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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랑 시인 / 저어새
저것은 낯설지 않는 생의 수단이다
물때를 맞춰 도착한 전동차 문이 열리자 선글라스 남자가 바닥을 저어 나온다
생존이 키워준 완벽한 숙련 환전기 앞에 가서 카드를 넣자 댕그랑 오백 원 동전이 나온다 동전이 그만 바닥에 떨어져 댕그르 굴러 납작 엎드렸다 주워 주려다 그냥 두었다
지팡이가 바닥을 더듬는다 부리가 먹이를 낚아채듯 천지창조의 그분 손가락처럼 공중급유기 노즐처럼 기가 막히게 지팡이 끝이 동전을 덥석 물었다 허리를 굽혀 주머니에 넣고 고의춤을 여민다
촉이 몸을 끌고 길의 척추를 더듬어 물길 사나운 횡단보도를 휘적휘적 저어간다
최태랑 시인 / 가방
몇 달째 방 먼지만 뒤집어쓴 채 웅크리고 있는 물소 걸핏하면 손잡고 나가자 조른다 봄볕 느슨한 날 물소를 깨워 그 속에 꾹꾹 꿈을 눌러 담고 슬픔도 구겨 넣고 황량한 들판이 기다리는 우루무치로 떠난다 더딘 연착이 지루해 다리 올려놓고 엉덩이로 깔고 앉아도 묵묵히 무거운 몸 받아준다 발목에 발통을 달고 여행 농사를 짓느라 사나흘에서 한 보름씩 광야를 누비다 지친 몸으로 집으로 돌아오면 무색옷 속으로 들어가 꼬리표 단채 와불처럼 누워 있다
최태랑 시인 / 아내 발톱을 깎는다
아침이면 나는 나에게 인사한다
사랑하는 당신 오늘도 웃음이 많은 날 되세요 봄은 자꾸 먼 길 떠나려 합니다 잡으려 하지 마세요 보랏빛 초롱꽃 보듯 하세요 ] 오늘은 버럭은 집에 두고 가세요 울컥도 내려놓고요 입은 다물고 손 먼저 내미세요 앞니 빠진 구두는 벗어 두고 새 신발로 마음 밭을 걸어 보세요
상대에게 베풀기 전 자기에게 친절하세요 몸에서 초록 바람 일게 젊게 사세요 태양에 맞짱 뜰 생각은 갖지 마세요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세요
하루 하루 나를 위한 셀프 오늘이 모여 미래가 됩니다
최태랑 시인 / 사이
그 말 참 좋다 아직 오지도 지나지도 않은 사이에 낀 무렵이란 말 까닭 없이 설레는 시간 떫지도 시지도 않는 그렇다고 단맛이 나는 것도 아닌 견고한 언어는 아니지만 잠깐 헛생각하다 지나쳐 버릴 것 같은 낮과 밤 사이 빗물 고인 돌확에는 벌써 개밥바라기 별이 내려와 있고 산그늘이 홑이불로 마을을 덮는 시간 집을 나갔던 연장들과 가축들이 돌아오는 저물녘 달빛 희미하게 문틈으로 들어와 빈방 벽에 묵화를 치고 있다
-시집 『초록 바람』 2022년 천년의시작
최태랑 시인 / 아내 일기
월남서 귀국한 그해 사월에 결혼하고 곧 아이가 생겼다 옆집 새댁이 준 소주잔을 냉큼 받아먹었다 뱃속 첫아이가 있는 줄도 잊고 나는 금세 얼굴이 붉어졌다 아이는 퇴근한 아빠 기척을 알고 발길질한다 나만 아는 비밀이다 오늘은 관사 뒤꼍에 토마토를 따와 어긋이 여민 접시에 아빠가 드시고 난 후 남아있는 파란 애기 눈꽃, 딸이 혀로 핥아먹는다 내일은 두 개를 따와야겠다 남편은 부엌에서 책을 읽으면 맛이 난다 한다 나는 남편 시집을 읽기 싫다 나를 바보같이 써 놓았기 때문이다 요사이 음식이 점점 짜진다 아마 소금을 치고 돌아서면 잊고 또 쳐서이다 기억력이 청춘처럼 점점 멀리 가있다 그리운 것들이 아스라이 지워지는 가을이다 까치가 울기에 깍깍 대답해 주었다 '당신도 해봐'했더니 까치가 날아갔다 내 손님이었나 보다 밖에 나갈 때면 나는 종종 문에 노크를 한다 왜 하냐고 물으며 밖이 궁금하쟎아 했다 이렇게 외출할 때면 손도 잡고 팔짱도 끼었는데 이젠 뒤따라 간다 남편 위신 깎일까 봐. 남편이 엄마 생각이 난다는 홍시를 사서 손에 들려준다 회양목 울타리를 지나 쪽문으로 집에 가라한다 건널목에서 한참을 보고 있다 못 찾아갈까 등 뒤에 눈이 따라온다 가로수 낙엽이 떨어진다 주워보니 상처 난 것들이 많다 우리 부부도 그동안 상처 받지 않는 것이 어디 있었을라고 오늘은 요양등급을 결정하는 심사관이 왔다 애들이 뭐든지 물어보면 '모른다' 하라 한다 '길을 잃으며 어떻게 하지요'하고 묻기에 파출소로 가지요 했다 이번에도 등급 받기는 틀린 모양이다 난 그곳에 가기 싫다 남편과 지낼 수 있어 천만다행이다 노을이 아름답다 내 기억력처럼 저물어간다
최태랑 시인 / 하현달
으스름 달빛 옷깃을 여밀 정도로 추운 날 어린 나를 두고 새로운 둥지로 날아간 어미를 찾아 초롱초롱 밤길을 걸어갔다 어디쯤일까 주머니 속 설렘을 만지작 거리던 예닐곱 나 어린것 꼬막손 녹여 줄 어미 그리워 망설임을 밟고 가던 밤길 문지방 앞에서 차마 기척 못하고 하현달만 등에 지고 돌아왔다 구순이 넘은 어미 요양원 서쪽 창가에 누워 아들인 듯 하현달만 쳐다보고 있다
ㅡ시집 『도시로 간 낙타』에서
최태랑 시인 / 초록 바람
아침이면 나는 나에게 인사한다 사랑하는 당신 오늘도 웃음이 많은 날 되세요 봄은 자꾸 먼 길 떠나려 합니다 잡으려 하지 마세요 보랏빛 초롱꽃 보듯 하세요 오늘은 버럭은 집에 두고 가세요 울컥도 내려놓고요 입은 다물고 손 먼저 내미세요 앞니 빠진 구두는 벗어 두고 새 신발로 마음 밭을 걸어 보세요 상대에게 베풀기 전 자기에게 친절하세요 몸에서 초록 바람 일게 젊게 사세요 태양에 맞짱 뜰 생각은 갖지 마세요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세요 하루 하루 나를 위한 셀프 오늘이 모여 미래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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