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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손병걸 시인 / 빗방울 점자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17.
손병걸 시인 / 빗방울 점자

손병걸 시인 / 빗방울 점자

 

 

우르르 쾅쾅, 천둥 소리에

깜짝 놀라 떨어뜨린 점자책

 

책갈피마다 알알이 박힌

무수한 점자들이

와르르 쏟아진 걸까

 

으깨진 머리를 감싸 쥐며

방바닥을 뒹구는

점자들의 비명이 들려오고

 

땅바닥을 치는 빗방울 소리 따라

가빠 오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반지하 방바닥을 더듬을 때

 

내 생각과 아무 상관 없다는 듯

두두두두, 빗소리는

꽉 닫힌 창문을 자유로이 넘나들고

 

다시 펼친 책갈피마다

하얀 여백을 딛고 오뚝한

점자들의 목소리 들려온다

 


 

손병걸 시인 / 대문

 

힘껏 밀친 대문

크르렁 신음을 토했다

군데군데 갈라진 녹

문 앞에 쌓인 낙엽 위에 떨어졌다

온몸이 으스러져 가도

그 자리에 변함없이 서 있기란

얼마나 힘겨운 일인가

닫혀 있을 때, 열려야 할 때

언제나 잘 알고 있으니

고마운 일이다

대문을 닫고 돌아서는 순간

발밑에서 뿌드득뿌드득하는 소리

아, 세월의 각질들!

 

-시집 『나는 열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에서

 

 


 

 

손병걸 시인 / 손수레 엄마

 

어설픈 희망으로 브레이크를 걸지 마세요

오늘 한 포대 주워온 빈 소주병 같은

헌 옷들을 줍습니다 다림질하듯

버려진 폐지를 다반사로 펼치고 묶습니다

언젠가 문앞에 쌓아 두었다가 소나기에 엉망이 된

종이 상자를 닮은 살림을 꾸립니다

저녁이면 소금꽃 핀 얼굴로 돌아와

시커매진 형광등을 갈아 끼우고

식은 찌개 냄비를 가스레인지에 올립니다

투병 중인 눈먼 아들 입꼬리가 올라가는

훈훈한 방바닥, 미역국 때문에

가끔은 밤에도 손수레를 끕니다

애당초 먼 훗날의 꿈과는 관계없는

생활입니다 깨진 병에 손을 베인 상처가

아물 틈 없이 이마의 주름 같은 골목을 뒤집니다

얼마 전엔 쇳덩어리 싣고 고장 난 손수레처럼

등골이 휜 폭삭 늙은 할머니,

깊은 밤 쪼그라드는 몸을 둥글게 둥글게 말아

캄캄한 우주 속에서도 덜컹덜컹 바퀴를 굴리며

골골골 찌개를 끓이는 재활용 요리 전문가

엄마는 스물네 시간 자전하는 지구입니다

 

-시집 『나는 열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에서

 

 


 

 

손병걸 시인 / 저녁놀

 

 

하루의 노동을 마친

 

비알밭에서

 

굽은 몸 일으켜

 

남은 힘을 다해

 

산등성이 너머

 

흰 구름 속으로

 

핏물을 수혈하는

 

엄마

 

 


 

 

손병걸 시인 / 물이 끓는 시간

 

 

틈이란 틈을 다 비집고 날아오르는

커피포트 속 물소리처럼

모든 날갯짓은 다 뜨거운 걸까

 

시력을 잃고 엎질러진 물처럼

내 생이 밑바닥 밑바닥으로 스미는 동안

오래전 몸속에서 식은 시간이 끓어오른다

 

가벼움과 무거움은 하늘과 땅 사이

그 사이로 스산한 바람이 불고

투명한 벽은 점점 더 두께를 키웠을까

 

뜨겁고 서늘함이 한바탕 뒤엉키며

고인 시간이 비등점에 이를 즈음

커다란 날개 한 쌍이 활짝 펴진다

 

적절한 온도의 바람이 불고

모든 틈이 사라진 여기가 바로

내가 간절히 원한 절정

그러나 지금은 잠시

펼쳐진 날개를 접어야 할 때

 

괜찮다 커피포트의 전원을 끄고

한껏 벌어진 생각을 메우듯

스물네 시간 쉬지 않을 내 몸에 전원을 켠다

 

 


 

 

손병걸 시인 / 푸른 뼈

 

동해를 딛고 선 산 중턱

스무 해가 넘은 아버지 묏등을 허문다

살점 하나 없어도

여전히 지상에 남아 있는 노동인 듯

차마 썩지 못한 단단한 뼈

가난을 짊어지고 등골이 휜

아버지의 혹독한 일생을 생각하며

부드러운 솔로 흙을 털어낸 뒤

불길로 태우고 곱게 빤 뼛가루

한 줌 한 줌 산꼭대기에 흩어놓으니

하늘이 대신 알고 빗방울을 떨어뜨린다

황토와 빗방울에 섞인 뼛가루

산길에 찍힌 발자국들

주춤주춤 그러모아 바다로 흘러갈 때

먹구름 지나간 하늘 골똘히 높아가고

모가지 길게 빼고 구경하던 나무들

여지없이 그렁그렁 푸르다

 

 


 

 

손병걸 시인 / 아이가 아빠를 키운다

 

아빠 식사하세요

밥때만 되면

아이의 목소리 들린다

 

자식이라고는 단 하나

고작, 초등학교 3학년

생일이 빨라서 3학년이지

이제 아홉 살짜리다

 

밥상에 앉으면

이건 김치, 빨개요

요건 된장찌개, 뜨거워요

두 눈이 안 보이는 아빠를 위해

제 입에 밥알이 어찌 되든지 말든지

오른쪽에 뭐 왼쪽에 뭐

아이의 입은 바쁘다

 

요란한 밥상이 물러나면

커피는 두 스푼

설탕은 한 스푼 반

크림은 우유가 좋다며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내게

깡충깡충 커피를 가져다준다

 

아홉 살짜리 아이가

아빠를 키운다

 

 


 

손병걸 시인

1967년 강원도 대관령 출생. 경희사이버대학원 미디어문예창작학과 졸업. 1997년 베체트씨병'으로 두 눈 실명, 시각장애 1급 장애 판정. 경희사이버대 대학원 미디어문예창작학과. 2005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  『푸른 신호등』 『나는 열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 『통증을 켜다』 『나는 한점의 궁극을 딛고 산다』. 수필 『어둠의 감시자』 등. 2006년 구상솟대문학상, 대한민국장애예술인상, 중봉조헌문학상 등을 수상. 한국장애예술인협회 회원, 한국작가회의 회원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