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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계숙 시인 / 웨딩카 랩소디
결혼식장 밖, 방금 찍어낸 신혼이 활짝 피어난다 사방에 나비가 날아오르고 사계절 꽃들로 환하다 콩꺼풀에 콩꺼풀을 덧댄 출발이 하늘하늘한 리본을 얹고 그들 앞에 대기 중이다 햇살이 둥근 모서리마다 보석으로 박히고 여기저기 묶어놓은 색동 끈들이 구불구불 바닥까지 흘러내린다 네 개의 바퀴가 터질 듯 팽팽하다 드디어 결혼의 문을 열고 연애가 탑승한다 꽃웃음 매듭이 터지고 시동이 걸린다 달콤한 꿈을 주유한 출발이 미끄러지듯 나아간다 달리는 길가에 화르르 꽃잎이 날린다 연애를 움켜쥔 신혼에 달이 떠오르고 서행을 위한 방지턱이 덜컹거린다 그들의 별로 가는 길, 이따금 엇갈리는 바람이 분다 오늘의 톨게이트를 통과하면 연애가 해체되고 결혼이 다시 조립된다 보일 듯 말 듯 보이지 않는 것들이 두근거린다
홍계숙 시인 / 눈오리집게
내 생일엔 눈이 내려요
부화를 모르고 태어난 세상은 하얗게 눈이 부시고 꽉, 집어야 일어서는 틀 속에 뭉쳐지는 생일이 있죠 집었다 내려놓은 집게가 플라스틱 엄마인가요
겨울의 자궁은 춥고 차가워요
베란다 난간에 줄지어 선 오리들이 꽥꽥 울고 있어요 아무리 울어도 온기는 돌지 않고 엄마는 달려오지 않아요
인간의 손끝에서 놀이로 태어난 목숨은 한없이 가벼워요 던져버릴 수도 있고 햇살에 닿으면 녹아내리는 오리들, 몸속 시곗바늘의 궤도는 발이 시린 영하의 방향이에요
어디론가 입양 가버린 아이도 눈오리였을까요 버려진 집게 곁에 온몸이 멍든 채 깨진 울음을 삼켜야만 했던
흰색은 처음으로 돌아가고 싶은 빛깔이에요 노랗고 딱딱한 틀, 그 이전의 시간으로
이제 눈이 그치고 내 몸이 조금씩 흘러내려요
난간에 방치했던 그 아이도 눈처럼 녹아 사라져버린 걸까요
찬바람이 집었다 놓은 연못도 풀리고 있는데.....
홍계숙 시인 / 그 거리의 히말라야시다
낯익은 집들이 낯선 나무들의 곁으로 배치된 도시는 이 거리로 인해 삼척이다
가로수가 펼쳐놓은 도로 위로 자동차가 굴러가고 낮과 밤이 굴러가고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태엽이 풀리는 거리, 이 거리 바깥에 는 아파트를 심고 날마다 물을 주어 도시의 키가 나무를 훌쩍 넘었다
직립의 체위를 바꾸는 그림자,
스치는 불빛에 가로수는 도열의 순서를 교체한다 그림자를 바닥에 눕히고 체스처럼 한 나무가 앞으로, 앞으로, 전진하면 다른 나 무는 뒤로, 뒤로, 후퇴하는 밤의 놀이로
거웃도 턱수염도 검어진 나무의 방언이 익어가고 4차선 분량의 밤하늘에 달빛과 자동차 불빛이 교차한다
불어오는 바람은 무거운 삶을 지고 산맥을 오르던 셰르파들, 고산지대를 누비던 히말라야인이 이곳에 정착했을까
사철 초록 어둠을 껴입은 히말라야시다, 벗어나려던 몸부림이 나무가 되어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오비삼척吾鼻三尺이다
폭설을 건너온 검푸른 머리채, 물살의 발원으로 거슬러 오르던 먼 히말라야를 기억하는 나무들 나무 그늘 속에는 아버지의 빛나던 겨울이 가파른 호흡으로 길을 내고 있다 잘려 나간 가지로 펼쳐 보이는 상형문자 그 암호를 해독한 걸까
나무 둥치 캄캄한 물살을 가르고 별똥별 꼬리가 서쪽으로 흘렀다
홍계숙 시인 / 배웅
오월 허공이 불긋하다 천변의 장미들이 봉오리로 합장 중인 초파일 근처
강둑 아래 드문드문 남아있는 낡은 집 나지막한 담장 밖으로 허공의 눈시울이 붉다 . 저 집은 누가 벗어놓은 허물일까
적막이 걸터앉은 슬레이트 지붕이 위태롭다 헝클어진 마당 골다공증을 앓다 넘어진 화분들, 시간의 담벼락에 기대어 햇살이 고개를 떨군다.
