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서수찬 시인 / 따오기 시인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17.
서수찬 시인 / 따오기 시인

서수찬 시인 / 따오기 시인

 

따오기의 시편에는

논이나 개천 웅덩이 등

여러 지면에 시를 발표하시는데도

외로움, 쓸쓸함, 고독이

매번 읽혀집니다

흔하디흔한 무슨 단체에

가입한 것도 아니고

떼로 몰려다니지도 않으며

고작 한 편씩만 저녁 무렵에

발표하십니다

시집을 내도

발문을 써 줄 측근도 없을 것 같아

저 자신이

절절한 발문입니다.

 

-시집 『시금치 학교』 에서

 


 

서수찬 시인 / 바오바브나무

어느 누가 보더라도

저건 딱 행상을 머리에 인 어머니다

저녁무렵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리 새끼들이

어느 곳에서 긂주리고 있지 않나

가장 키가 꺼진다

새끼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보이기 위해

허리를 잠시라도 굽힐 수 없다

새끼들도 그때쯤이면

우리 엄마가

세상에서 가장 큰 거인인 것처럼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본다

엄마는 말라비틀어진 젖을 열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저녁을 차린다

 

 


 

 

서수찬 시인 / 버스 기사 S시인의 운행일지

 

 

소래를 지나가는 버스는

아직도 불심검문을 한다

무슨 사상을 숨기고 다니는 것도 아닌데

죄다 검은 비닐봉지에다

꽃게나 새우를 숨기고 탄다

문제는 꽃게나 새우가

집게다리나 수염을 이용해서 슬그머니

승객들에게 냄새 테러를 가한다는 데 있다

지독하다

그러니까 검은 비닐봉지는

사상을 가린다

소래 어물전 상인들도

무슨 부끄러워할 일도 아닌데

하루 종일 일한 작업복과

작업복을 따라온 비린내를

검은 비닐봉지에다 숨기고 타는지

검문하면 화부터 낸다

소래 사람도 못 믿냐고

그래 검은 비닐봉지가 당신들을

못 믿게 만든다고

시인들도 못 믿냐고

그래 당신들이 쓴 시가

검은 비닐봉지처럼 모두다 가려서

그런다고

 

 


 

 

서수찬 시인 / 냉수대

 

섬 그늘에 누워 아버지는

하루 종일 앓았다

아직 떼지 않은 문설주의

입춘대길처럼

언제나 속 시원히 조기떼가 몰려 오려는지

냉수대 낀 속 탄 가슴에

대신 팔팔만 밀려와 미역처럼

여기저기 널려 있구나

속없이 면장은 자가용을 타고 와

덤핑으로 쌓여 있는 팔팔을 거둬다가

오늘같이 기쁜 날

국이나 끓여 먹으라 한다

체력은 국력이여

언제부터 운동이 국시가 되고

며칠째 술로 저린 아버지 뱃속에서

동생들은 학교도 못 가고

굴뚝새처럼 울어쌓는데

저놈의 정치 휴전 같은 냉수대는

언제쯤이나 걷힐는지

우리의 메인 스타디움인 법성포 앞바다에는

멸치 새끼 한 마리

눈에 띄질 않는구나.

 

 


 

 

서수찬 시인 / 안산에는 안산 사람이 안 산다

 

신흥 공업도시

오아시스의 물 냄새를 맡고

떼 지어 몰려든 곳

밤새 아이를 만들 듯이

빈터마다 집은 지어지고

사람마다 비빌 언덕이 되어

배불러서 부부가 같이 출근하는 곳

비단길은 마음에나 있는 곳

폐수가 된 저수지에

누군가 낚시를 하고

기형의 희망만 간판이 되는 곳

하루 종일 기다려도

낙타는 두세 번 지나칠 뿐

한 번 출애굽한 서울 땅을 못 잊어

주말이면 텅 비어 가득 차는 곳

식솔을 거느리고

협궤의 구멍만 깊어지는

이사가 끊이지 않는 곳

살아가기보다

그냥 살아지는 곳.

 

 


 

 

서수찬 시인 / 얼굴

 내 고등학교 때 별명이 뒤죽박죽이다. 눈, 코, 입, 귀가 따로 놀아서 붙여진 별명이다. 수학여행 가서 내 옆에서 단체사진 찍던 친구는 자기 얼굴 버린다고 정면이 아닌 뒤통수를 찍었다. 지금도 나는 그 사진을 가지고 있지만 그 친구를 욕하지 않는다. 그 친구와 나는 보는 방향이 달랐을 뿐, 난 내 얼굴 때문에 사람의 뒷면까지도 자세히 볼 수 있게 되었다.

 

 


 

 

서수찬 시인 / 사람의 열매

세상 모든 나무들은

열매를 네모나 세모처럼 각이 지게 내지 않는다는 것을

내 머리에 떨어져

저만치 굴러가는 은행 알을 보고 새삼 깨닫는다

열매가 무기가 되지 않게

동그랗게 궁굴릴 줄 아는 마음이

사뭇 고맙다

사람의 열매인 자식도

동그랗게 말아서 세상에 내보내야 하지 않겠나

누구에게 떨어져도

무기가 되지 않게

 


 

서수찬 시인

1965년 광주 광산에서 출생.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1989년 《노동해방문학》에 <접착을 하며> <복개공사> <안전장치>를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 『시금치 학교』 『버스기사 S시인의 운행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