는 아내의 바지 속에 다리 하나는 아들의 태권도복과 딸아이의 블라우스 사이에 끼어있다 배시시 웃음이 묻어난다 서로가 묶고 있는 일상의 연결고리 그 관을 따라 끈적한 정이 흐를 것이다 하나가 둘이 되고 또다시 넷이 되는 소박한 섭리 두 팔로 가족들을 안고 거실로 나온다 튼실한 줄기에 앙상한 가지로 뻗은 고목 그 나무에 자꾸 잎이 돋아난다 가지에 잎으로 걸터앉은 아내와 딸아이 금강권으로 한껏 폼을 잡은 태권 소년 그 좁은 틈을 비집고 내 무좀의 흔적도 자리를 잡는다
오늘도 익숙하게 가족의 일상을 넌다
-시집 <춘몽은 더 독한 계절이다> 중에서
안영선 시인 / 新몽유도원도 6 -수생記
한 때는 지상에 뿌리를 둔 수호守護의 생이었다
저 물결 안쪽 숨바꼭질하던 유년의 골목이 숨어 있다 수면 위 버드나무 가지는 묵묵히 주영이네 막걸리 가게 좌표를 지키고 있다 가게 옆 평상이 소란스럽던 시절 보상비를 받은 이들은 하나 둘 평상을 떠났다 지상에 뿌리를 내려 지상을 버리지 못하는 것들, 미처 떠나지 못한 것들은 수생의 삶을 살고 있다 맑은 봄 햇살이 지상의 생을 놓친 것들과 밀회密會중이다 버들잎은 수십 년째 수면에 연서戀書를 적고 있다 오늘도 밀회의 씨앗에 솜털을 달지만 바람은 수면을 벗어나지 못한다 물결에 채인 씨앗은 또 습지의 어디쯤에 자리를 잡을 것이다
이 봄 연서가 도화桃花향기 가득한 지상에 착신되면 정말 좋겠다
안영선 시인 / 흥부야
마음은 좋아가지고 양식도 없는 놈이 장가는 왜 갔니 아이는 왜 그렇게 많이 낳았니
마음은 좋아가지고 형이 자기 같은 줄 알고 아버지 재산인데 형한테 따져 라도 봐야지
마음은 좋아가지고 제비가 도와줘 부자가 됐으니 천만 다행이지
제비 없었어 봐 평생 거지 생활이지 종자돈도 없는데 일어 날 수 있는 줄 아니.
안영선 시인 / 新몽유도원도4 -인턴탈출記
나는 지난 몇 년을 정말 열심히 살았어
그 사이 내 이름이 사라졌지 그 사이 꿈도 사라졌어 그 사이 인턴이라는 모호한 이름과 정규직이라는 아득한 꿈이 생겼지 내 아득한 꿈은 그들이 움켜쥔 예리한 창끝이야 창끝에 나는 언제나 안절부절못하거든 뾰족한 끝은 때때로 나를 유린하기도 하고 그들이 잠시 비워 놓은 텅 빈 어둠을 밤새 지키게도 하지 몰랐어 정말 몰랐어 애완견은 충견일 뿐이라는 것을,그들은 늘 나를 안아주고 늘 나를 감싸주지만 내 표피에 닿는 그들의 체온은 언제나 시리도록 싸늘했지 아마도 나와는 세포 구조가 다른 종족인가 봐 그들에게 나는 아직도 미생未生이었지 오늘도 졸음에 겨워 눈을 비비다 텅 빈 사무실 책상에 엎어져 모호한 이름으로 잠이 들었어
내일 아침, 그들이 도화 향기 그윽한 내 진짜 이름을 불러줬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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