거동을 못하던 노인이 밤새 방문 앞까지 굴러와 온몸을 벗어버린 빈집
마당 구석 쓰러진 화분에서 빠져나온 달리아가 하늘을 향해 몸을 일으킨다 저 질긴 초록은 살아남아 무심히도 꽃을 피우고
담장 너머로 장미가 봉오리를 터뜨린 아침
붉은 꽃숭어리가 강바람에 흔들리며 마지막 길을 배웅하고 있다
홍계숙 시인 / 연못 아래 깊은 방
진흙 속 깊숙한 방, 줄기로 누워있는 열 개 남짓 터널을 지나면 그곳에 닿을 수 있어요 연꽃의 꽃술을 열고 들어가 꽃대를 지나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수중터널을 수직으로 더듬어 내려서요
그 깊은 바닥에 눈을 감고 누우면 캄캄한 어둠의 나이까지 셀 수 있어요 물렁하고 걸쭉한 진흙 속을 헤집는 미꾸라지 소리, 진흙 방을 입질하는 가물치 소리, 늙은 비단잉어의 하품 소리, 물풀 사이 선녀 붕어가 사랑을 나누는 소리, 각시붕어가 수초 위에 알을 낳는 소리, 알을 부화시키는 수컷 버들붕어의 지느러미 날갯짓 소리, 비갠 하늘과 도무지 닿을 수 없는 뭉게구름 떠가는 소리까지도 이곳에선 다 들을 수 있어요 공명 깊은 터널 속 밝은 귀를 품고 있는
누군가 떨어뜨린 한숨으로 연근을 캐던 뻘 묻은 나이를 짐작하지만,
볕이 닿지 않는 진흙 안쪽은 시들 일이 없죠
연꽃이 피나 봐요 캄캄한 방이 환해지고 있어요
홍계숙 시인 / 비트코인
고양이는 두 귀로 레이더를 세우지 보이지 않는 기척을 캐내려 정면을 보지만 발밑을 기어가는 벌레 소리마저 잡아채려는
시인의 서재는 갱도의 막장*, 백지를 열고 뼛속 깊숙이 헤드라이트를 비추며 순도 높은 언어에 닿으려 하지 아무도 만져보지 못한 첫 생각을 채굴하기 위해
허공에 매몰된 황금을 쫓아 0,1,0,1,0,1 곡괭이 소리 전진하지 컴퓨터 광맥을 따라 시간의 안쪽 천 미터까지 내려가지 태곳적 소금과 사라진 조개껍데기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엘도라도의 보물을 찾아
공개키 암호를 잃어버린 조개의 주검이 검은 입을 앙다물고 부유하는, 흑우와 고래가 묻힌 깊은 바닷속으로 고양이의 촉수도 시인의 펜대도, 살아남은 흑우도 고래도 그곳을 떠돌지
쪽박과 대박은 왜 아귀가 맞지 않을까
미지(味知)는 힘이 세고 부재(不在)는 매혹적이지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을 밀고 가는,
마지막 하나를 감춘 막장은 입을 지우지
*지식인의 서재 「김훈의 서재는 막장이다」에서 변용
홍계숙 시인 / 녹색은 간격이 일정하다
행과 행 사이, 열과 열 사이 길을 가르는 녹차밭이 가지런하다 공기는 모두 초록, 이곳에서 나는 깨어나고 선명해진다. 녹색의 행렬을 앞지르는 두 개의 바퀴가 봄의 뒤꿈치에 둥근 족적을 남긴다 봉긋 부푸는 물결, 가로를 이해하는 동안 줄지어 솟은 삼나무는 세로로 정렬된다. 가로가 세로를 손짓하고 곡선이 직선을 향해 달리는 이곳에서 차밭의 향기는 고랑을 타고 달린다 모자를 눌러쓴 아낙들의 손끝에서 봄은 잘려나가고 풋내는 코끝을 적신다 하룻밤 빗줄기가 직선으로 다녀가고 곡선의 바람이 잘린 잎을 어루만지면 수북한 바구니 너머로 초록은 둥글게 회복되고 다시 열을 맞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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