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대교 시인 / 각수장
지어미와 각방자리하고 정갈한 이부자리에서 자야 한다. 안팎 청소를 깨끗이 하며 마당에 개나 닭이 돌아다니지 않도록 하여라 밥상을 받으면 수염주머니를 찰 것이며 술과 고기를 멀리하라 등짐장수가 오면 값을 깎지 말고 한 냥 더 얹어줄 요량을 하여라 흰 옷을 입고 발에 흙을 묻히지 마라 공방 앞에 금줄을 치고 잡인의 출입을 금하라 무른 나무는 쓰지 말고 단단한 나무를 써야 한다 결과 빛깔을 살려라 겉나무는 칼을 받아들이나 속나무는 그러지 아니하니 잘 헤아려라 새겨 두어라 내 마음에 새길 줄 아는 자만이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새길 수 있느니라 말씀을 마치더니 입을 다무셨지 긴 침묵이었어 뒷산 어드메쯤 잘 익은 상수리 한 알이 튀더구나 톡
오대교 시인 / 불쏘시개
척박한 땅에서 태어난 것들은 볼품이 없죠 연약하여 홀로 서 있기조차 힘들죠 그렇게, 그렇게 연명하다 나무꾼 지게에 얹히는 신세가 되죠 시골집 부엌이나 장국밥집 아궁이에 버려지죠 하지만 한 번은 기적을 일으키죠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불꽃으로 활활 피어나죠 꼭 한 번은 피었다 사라지죠
오대교 시인 / 新 뛰어나 보세
뛰어 보세 뛰어나 보세 윽신윽신 뛰어나 보세 강강술래
꼴뚜기도 제철이라 메뚜기도 한철이라 강강술래
이랑이 고랑 되고 고랑이 이랑 되게 강강술래
숭어처럼 펄떡펄떡 노루처럼 겅중겅중 강강술래
뛰어 보세 뛰어나 보세 윽신윽신 뛰어나 보세 강강술래
* 뛰어나 보세 : 강강술래 노래 중 일부. * 이랑이 고랑 되고 고랑이 이랑 된다 : 잘살던 사람이 못살게도 되고, 못살던 사람이 잘살게도 된다는 속담.
-시집 <윽신윽신 뛰어나 보세> 중에서.
오대교 시인 / 샛길
초등학교 시절 샛길로 빠지기를 좋아하는 친구가 있었다 등굣길에 딱 한 번 따라간 적이 있는데 학교까지 빨리 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 나는 그를 따라가지 않았다 나는 그저 한길이 좋았다 넓고 거침없는 한길이 좋았다 세월이 흘러 그는 큰 장사꾼이 되었다 여손 잠상꾼 노릇도 서슴지 않으며 구렁이 제 몸 추듯 한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그러던 망육(望六)의 어느 날 그가 급사했다는 부음을 받았다 마지막 길도 샛길로 빠져버린 친구 장례식장에 다녀오면서 그가 곧잘 사라지던 길을 보았다 한번 걸어볼까 하다 그냥 한길을 걸어 집으로 왔다
*여손; 물건값을 올려서 남겨 먹는 장사꾼을 뜻하는 은어. *잠상꾼; 예전에, 법으로 팔지 못하게 하는 물건을 암암리에 팔던 장사꾼. *구렁이 제 몸 추듯 한다; 자기 자랑만 하는 사람을 빗대어 말할 때 쓰는 속담.
오대교 시인 / 고봉밥
곱삶이든 싸락밥이든 배부르게 먹고 싶다며 떠났던 친구가 삼십 년 만에 돌아왔다 사람이 꼭 밥으로만 사는 것은 아니라지만 밥 때문에 죽고 사는 이들 사이에서 객짓밥 눈칫밥 먹다 늙어버린 친구 입에 넣기 사나운 대궁도 먹고 소금밥도 먹어보았다는 친구에게 우리 저녁이나 같이 들자고 했다 아내는 정성껏 밥을 짓더니 솥에서 처음 푼 밥을 고봉으로 담아 그 앞에 놓았다 '깨끼 만 먹었는데...' 친구는 뚝딱 비우더니 숭늉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나는 한 그릇 더 먹으라고 권했다 그는 사양했지만 나는 자꾸 권했다 사람이 꼭 밥으로만 사는 것은 아니라지만 나는 자꾸 권했다
* 곱삶이 ; 꽁보리밥. 두 번 삶아 짓는 밥. * 싸락밥 ; 부스러진 쌀알로 지은 밥. * 대궁 ; 먹다가 그릇에 남긴 밥. * 소금밥 ; 소금물을 묻히어 뭉친 주먹밥. * 깨끼 ; 수북하게 담지 않고 그릇의 높이에 맞춰 담은 밥.
오대교 시인 / 소줏고리
네 할머니 기일엔 말간술을 쓰자 멥쌀 고두밥에 누룩으로 빚은 밑술을 무쇠 가마솥에 부어라 옹배기 두 개를 올린 다음 시루변을 붙이고 주구(酒口)를 달아라 밤새 내린 밀주(密酒)를 이고 장터로 향하던 그 모습이 눈에 선하구나 그날따라 까마귀가 울어대더구나 차갑게 보이지만 뜨거운 분이었지 탁배기 같은 자식들을 맑게 키우느라 힘이 들었던지 맺힌 것들을 장작불에 쏟아 넣던 손길 화가 치밀면 엎어 놓은 솥뚜껑에 찬물을 부어대던 그 분을 잊을 수가 없구나 끓는 소리가 들리느냐 모시 적삼 같은 김이 피어오르느냐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지느냐
-<계간 문예> 2009 여름호
오대교 시인 / 날개가 없어도
날개가 없는 것들은 두들겨 맞으면 하늘을 난다네 세게 맞을수록 멀리 난다네
영악한 것들은 가벼워지기 위하여 목숨을 건다네
더 영악한 것들은 나는 것들의 몸을 파고든다네
무심(無心)한 것들은 하늘을 향해 그저 걷다 새의 발톱에 묻혀 가기도 한다네
날고 싶다는 친구여 울지 말게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서수찬 시인 / 따오기 시인 외 6편 (0) | 2026.01.17 |
|---|---|
| 노혜봉 시인 / 나박김치를 보며 외 6편 (0) | 2026.01.17 |
| 안영선 시인 / 할머니와 비둘기 외 6편 (0) | 2026.01.17 |
| 정연홍 시인 / 코르크 왕국 외 6편 (0) | 2026.01.17 |
| 류현승 시인 / 출가 1,2,3,4,5, 외 6편 (0) | 2026.01.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