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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장순금 시인 / 아날로그 당신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17.
장순금 시인 / 아날로그 당신

장순금 시인 / 아날로그 당신

 

 

공중전화 부스에서 전화를 건다

늑골 사이 뚫린 구멍에 손가락 하나씩 넣어 돌리면

미궁 속으로 철렁, 빠지는 허튼 무게

동전 한 닢 지하로 떨어지는 그 촌음의 시간 동안

겨울이 땅속에 발을 묻고 황량한 봄도 따라 얼굴을 묻었다

내 시간도 수직으로 낙하했다

 

꽃잎이 보풀처럼 떠 있는 진공 속을

언 발로 건너오는 동안

바람도 얼룩얼룩 자라고 허공에 머리 기댄 나도

그늘 무성한 집 한 채를 이루었다

 

당신이 흘리고 간 모래밥 먹으며

느리게

미련하게

 

신호음만 울리는

오래된 허공 하나 갈비뼈 사이로 넣고 다닌다

 

-[시인정신] 2012 겨울호

 


 

장순금 시인 / 속죄의식

 

 

가끔씩 나는 팔 다리가 없어진다

바닥에 바싹 몸 붙여 몸통으로만 사는,

아니 기어다니는 것,

난간을 붙잡아야 할 때 달려야 할 때도

젖은 땅을

긴 배밀이로 달리는 뱀처럼

서툰 박음질 자국 같은 길을 울퉁불퉁 가는

시간을 탕진하고 사랑에 현혹된

내 속죄의 죄목이

뱀길처럼 길게 바닥을 쳤나

 

무채색 길 한 채

차가운 바닥에 내려놓고

이제

사라진 팔 다리가 돌아오지 않아도

내 속죄의식은 날마다

기도하듯

성대한 배밀이로 거행되고 있다

 

 


 

 

장순금 시인 / 사람의 아들 23

 

 

예수가 서울에 왔다.

그가 살던 이스라엘에서 서울로 이사를 왔다

맨몸에 십자가 하나 달랑 메고

불빛 속 하늘로 삐져나온

서울의 옥탑방으로 이사를 왔다

밤에는 십자 별천지

지상이 아름답고 눈이 부셔

예수는 선글라스를 꼈다

 

낮에도 야광처럼 번쩍이는

사랑 메시지는 지하철 안에서 길거리에서

서울을 덮고도 남아

옥탑방 꼭대기까지 밀려와 문을 두드렸다

사랑 팝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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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뾰족한 종탑에서 종탑으로

이천년을 끌려 다니며 종소리로 울다가

서울로 와서도 계속 소리 높여 기도해야 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장순금 시인 / 수혈

 

 

 익명의 B형이 내 혈관에 천연덕스레 입 맞추고 들어와 살림을 합쳤다

 

 느릿느릿 말초까지 헤엄쳐 가 좋은 아침, 말 건네는 붉은 입술이 몸길 회로에 태연히 합류해, 함께 밥 먹고 잠자고 생각한다

 

 그는 꿈과 절망 사이, 사랑과 증오사이, 겨울과 봄 사이, 어제와 오늘 사이를 건너오며 동백꽃처럼 붉게 울었을까

 어느 별의 심장에서 요동치다 빠져나온 청춘의 고뇌였을까

 밤마다 절망에게 목덜미 잡히지 않으려 부릅뜬 눈으로 오래 불면 속을 헤매었을까

 물음표로 휘어진 등을 더욱 구부린 채 세상을 향해 무슨 질문을 던졌을까

 내게로 오기까지,

 지구를 몇 바퀴 돌아왔을까, 붉은 실로 촘촘히 바느질하여 내 혈루로 이었을까

 

 한통속으로 잘 섞인 그와 나

 천년만년 살고지고, 박자를 맞추는 나날이다

 

 


 

 

장순금 시인 / 극과 극은 한통속이다

 

 

악마의 꽃이라는 이름을 가진 꽃을 보았다

꽃이 악마고 악마가 꽃이라니,

검푸른 자주색 열매는 무서워 보였지만

꽃은 볼수록 매혹적이었다

 

악마의 꽃은

그 얼굴에 사랑이 깃들수록, 아름답게 피어날수록

하반신부터 가슴까지 서서히 얼음처럼 차가워진다고 한다

꽃이 뿜어내는 냉독에

독사도 무서워 피해간다고 하니

 

뜨거운 사랑의 끝이 얼음이란 걸 이미 아는 듯,

신비스런 빛깔로 고요히 잎을 틔우는

저, 악마의 꽃잎이

문득 거울처럼 내 얼굴을 비추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1초, 아니 그보다도 짧은 순간.....

 

꽃이 아름답기만 한 게 아니었다

차갑고 독한 줄은 정말 몰랐다

독이 약이 되고 약이 독이 되듯,

극과 극은 한통속이었다

 

 


 

 

장순금 시인 / 인도

 

 

정시에 출발도 도착도 한 적 없는 인도의 기차는

시간을 멈추게도 늘이기도 하며 아무 데나 서서 일을 보듯

철로에서 내려 땅따먹기 하고 언덕 아래 소들과 유유자적 농담도 하는

여기는 시간이 누워서 흐르는 마을

태양은 지글거리고 구름은 게으르게 하차하는 역

달빛도 느지막이 내려와 슬리퍼 신고 시동 거는 기차에

때 절은 발도 벌레도 슬쩍 끼어 타고

누구도 바쁘냐고, 겹쳐 앉아 떠드는 짐짝들도

도착 시간을 묻지 않는

하품하는 까만 손으로 홍차를 팔며 덜컹덜컹

무질서가 질서를 앞서는 마을

시간을 길 밖에 내다놓고

엉킨 길의 샛길을 용케도 빠져나가는

알 수 없는 힘이 지탱하는 갠지스처럼

시간을 끌어가는 기차 바퀴처럼

새벽 아지랑이 넘실넘실 피다마다

-계간 <문학청춘> 2018년 겨울호

 

 


 

 

장순금 시인 / 밤의 관절은 늘어난다

 

 

불빛이 밤의 관절을 비추면

무릎이 감춘 연골이 늘어나고 연골이 감춘 물기들이 늘어난다

희미한 백열등 아래 까닭 없이 속도가 풀리고

고요도 신발을 벗고 들어와 잘 놀고

 

불빛은 물방울처럼 가볍게 나를 해체하고

명치끝에서 혼자 중얼거린 말들은

관절 닿는 소리로 울려

뜨거운 기척들이 시든 꽃잎처럼 서걱거렸다

 

잠이 자라지 않는 빈집은 저들끼리 꿈이 익어

금세 지워질 말을 저장하느라 수런수런

 

밤새 늘어난 관절을 접어 다시 아침으로 돌려보내는 날,

나는

하루의 장르 밖에 서 있다

 

―《한국동서문학》, 2020년 가을호

 

 


 

장순금 시인

1953년 부산에서 출생.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졸업. 1985년 《심상》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 『걸어서 가는 나라』 『햇빛 비타민』 『골방은 하늘과 가깝다』 『낯설게도 다정해라』 등. 동국문학상 수상. <한국시문학상> 수상. 2019년 경기문화재단 우수작가 선정. 심상시인회 회원, 목월문학포럼 회원, 한국가톨릭문인회 회원, 한국시인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