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서윤후 시인 / 해안류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18.
서윤후 시인 / 해안류

서윤후 시인 / 해안류

 

 

바다에 문짝을 던지고 나는 기다렸다

누군가 문 열고 나오리라 믿으며

 

문이 사라진 방에선 어둠이 처음으로 기어 나왔다

보행법을 잊은 너의 양부모가 언제 보챌지 모르니

바깥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데려가

 

그렇게 우리는 바다에서 재회했다

 

발길질이 심해서 입덧도 몰랐는데

걷는 것을 참 좋아했어요

과거형의 미래를 자주 산책하던 아이는

저녁 먹을 시간에 돌아올 것이다

깍아놓은 사과를 먼저 드세요 찌개는 그만 데우세요

 

바다에 던진 문을 두드릴까 노크를 듣기 위해서

파도보다 더 먼저 일렁였다

장대비가 등에 꽂히더라도 소라게가 귓속에 득실거려도

한번 엎드린 사람은 도통 깨어나지 않아

 

반복이 필요했다

반복도 살의를 느끼는 생활은 이따금씩

 

바다가 지워가는 문을 잊게 만들었다

다행스러운 생각들이 옷핀처럼 열릴 때마다

어딘가를 쿡 찌르고

아이는 없는 사이 저녁 먹고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갔다

물속에서도 연습이 필요하다고

 

저 문 뒤에 등을 기대고 서 있는 자가 있다

던질 문이 없다 모두 창문을 내렸기에

빛은 새어 나올 틈 없다

이 시가 이렇게 끝나는 것은 아니다

저 문의 손잡이를 잡아본 사람들만이

시간의 헛바퀴에 대해 마저 이야기할 것이다

 

너는 도대체 무엇을 기다리니?

너의 양부모는 내게 말을 건다 나는 어둠을 닮았지만

결코 어둠은 아니에요 친절하게 굴지 마세요

 

그 말은 삼키고 바람이 불면 날아다니는

가벼운 돌 되고 싶어요

저 문을 두드릴 수 있을 만큼만

심장 구슬과 어울려 놀 수 있을 정도로만

 

창문을 빼꼼히 열어 얼굴을 들이미는 사람

내가 보여? 우리 서로의 거울이 되자

깨지지 않게 조심히 놀자

자 이제 문 열어줄게

 


 

서윤후 시인 / 공범

 

 

뜸해져요 우리

갈 길이 먼 사람들처럼 서로를 등한시해요

 

우리 잠시만 위로를 멈춰요 당신이 물을 길어오기 전에

나는 땅굴을 파놓겠어요

검은 머리의 짐승이 울면 누군가는 목을 축인 것이고

숨어 있어요 잠시만 나타나지 말아요

 

석고상의 흰 눈알을 만지는 기분으로

마치 비밀의 부연 설명처럼 살고 있진 않았는지

부축을 그만하기로 해요

넘어지는 쪽에서 일어나는 법을 배우진 말아요

누가 나타날 것 같다는 기대를 저버려요

 

멀리 가려는 당신의 마음을 볼 수 있어요 투시력 같은 건

믿음과 의심이 사랑할 때 생기는 능력이지요

두고 가는 것과 버리는 것이 다르듯

우리 서로의 나머지는 되지 말아요

더하고 뺄 것 없이 속삭여요

 

유행을 벗어난 거리에 걸려 있는 중절모처럼 당신은 쓰게

되는 날이 올 것 같지만

대머리만이 대머리의 기분을 이해해요

 

감출수록 돋아나는 우리는

모든 걸 멈추고 잠깐만 창피해져요

지금은 빨강이 필요하니까

 

우리는 과녀 앞에 쏟아져버린 화살이 되어

부러지더라도

희미해지지 말자는 약속을 해요

서로의 가장 빨간 부분을 겨누면서

멀리 가려는 뒷모습에

잘 가지 말라고 말하는

오늘은 당신이

내게 참 잘 어울리는 날이었어요

 

 


 

 

