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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문창갑 시인 / 사진 속의 어머니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18.
문창갑 시인 / 사진 속의 어머니

문창갑 시인 / 사진 속의 어머니

 

 

자식에 관한 일이라면 어머니에겐

저승과 이승의 경계가 없습니다

 

한 자루 시름 지고 돌아온

이승의 자식 놈 밥 안 먹고 그냥 잘까봐

어머니 또한 사진 속을 나오셔서

딸그락딸그락 저녁상 차리십니다

 

나 오늘도 씩씩하게 밥 먹고 자야 합니다

우리 어머니 웃고 가시게요

 


 

문창갑 시인 / 늦게 온 사람

 

 

잔치는 진즉 파했는데

정적만 남았는데

놀이패 그 사람

이제사 잔칫집 문 두드리네

 

참 안됐네

구만리 길 물어물어 왔다는데……

 

잔칫집 마당에서

한판 신명 나게 놀아보자고 함께 온

태평소와 꽹과리

 

봇짐 속

풀죽은 악기들도 참 안됐네

 

늦게 와서

그냥 가는 허허한 길

 

아득하여라,

저녁 어스름이 끌고 가는

유랑

 

 


 

 

문창갑 시인 / 저 여인네의 지아비도 아니면서

 

 

꽃눈깨비가 소월의 시처럼 내리는 벚꽃길을 걷다가

우연히 들었네.

휠체어를 타고 온 마흔넷, 마흔다섯쯤의 고요한 여인네가

허공에 띄워 올린 비눗방울 말을.

 

-여보, 나 내년에도 이 꽃들 볼 수 있을까?

없겠지?

길어야 오 개월이라는데…….

 

나는

이승의 이 아린 한때를 그냥 지나가야 하는 사람

속울음을 삼키며 극진히 휠체어를 밀고 가는

저 여인네의 지아비도 아니면서

 

홀연히,

우뚝 서서,

서러워진 내가 말했네.

 

볼 수 있지!

내년 봄에도, 후년 봄에도 당신은 이 꽃들 볼 수 있지!

암, 볼 수 있지!

 

 


 

 

문창갑 시인 / 약전略傳

 

 

소읍 터미널 뒤 공중화장실

 

옆 칸에서 누가 울음을 누고 있더라

 

얼마나 오래 참은 울음인지

 

얼마나 많이 삼킨 울음인지

 

길게,

 

섬진강 물길만큼 길게 누고 있더라

 

 


 

 

문창갑 시인 / 어머니 또 사진 밖으로 나오셔서

 

 

참다 참다

어머니 또 사진 밖 이승으로 나오셔서

매운 말 주셨다

 

헌 옷 하나 밥상 삼아 깔아놓고 저녁밥 먹는 어스름한 나에게

제발, 제대로 된 밥상 앞에 앉아 밥 먹는 자식 놈이 되라고

 

밥상도 밥상이지만

짐승 새끼도 아닌데 왜 양푼에다 밥을 담아 먹냐고

그건 밥을 모욕하는 못된 버릇이니

제발, 번듯한 밥그릇에 밥을 담아 먹는 문명인이 되라고

 

내 두 손을 잡고 또 간곡하게 말씀 주셨다

 

밥과 반찬은 먼저 간 것들의 몸

제발, 밥 먹는 사람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지 가끔은

골똘해지는 그런 인간이 되라고

 

어찌 거역하랴

 

어머니 가시고 나 이제

밥상에 밥을 올려놓고 먹는 자식 놈이 되었다

귀티 물씬한 밥그릇에 밥을 담아 먹는 문명인이 되었다

밥 먹기 전, 밥상 앞에서

제법 오래 골똘해지는 사람 새끼가 되었다

 

 


 

 

문창갑 시인 / 코뿔소

 

 

지아비의 유품을 수습하러

여자는 공사장에 왔다

무너진 여자에게 건네진 유품은

 

두어 벌 작업복을 삼키고

한껏 헛배 부른 비닐 가방 하나,

그리고 끝까지 주인 섬겼던

피 묻은 운동화 한 켤레

 

붉은 해는 기억하고 있다

 

여자의 울음에 안겨

유품이 가는,

어둑발에 지워지는 무명(無名)의 저 길은

 

씩씩 더운 입김 뿜어내며

힘센 코뿔소 오가던 길이었음을

 

-시집 『코뿔소』,문학의전당, 2011년

 

 


 

 

문창갑 시인 / 새장 문을 열었다

 

 

아이가 새장을 들고 왔다

새장에서 우는 소리가 난다는 것이다

새는 원래 우는 거라고, 잘 울어야 좋은 새라고

무덤덤하게 내가 말하니

원래 우는 소리 말고 진짜 우는 소리가 들린다고

발을 동동 구른다

이런,

아홉 살 어린것이 너무 일찍 듣고 말았구나

허공으로의 비행이 불허된, 자그마한 영혼들이 쏟아내는

감옥 안 애끊는 통곡을

새장 앞에 한참을 웅숭그리고 앉아 있던 아이가

사뭇 진지해진 얼굴로 나에게 묻는다

새장은 무엇이냐고

아직은 동화의 나라에서 깔깔깔 뛰어놀아야 할

아이에게 누가 자꾸 어려운 시험문제를 내주는 것일까

왜 아이의 동화책들을 이리 일찍 거두어 가는 것일까

점점 슬픈 몸이 되는 아이에게

점점 아픈 몸이 되는 아이에게

무얼 더 숨기겠는가

아이의 눈동자가 더 어두워지기 전에

우리의 죄목을 조목조목 짚어주며 다 알려주었다

이 감옥을 만든 사람은 너와 나라는 걸

감옥 안의 우는 소리도 너와 나 때문이라는 걸

네가 듣는 우는 소리를

어서 저 공중 마을로 되돌려 보내야 한다는 걸

환한 곳, 초록 들판에 온 아이와 나

살그미 새장 문을 열었다

허공이 울컥울컥 출렁거렸다

깜짝 놀란 산 하나가 푸드덕 날아올랐다

 

-<시산맥> 2020년 겨울호

 

 


 

문창갑 시인

1956년 서울 출생. 1989년 월간 《문학정신》으로 등단. 시집 <깊은 밤 홀로 깨어> <빈집 하나 등에 지고> <깊은 밤 홀로 깨어> <코뿔소> 등. 《작가연대》편집위원. 한국작가회의 회원. 한국시인협회 회원. 겨레문화연구회 회장. 『작가연대』 편집인. 토우문화관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