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곽은영 시인 / 물끄러미 외 8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17.
곽은영 시인 / 물끄러미

곽은영 시인 / 물끄러미

-모리스 호텔14

 

 

밤에는 벌써 춥다

며칠이 지나도록 고양이의 밥그릇이 비워지지 않았다

정든 동물이 어느 날부터 보이지 않을 때

지나고 나면 애틋한 기억이 남는데

왜 고통이 더 커 보일까

나는 물끄러미

밥그릇을 내려다보았다

 

-시집 <관목들>에서

 


 

곽은영 시인 / 가정 간편식

-모리스 호텔 09

 

버섯을 불리면서 배를 갈고 오이를 썰고

버섯을 볶고 간장도 붓고 꼬들꼬들 볶고

들기름 고춧가루 넣어 볶고

갈아놓은 배 볶은 버섯 오이 식초 소금 한데 합쳐서 휘휘

차게

국수를 짧게 삶아서 찬물에 휘휘

차게

마음에 드는 그릇 시원해진 국수 오이와 차가운 소스

얼음이 된 불꽃을 만드는 레시피

이따금 꺼낸다

 


 

 

곽은영 시인 / 밤하늘 보호구역

-모리스 호텔 22

 

 

 겨울 별자리가 눈에 띄게 지평선과 가까워졌다. 밤은 순식간에 시작되고 달은 성큼성큼 두 사람은 오랜 친구처럼 스스럼이 없다. 별똥별이 지나갔다 별과 별 사이 어둡고 먼 곳으로 불꽃은 툭툭 아마추어 사진가와 천문가가 만드는 풍경을 살라먹고 그들은 살푸딩과 커피를 비운 뒤 떠났다 종일 차를 몰고 고치다 보면 고장 없이 달리는 것이 아름답습니다

 아름다운 것은 규칙적이기도 하죠 믿을 수 없는 저궤도와 낮은 각도로 움직이는 인공위성이 많아졌어요 베텔게우스 좀 보세요 식품 배달원이자 정비공의 별이 빛났다 밀린 식료품비와 순무처럼 쑥쑥 크는 그의 아들 야간의 자동차 정비 그런 것 말고도 별을 말하는 매혹의 순간 밤은 순식간에 시작되고 달은 성큼성큼

 

 


 

 

곽은영 시인 / 불한당들의 모험 1

 

 

​그러나 안녕, 이제부터는 나의 모험을 말할거야

툭 튀어나온 광대뼈를 향해 악수 대신 펀치를 날리고 집을 나섰다

첫번째 모험은 어른이 되기 싫은

어른과 함께였다

*

나는 아이도 아니고 어른도 아니야

그래서 연애에 실패했지 수수깡을 꺾어 안경을 쓰는 것은

시시해졌을 나이 바보 같은 애인들은 나를 축축하다고 말했다

찝찝한 단어였다 떠난 당신들이 쓴 종이를 씹으며 입술을 검게 물들였다

우하하 당신들이 타넘은 꽃의 줄기마다 얼룩점이 있는 것은 몰랐을 거야

검은 침을 찍어 벽에 문질렀어

*

 

​풀이 흘리는 땀냄새가 지독한 여름이었다


곽은영 시인 / 불한당들의 모험 2

 

이렇게 아픈 줄 몰랐어


곽은영 시인 / 불한당들의 모험 5

 

그러나 덩굴손은 낄낄거리며 밤마다 창을 넘어 장미의

숲을 헤집고 다녔다

배어나온 피는 비릿했으나 싫지 않았다

더이상 피맛은 알고 싶지 않아 고의로 술에 취해 잠이

들었다

 

 


 

 

곽은영 시인 / 불한당들의 모험 13

-나의 달은 매일 운다

 

 

일 년 내내 비가 내리는 땅

귀를 씻고 이곳에 왔어요 구두를 벗고 맨발로 왔어요

낯선 언어들이 음악처럼 들리는 곳

 

