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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노혜봉 시인 / 나박김치를 보며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17.
노혜봉 시인 / 나박김치를 보며

노혜봉 시인 / 나박김치를 보며

 

 

고운 고춧가루를 줄뿌림으로

뿌려, 버무려놓은

살구빛 여린 하늘

그 아래 점점이 떠 있는

하얀 생무

배추 줄기 몇 조각

슴슴도

설익음도

새초름 미나리 찡하게 우려내머

 

구름 그 아래

돌 몇 개, 얼음 몇 개.

납작하게 가라앉히고

몸 씻으며 몸 부비는

천 조각 만 조각 마음가짐

무심한 구름 다 잡아 안고서

사람의 갈 길 열고 있는

여울 물줄기

 


 

노혜봉 시인 / 금싸라기

 

 

쌀독이 비었다. 바닥이 났다.

바닥이 드러났다.

숨겨둔 잘 익은, 감 몇 개 남기지 않았다.

뻔뻔스러움. 그 이마빡 감싸줄

쌀겨 한 홉 아예 없었다.

 

굵게 금이 죽 내리지른 큰 독에선

소리의 울림이 텁텁하다.

사금파리 귀신에게 혼을 팔아도 좋다.

 

시멘트 깨어진 사이 포릇포릇 어렵사리

이쁜 삭주머니 내민 이끼들

비집고 당당히 벋어오르는

풀 포기 몇. "뉘"라고 골라 버렸던

서러워서 억울해서 제 명줄 던질 수 없었던

 

온전히 질긴 실뿌리 따라 허공 중에

한 발을 번쩍 든, 두 팔로 맨땅을 누르는

살판 바로 외줄타기. 눈 감고

절정의 몸짓까지 치달리는 숨

 

바닥이 보일 찰라 전신을 솟구쳐

떨어지는 火印, 깜부기 몇 툴

 

 


 

 

노혜봉 시인 / 불화덕 속 오로라와 무지개

-박제천 시인께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불꽃을 빚어 별하늘에 무지개로 걸쳐 놓으려던 아홉 살 소년 막내둥이를 아시는지요.

 

 불화덕에 불물로 들끓는 쇳물을 거푸집에 부어 식힐 때마다, 새롭게 태어나는 무지개칼이며 오로라의 열쇠를 아시는지요.

 

 빛보다 어둠보다 멀리 영혼의 날개에 닿기 위해서 전신 포복, 오체투지로 한 뼘 한 뼘 배밀이를 하면서, 혼자만의 시를 쓰던 소년을 보셨는지요,

 

 외로울 때면 소나무엔 새깃모자를, 매화꽃엔 눈모자를, 백록담엔 물모자를 씌우던 시인, 쓸쓸할 때면 무지개칼로 무뎌진 신경을 벼리고 벼리던 시인을 아시는지요.

 

 아득한 별자리 구멍마다 꿈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가 풋콩을 까는 별종소리, 은풀대들의 꽃송이에 스며드는 이슬, 호접몽 나비들의 첫입맞춤을, 포도주 빛 눈물에 섞어 마시며 하루하루 세상 끝에서 머뭇거리는 이들에게 영혼의 씨앗을 전해 주는 시인을 만나 보셨나요.

 

 밤마다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는 하늘,저 도리천에, 지금 번뜩이는 오로라!보세요.장엄한 찰나, 빛의 폭포에서 싹을 내미는 무지개별들이며 시를 보세요.

 

 신새벽, 둥지마다 별밤지기 애기능금시인들도 한 바구니씩 꼭두서니빛 별꼬투리를 저마다 품는답니다.

 

 


 

 

노혜봉 시인 / 색채 예보

 

 

지금은 안개 색, 안개 색과 놀아주어야 할 때,

그대가 내 심장의 관상동맥 한 혈관을 막았을 때,

죽음이라는 숨턱을 넘는 것이 숨 쉬는 것보다 쉬울 때,

 

여기는 안개 색

허우적거릴 뿐, 부유스름한 물살에서

세차면서도 부드러운 물너울을 타고 얼굴이 잠길 뿐,

사방은 온통 물안개바다,

잠의 눈꺼풀이 마냥 무거울 뿐,

잔잔한 물살에 몸을 맡긴 채,

 

또 다시 부유하며 격랑에 휩쓸려가는 벌거숭이 몸

기진맥진 나뭇가지를 부여잡을 뿐,

(엄마, 어머니, 어머니······) 오열하는,

 

저 멀리서 갑자기 잠이 환하게 촛불을 들어올렸다

-엄마, 나예요, 나, 울음에 목 쉰 소리

-응, 여기가 어디지, 가슴뼈를 송곳이 마구 찔렀다

분당 서울 대학 병원 그물 시술 중환자실

 

그대가 내 가슴을 쥐고 목숨 줄을 꽉 조였을 때,

어두운 숲길 내 시간이 그루터기에 걸려 쓰러져 있었다

죽음이란 유혹, 알약에 취해 실컷 몸과 놀고 싶었다

 

내 명줄을 딸이 꽉 잡고 있었다

하늘 한 조각이 꽉 내 발목을 잡고 있었다

살아 봐, 살아 보는 거야,

개똥밭에 굴러도 뒹굴며 살아 봐,

연한 보라색, 보라색은 신비한 하늘색이지

새로 태어나는 색이지, 신새벽 저 창문을 봐,

오롯이 보이는 새별, 개밥바라기별을 다소곳이 바라봐.

 

-시집 『색채 예감, 창문엔 연보라색』 2021.