서윤후 시인 / 그다지 슬프지 않은

 

 

들판이 몸살을 앓으면 불도 잘 붙지 않더군요

방화범의 변명을 떠올리는 밤

 

밤에 도착해서 아침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

손님을 깨워 내보내기 전에

나의 근사한 요리를 대접하는 것

 

품위는 지켰지만 어딘가 일그러지는

얼굴을 헹구는 세수

머나먼 길을 가는 사람일수록 대충 씻더군요

손님이 내게 해주신 말씀

 

굴뚝 속에서는 빛을 의심하는 직업을 갖는다

한 사람을 낳은 이불을 마당에 털고

한 사람이 빠져나간 주름을 가늠한다

다 빠져나가는 신비로움을

 

들이닥친 비에게 내줄 수 있는 방은

나의 폭풍우뿐

더 크고 웅장하게 범람할 수 있도록

꺼내어 보여줄 수 있는 누추한 태풍의 눈이 있어

휘몰아칠 적에도 볼 수 있는 것

내가 한 번 더 사랑한 것들

 

다시 손님을 기다리는 밤

나는 가장 다정한 환영 인사를 고르다가

들판에 불이 붙은 것을 본다

점점 밝아오는 어둠의 줄행랑을 본다

아마도 나는 그렇게 찾아온 첫 손님이었지

 

 


 

 

서윤후 시인 / 괴도

 

 

저 고개 숙인 자의 표정을 알고 싶다

코를 땅에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어떤 찡그림을 발명했는지

 

그 찡그림을 펼치기 위해서 누군가는

반드시 떠나야 한다

마른 헝겊으로 안경을 닦을 때

초조하게 뒤돌아 볼 때

앞은 잠시 앗아갈 것이 많아지는 세계

 

새장은 모란 앵무를 찾으러 떠났다.

흔들의자가 돌아오지 않았던 것처럼

그림자만 남겨지는 실내악

 

예열된 오븐 밑을 기어가는 벌레를 볼 때

밤새 얼마나 번성하게 될 것인지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로 시작하거나

이젠 얼마 없는 이야기

 

고개르 들면 모자라게 된다

뜨개질처럼 멀고 먼 생활의 과로사를 시작하게 된다

어딘가 다친 모과들을 닮아

향기를 먼저 내밀게 된다

그렇게 시작하는 것을 그만둘 수 없게 된다

 

고개 숙인 자가 거느리는 밤 속에서

감긴 눈을 일으킬 슬픔이 필요하므로

어제와 내일을 교환하는 오늘을 살게 되고

 

고개 숙인 자리로 벌레들이

실눈을 그으며 떠났다가 뒤집혀 죽는 일로 돌아온다

 

찡그린 자의 얼굴을 베껴 간 벌레의 배가

이 밤에 가장 환하다

 

*프란츠 카프카의 분장을 변형

 

 


 

 

서윤후 시인 / 피오르드의 연인

 

 

아름다운 것을 그대로 두는 것이 어려웠다

 

개와 물푸레나무 울타리와 트랙터 발작과 키스.......

하염없는 것들의 견고한 사랑으로 이루어졌으니

종종 당신의 예외가 되고 싶었던 모양

 

고전 속 은유들로 설명되지 않는 것이다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은, 내일이 무표정으로 찾아오는 것은

당신의 단골손님처럼 살아간다는 것

불 끄면 푸줏간은 이토록 무서운 곳인데,

물컹 꼬리를 밟고 우는 것도 정작 나뿐인 곳에서

위험한 쪽을 내다보지 않는 우리의 아늑함을

애태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당신의 서재에서 돌아오지 않는 당신을 기다리다

내가 숨길 것이 더 많아지는 일처럼

 

당신을 사랑한 이들이 두고 간 수많은 편지는

미응답 속에서 각자 품어온 열매를 베어 풀게 했다

나는 나만 겨우 매달 수 있는 텅 빈 나무를 기르느라

겨울에게 잠시 체온을 빚졌고

 

이웃의 다툼마저 살가워 보일 때

나는 누가 수선 맡긴 사람입니까?