당신들은 왜 나를 잡으려고 했을까요

이해하고 싶어라는 징그러운 거짓말의 덩굴

가위로 덩굴을 자르는 대신 쥐며느리처럼 몸을 말고 빠져나왔죠

 

당신들의 입맛대로 내 이름은 노랗다가 파랗다가

한 번도 진짜 이름을 알려준 적이 없는데도

거울 속 나는 그때그때 달라서 말하기 곤란했을 뿐인데

 

우리들은 모두 번쩍번쩍한 태양을 머리통에 박고 살지요

죽은 엄마는 달의 감정을 내 가슴에 달아주고 떠났어요

여느 엄마처럼나는 달의 눈물을 말하고 싶었으나

태양의 빛이 너무 강렬하기에

 

일 년 내내 비가 내리는 이곳 빗소리가 아름다워요

푸른 앵무새는 고맙게도 매일 축축한 흙냄새를 물어와요

나의 달은 매일 울어요

 

비밀은 없죠

이곳의 언어가 하나둘 글자로 굳어지자 오해도 큼지막하게 쌓여

대문을 틀어막았네요 이제 나는 눈물이 되어 흘러나갈까요

가슴의 달은 둥둥 떠서 언제까지고 흐르겠죠

 

갈래머리를 땋았다가 올렸다가 거울에게 물어봐요

나의 몸은 납작하지만 등뒤는 깊고 깊은 세계

그리고 울고 있는 나의 달

울고 있는 나의 달

 

-시집 『불한당들의 모험』,문학동네, 2012년

 

 


 

 

곽은영 시인 / 응시

-모리스 호텔30

 

벽을 따라 흘렀다

오르락내리락 악담이 더러운 발자국을 벽에 찍었다

그때마다 무서워 가기 싫어 되풀이되는 똑같은 감정

하나둘 거울을 깼다

모르는 단어가 입술을 열고 튀어나왔다

어느 날 팽팽한 줄이 끊어지더군

피잉 끊어지는 소리와 함께 도망치고 달려서 도착한 곳

은 처음 그 자리

하나둘 거울을 깼다

하나둘 조각을 주웠다

이음매에서 오래된 눈물이 흘러나왔다

 

 


 

 

곽은영 시인 / 불한당들의 모험 13

- 나의 달은 매일 운다​

​​

일 년 내내 비가 내리는 땅

귀를 씻고 이곳에 왔어요 구두를 벗고 맨발로 왔어요

낯선 언어들이 음악처럼 들리는 곳

당신들은 왜 나를 잡으려고 했을까요

이해하고 싶어라는 징그러운 거짓말의 덩굴

가위로 덩굴을 자르는 대신 쥐며느리처럼 몸을 말고 빠져나왔죠

당신들의 입맛대로 내 이름은 노랗다가 파랗다가

한 번도 진짜 이름을 알려준 적이 없는데도

거울 속 나는 그때그때 달라서 말하기 곤란했을 뿐인데

우리들은 모두 번쩍번쩍한 태양을 머리통에 박고 살지요

죽은 엄마는 달의 감정을 내 가슴에 달아주고 떠났어요 여느 엄마처럼

나는 달의 눈물을 말하고 싶었으나

태양의 빛이 너무 강렬하기에

일 년 내내 비가 내리는 이곳 빗소리가 아름다워요

푸른 앵무새는 고맙게도 매일 축축한 흙냄새를 물어와요

나의 달은 매일 울어요

비밀은 없죠

이곳의 언어가 하나둘 글자로 굳어지자 오해도 큼지막하게 쌓여

대문을 틀어막았네요 이제 나는 눈물이 되어 흘러나갈까요

가슴의 달은 둥둥 떠서 언제까지고 흐르겠죠

갈래머리를 땋았다가 올렸다가 거울에게 물어봐요

나의 몸은 납작하지만 등 뒤는 깊고 깊은 세계

그리고 울고 있는 나의 달

울고 있는 나의 달

 

 


 

곽은영 시인

1975년 광주에서 출생. 전남대 교육학과 졸업. 서울예술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개기월식〉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 『검은 고양이 흰 개』 『불한당들의 모험』 『관목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