 

 


 

 

노혜봉 시인 / 프리다 칼로의 마지막 그림 ‘인생만세’

 

 

 짙은 초록색 수박 한 통이 한 가운데, 온전히 튼실히 잘 익은 수박 한 덩이는 얼마나 부러운 존재인가!

 

 날벼락. 교통사고, 쇄골 갈비뼈가 부러짐, 골반 뼈가 세 동강으로 부러지고 으스러짐, 다리뼈가 11개나 부러짐. 반의반으로 잘린 수박 세 조각, 산산조각이 난 뼈와 뼈에 그녀를 톱질 하는 소리 칼로 난도질하는 소리 망치소리.

 

 초록색 껍질을 벗기고 꽃잎처럼 톱날 모양으로 자른 수박 한 덩이, 꽃다운 처녀는 두 팔을 빼고는 온몸에 깁스를 한 채 오직 천정만을 보며 누워있다, 올무에 걸린 채 울부짖는 짐승. 침대에 묶여있는 식물,

 

 천정에 달린 거울 속 제 모습. 살에 박힌 대못, 고통과 사슬에 얽매여있는 한 존재, 살고 싶다는 버둥거림, 압도적인 외침, 단 하루치의 삶! 허공에 떠 있는 한 순간. 그림은 살고 싶다는 단호한 외침.

 

 결혼은 환상적 상실. 사랑한다는 배신, 서른 번이 넘는 수술, 끝없는 나락으로 세 번의 유산까지, 그림보다 더 예술적인 생명 창조, 살아 숨 쉬는 노란 연두색 수박 같은, 그 초록색 탯줄을 끊고 아기파랑새를 귀하게 품에 안고 싶었나. 자기혁명 인간승리의,

 

 살점이 무르도록 새빨갛게 눈물이 익어 까만 씨가 점, 점으로 살아 있는 수박, 선홍색 피로 물든 온몸, 겹겹 삶을 저몄던 고통이 영글어 새까만 글자로 박혀있다. ‘인생 만세’ 라는 47개의 사리가 선명하게 빛을 밝힌다.

 

 파랑새로 꼭두새벽 창공을 날고 싶다는 저 희망.

 

-시집 <미학적 완성을 위한 심미적 성찰>에서

 

 


 

 

노혜봉 시인 / 첫시집

 

 

비취빛 또렷한 칼금 자욱에

제 살비듬을 홈빡 묻힌 석필을

손에 꼭 쥐어주고 달음박질쳐 가던

 

산등성이에서 한참 외진 곳

한 아이가 굴렁쇠를 굴리며 웃고

있었다. 반나마 누렇게 시든

풀밭을 가로질러

 

노란 꽃몽울이 자잘자잘히 꽃대를

다독거리는

방금 지지눌린 애기똥풀꽃잎이

짧은 가을볕에

주체할 수 없는 꽃딱지를 떨구고 있었다

 

깊은 골짝을 하염없이 훼청거리다가

늘어난 인대에 깊은 샘 찜질을 해주다가

어린이의 이상한 뿔피리

하모니카로 그 첫소절만 불어대다가

굴렁쇠바퀴 지나간 좁다란 길 따라가다가

 

주저앉은 유년의 뒤뜰

붉은 구덩이에서 우벼 파낸

 

깨어진 鬼面瓦 조각

두 개의 뿔, 눈 코 귀 죄다 으스러진

캄캄한 어둠 속

부러진 앞니 하나 뭉툭 솟아 있는

 

 


 

 

노혜봉 시인 / 연리지(連理枝) 금강소나무의 노래

 

 

그대는 나의 반쪽, 운명의 버팀목입니다

나의 반쪽, 당신은 영원한 첫 손님이지요

 

바람의 청아한 목소리를 솔잎 귀에 쟁입니다

풋풋한 숨결을 솔방울 비늘깃마다 새긴답니다

 

난데없는 번개와 우레 폭풍, 올곧은 믿음이 꺾이고

번쩍! 가슴엔 온통 거북껍질이 갈라지기 시작

눈물이 패여 찐득한 송진은 마를 새가 없었어요

 

고단한 몸을 등줄기에 기울여 봐요. 업어 줄게요

가슴에 포옥 안기어 멈춘 숨, 황홀한 포옹,

어지러운 용틀임 살과 살 붉게 타오르는 몸짓

 

쉼표와 줄임표 그 생각을 솔잎에 챙겨 둘 게요

눈발에 솔잎마다 쌓이는 높은 휘파람소리

하늘을 우러러 낏낏한 빗질을 자꾸 해 봅니다

 

그대는 한 권의 자전적 소설 황장목을 품었지요

세월을 나이테로 촘촘히 쓴 이름씨, 움직씨, 그림씨,

온전한 느낌씨, 토씨의 금빛 문장들을 새겼습니다

 

어느 날, 그대의 버팀목 서재의 책장이 되었지요

무늬의 나이는 살리고 다듬고 문지르고 옻칠을 해

빛나는 당신 책상으로 거듭 태어났습니다

 

들리나요. 눈물의 목소리, 깊은 울림, 장엄미사가

햇살과 바람이 담금질한 향기의 저 교향곡이!

 

 


 

노혜봉 시인

1941년 서울 출생으로 성균관대학교 국문과 졸업. 1990년 《문학정신》으로 등단. 시집  『산화가』 『쇠귀, 저 깊은 골짝』 『봄빛절벽』 『좋을 好』. 한용운 위인 동화 『알 수 없어요』. 성균문학상 수상. 전 초등교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