찻잔도 그릇도 아닌 나는 어디가 바닥입니까?

당신을 닮은 겨울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어디에도 기울지 못한 꿈은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쫓아오는 것은 모두 파편이었으므로

그게 나의 어디를 찌르게 될지 잘 알고 있었으므로

 

눈을 뜨면 처음 만지는 게

당신의 얼굴이었다

 

 


 

 

서윤후 시인 / 미도착

 

 

양생 중인 바닥을 갖고 싶다

지금은 도착에 대해 생각 중이니까

 

기다리는 동안 어떤 무지가 될래?

약속에 늦는 사람은 내 기다림을 완성시킬 수 있다

이것은 불시착일 수도 있고

게워낼 수 없는 주소일 수도 있다면

 

천장을 하늘이라 여길 만큼

어둡고 깊은 곳에 나는 먼저 와 있었다

매일 시동 거는 꿈을 꾸고

매일 난분분한 바닥을 짐작했으며

떨어지는 법을 배운 적 없이 추락을 쌓고

 

들이닥친 빛 한 줌이

내가 누비던 바닥을 훤히 비웠을 땐

내 손바닥 자국을 누더기로 쓴

악인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 아니라서

먼저 갈게, 말하고 여태껏 기다리게 된 진동하는 심장

 

나는 몇 시간째 양생 중인 바닥을 보고 있다

우리 산업의 도착은 콘크리트 재질

끝없는 나락 속에도

콘크리트 입장을 앞둔 사랑의 반죽이 있고

누가 나를 낳았던 깊은 지하에도

휘갈긴 우중충한 사랑이었고

 

그 후로 나는 도착하지 않는 생각이다

 

흐르러진 벚나무 보며 걷다가

양생 중인 바닥에 발을 푹 담그고는

신발 밑창을 다시 콘크리트 바닥에 긁으며 나아가는

사람의 운세가 되고 싶다

약속에 늦게 나타난 사람에게 이런 이야길 하자

자꾸 머리를 조아리며 미안하다고 말하고

그가 나를 근처 스키야끼집이나 우동집에 데려가면

나는 양생 중인 바닥을 잊고 만다

그건 내가 지워지는 재료로 만들어졌다는 뜻

 

아무도 도착할 수 없는 바닥이 될래?

식당 앞에는 끝없는 줄이

끝없게도

 

 


 

 

서윤후 시인 / 내가 되지 않을 것들

 

 

높은 곳에서 떨어졌거나 바닥을 구슬프게 흐리고도

멀쩡한 것들

 

내가 되지 않으려고 안간힘 쓰는

주워 담을 수 없는 것들

 

사람을 용서하는 일이

사람을 고치는 일과 만드는 일 사이에서

 

기도가 엇나가는

신의 겨드랑이 뒤에서 어린양 부리는 것들

두서없는 꿈의 멀미를 앓는 것들

 

표본과 다른 독개구리들

제 안에서 독을 터뜨려 만질 수도

가질 수도 없이 꽉 물었던 이름을 놓아버린 것들

매번 진심이었던 생일 다음날처럼

 

허겁지겁 먹었던 사람의 눈빛이

사과나무 밑에서 배앓이하는

뒤틀린 틈으로 마구 솟구치는 송충이들

하하하 갉아먹히는 오래된 농담들

 

실없이 저물었다가 돌아오지 않는

옛사랑에 꽂아둔 실핀들

결코 흘러내리지 않을 것들

 

내가 매달려도 내가 될 수 없는

공중의 손잡이들

손님 없이 시동 거는 버스 안에

 

내가 되진 않고

나를 기다리기만 하는 옆자리들

 

 


 

서윤후 시인

1990년 전북 정읍 출생.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9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어느 누구의 모든 동생』 『휴가저택』 『소소소小小小』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산문집 『방과 후 지구』 『그만두길 잘한 것들의 목록』 등. 현재 잡지사에서 에디터로 근무. 제19회 박인환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