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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창갑 시인 / 사진 속의 어머니
자식에 관한 일이라면 어머니에겐 저승과 이승의 경계가 없습니다
한 자루 시름 지고 돌아온 이승의 자식 놈 밥 안 먹고 그냥 잘까봐 어머니 또한 사진 속을 나오셔서 딸그락딸그락 저녁상 차리십니다
나 오늘도 씩씩하게 밥 먹고 자야 합니다 우리 어머니 웃고 가시게요
문창갑 시인 / 늦게 온 사람
잔치는 진즉 파했는데 정적만 남았는데 놀이패 그 사람 이제사 잔칫집 문 두드리네
참 안됐네 구만리 길 물어물어 왔다는데……
잔칫집 마당에서 한판 신명 나게 놀아보자고 함께 온 태평소와 꽹과리
봇짐 속 풀죽은 악기들도 참 안됐네
늦게 와서 그냥 가는 허허한 길
아득하여라, 저녁 어스름이 끌고 가는 먼 유랑
문창갑 시인 / 저 여인네의 지아비도 아니면서
꽃눈깨비가 소월의 시처럼 내리는 벚꽃길을 걷다가 우연히 들었네. 휠체어를 타고 온 마흔넷, 마흔다섯쯤의 고요한 여인네가 허공에 띄워 올린 비눗방울 말을.
-여보, 나 내년에도 이 꽃들 볼 수 있을까? 없겠지? 길어야 오 개월이라는데…….
나는 이승의 이 아린 한때를 그냥 지나가야 하는 사람 속울음을 삼키며 극진히 휠체어를 밀고 가는 저 여인네의 지아비도 아니면서
홀연히, 우뚝 서서, 서러워진 내가 말했네.
볼 수 있지! 내년 봄에도, 후년 봄에도 당신은 이 꽃들 볼 수 있지! 암, 볼 수 있지!
문창갑 시인 / 약전略傳
소읍 터미널 뒤 공중화장실
옆 칸에서 누가 울음을 누고 있더라
얼마나 오래 참은 울음인지
얼마나 많이 삼킨 울음인지
길게,
섬진강 물길만큼 길게 누고 있더라
문창갑 시인 / 어머니 또 사진 밖으로 나오셔서
참다 참다 어머니 또 사진 밖 이승으로 나오셔서 매운 말 주셨다
헌 옷 하나 밥상 삼아 깔아놓고 저녁밥 먹는 어스름한 나에게 제발, 제대로 된 밥상 앞에 앉아 밥 먹는 자식 놈이 되라고
밥상도 밥상이지만 짐승 새끼도 아닌데 왜 양푼에다 밥을 담아 먹냐고 그건 밥을 모욕하는 못된 버릇이니 제발, 번듯한 밥그릇에 밥을 담아 먹는 문명인이 되라고
내 두 손을 잡고 또 간곡하게 말씀 주셨다
밥과 반찬은 먼저 간 것들의 몸 제발, 밥 먹는 사람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지 가끔은 골똘해지는 그런 인간이 되라고
어찌 거역하랴
어머니 가시고 나 이제 밥상에 밥을 올려놓고 먹는 자식 놈이 되었다 귀티 물씬한 밥그릇에 밥을 담아 먹는 문명인이 되었다 밥 먹기 전, 밥상 앞에서 제법 오래 골똘해지는 사람 새끼가 되었다
문창갑 시인 / 코뿔소
지아비의 유품을 수습하러 여자는 공사장에 왔다 무너진 여자에게 건네진 유품은
두어 벌 작업복을 삼키고 한껏 헛배 부른 비닐 가방 하나, 그리고 끝까지 주인 섬겼던 피 묻은 운동화 한 켤레
붉은 해는 기억하고 있다
여자의 울음에 안겨 유품이 가는, 어둑발에 지워지는 무명(無名)의 저 길은
씩씩 더운 입김 뿜어내며 힘센 코뿔소 오가던 길이었음을
-시집 『코뿔소』,문학의전당, 2011년
문창갑 시인 / 새장 문을 열었다
아이가 새장을 들고 왔다 새장에서 우는 소리가 난다는 것이다 새는 원래 우는 거라고, 잘 울어야 좋은 새라고 무덤덤하게 내가 말하니 원래 우는 소리 말고 진짜 우는 소리가 들린다고 발을 동동 구른다 이런, 아홉 살 어린것이 너무 일찍 듣고 말았구나 허공으로의 비행이 불허된, 자그마한 영혼들이 쏟아내는 감옥 안 애끊는 통곡을 새장 앞에 한참을 웅숭그리고 앉아 있던 아이가 사뭇 진지해진 얼굴로 나에게 묻는다 새장은 무엇이냐고 아직은 동화의 나라에서 깔깔깔 뛰어놀아야 할 아이에게 누가 자꾸 어려운 시험문제를 내주는 것일까 왜 아이의 동화책들을 이리 일찍 거두어 가는 것일까 점점 슬픈 몸이 되는 아이에게 점점 아픈 몸이 되는 아이에게 무얼 더 숨기겠는가 아이의 눈동자가 더 어두워지기 전에 우리의 죄목을 조목조목 짚어주며 다 알려주었다 이 감옥을 만든 사람은 너와 나라는 걸 감옥 안의 우는 소리도 너와 나 때문이라는 걸 네가 듣는 우는 소리를 어서 저 공중 마을로 되돌려 보내야 한다는 걸 환한 곳, 초록 들판에 온 아이와 나 살그미 새장 문을 열었다 허공이 울컥울컥 출렁거렸다 깜짝 놀란 산 하나가 푸드덕 날아올랐다
-<시산맥> 2020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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