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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자 시인 / 심장을 남겨둔 이유
어수룩이 생이라도 쥐어준 게 있을 텐데 무얼 또 망친 건지 갈수록 허우룩하다
삼천 살 미라들 앞에 숙여 보니 더더욱
일찍 놓친 사랑이란 일생의 봉서일까 남았지 엉겨보던 끝사랑도 희미하고
늑골이 시릿해지는 저녁도 시드는 녘
맨 나중 심장으로 마지막에 재는 것이* 아직도 기다리는 사랑의 무게라면
한생이 서운타 해도 죄를 더 섬겨보리
*망자의 내장 파내고 남긴 심장을 깃털과 재는데, 심장이 더 무거우면 유죄판결을 내렸다는 고대이집트 신화에서 빌려옴.
-《문학저널》 2023. 가을호
정수자 시인 / 구름의 남쪽
운남(雲南)을 불러보네, 구름의 먼 남쪽을 하루에도 몇 번씩 양떼를 풀고 섰다 하늘로 소풍 보내는 전설 같은 설산을
그 허리께 아슬히 찬 차마고도 안섶엔 말처럼 늙는 마방들 귀의를 노래 삼아 구름 속 하늘 마을로 햇차를 나른다고
설산의 차운 물로 더운 밥을 짓다가도 바람의 푸른 입술로 찻잎을 키우다가도 수시로 무릎을 꿇고 구름의 말을 헨다고
하여 양떼들이 빙하로 다시 내릴 제면 머리를 묻고 서서 구름이 되는 흰 마을 설산도 고조곤히 조는 그리워라 샹그리라
정수자 시인 / 여행의 표정
길든 짧든 여행에는 마지막 밤이 온다
적당히 가누어온 패키지의 표정을
조금씩 펼쳤다 접는 마감의 수순처럼
헤어지기 직전에는 감상 어린 잔을 들고
마음 더 꺼내고 서로 더 부딪지만
쿨하게 몰라서 좋을 패키지니 아무려나
지울 거 빤히 아는 단체사진 한 방 찍고
모르면서 친한 척 손 흔들고 돌아서며
서름히 여행을 익혔다 여름의 끝물모양
-《시조21》2022. 겨울호
정수자 시인 / 비문
뭔가 자꾸 날아다녀 어지러워 툴툴대다 우린 딱 알아봤다 어슷비슷 비문임을
때 없이 문 문 더듬는 쓰린 아린 문하임을
홑눈을 겹눈처럼 혹或 혹惑 매어단 채 문전에 어릿어릿 충혈로 바치건만
날라는 문은 못 날고 날벌레만 나는 나날
비문증 쫓아내려 안과 좀 찾다 보니 도수 높은 권속들은 그냥 끼고 산다고
그마저 문의 일속이려니 비문들과 무문 춤을
정수자 시인 / 통로에서*통로 찾기
통로가 곧 미로 같은 초대형 꿈의 마트 일용할 욕망으로 치솟는 칸칸마다 오늘의 전시를 향해 전열을 가다듬는다
동(東)에서 서(西)로 동서분주 통독을 여며가는 냉동과 적정온도 도나우의 왈츠에도 오로지 속바람일랑은 통로들의 계약 연장
기한 지난 소시지를 몰래 모여 뜯던 밤은 때마침 크리스마스,욱여넣고 헤졌지만 바깥도 또 다른 통로라 눈보라만 눈부셨다
트럭 몰다 지게차도 겨우 모는 동독 통로 물품 묶는 노끈으로 제 목을 묶고서야 비로소 빠져 나갔다,가없는 생의 통로를
*동독 출신 토머스 스터버 감독의 영화〈인 디 아일 In The Aisles〉 ―시집 『파도의 일과』 걷는사람, 2022.
정수자 시인 / 詩편
남편이든 여편이든 편 없이 저물다 보니
난 그저 힘없는 詩편이나 들고 싶데
실없이 맥이 빠질 때 기대어 좀 울어 보게
한편 같던 시마을도 편이 넘치는 이즘은
바람 뒤나 따르다 혼자 우는 풍경처럼
폐사지 적시러 다니는 그늘편에 들었네만
편이 딱히 없는 것도 고금(孤衾)의 인동이라
벌건 밤 바쳐 봐야 내쳐지기 일쑤지만
아직은 더 사무치려네 애면글면 詩편에나
정수자 시인 / 바람이 바람을 고이듯
화성을 끼고 걷다 귀를 가만 모아 서면
흰옷들 울력 같은 먼 이명이 뜨겁다
으랏차 바위를 떠내고 귀 맞추던 함성들이
실려 온 돌돠 돌이 살피를 꼬옥 맞출 때
소름 찬 살갗들도 새 식구로 들여 잡고
두고 온 저녁연기처럼 새록새록 저멌거니
축성 따라 안과 밖을 들고 난 사람들도
떠온 돌들처럼 새 터 안고 비볐으리
바람이 바람을 고여 생의 무늬를 기르듯
-수원화성 테마 시집 《물고을 꽃성》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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