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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인채 시인 / 가문비 돛대
우듬지로 바람을 끌어 모으는 가문비나무 숲이 일렁이고 바람은 회오리로 몸을 바꾼다 높이 돛을 세우고 숲은 어디로 가자는 것일까 된바람에 한바탕 파도가 치고 돛대는 일제히 서쪽으로 휘어진다
산등성이에 정박한 지 수십 년, 가문비선장은 비밀지도 한 장을 품고 길을 탐색중이다 수없이 하늘길을 더듬던 가문비나무 몇 그루나 바다의 돛대가 되어 바람을 다루며 살아남았을까
등뼈가 휘어지는 돛대 그 아래 키 작은 나무들이 떨고 있다 저기 보이지 않는 암초가 있는 것일까 가문비나무가 선봉에 서서 부추기지만 여전히 숲은 발이 묶여 있다
갈수록 바람은 사나워지고 가문비선장은 늙어간다 언제쯤 닻줄을 풀고 출항할 것인가
필시 이 지루한 항해의 끝은 바람이 부러지거나, 돛대가 부러지거나,
류인채 시인 / 돌의 날개
남한강 물속에서 주워 온 돌 하나를 손바닥에 올려놓았습니다 남한강이 돌처럼 둥글게 돌아나갑니다 얽히고설킨물의 살이 돌 속을 굴러갑니다
어린 날 강가에 서면 습관처럼 물수제비를 뜨곤 했습니다 지느러미처럼 돋아나던 돌의 날개들 암벽에 살고 있던 내용 모를 벽화들이 물의 접면에 배를 대고 날아가는 소리 들렸습니다
새의 조상은 어디에 날개를 묻었을까요 묶인 날개들이 풀리는 순간 어떤 힘이 돌을 날게 한 것일까요
돌들의 나이가 궁금했습니다 그러니까 물수제비는 그 유선형의 시간을 수평선 너머로 던져보는 일
날아가는 돌의 발소리에 물새들이 날개를 파닥입니다 부메랑처럼 머지않아 추락할 날개를 달고 돌은 힘껏 날아갑니다
지금은 돌팔매를 견뎌야 하는 시간 짐승의 부리를 꺼내 바람보다 앞서 날아야 할 시간
류인채 시인 / 거북
전동차 문이 닫히는 순간 덜컹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목과 두 팔이 문틈에 끼었다 성급히 빠져나간 두 다리만 문밖에서 버둥거린다 그러나 폐지 자루를 움켜쥔 손은 완강하다 손등에 적힌 갑골문자가 그가 헤맨 도시의 길들을 보여주고 있다
움켜쥔 자루는 꿈쩍도 않고 門이 큰칼*이 되어 깡마른 노인의 목을 겨누고 있다
절룩이며 거둔 따끈한 뉴스들 아무렇게나 접힌 아침이 너무 육중하다 방금 전까지 선반을 더듬던 손은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고 쫓기듯 두리번거리던 눈빛은 단도처럼 자루에 꽂혀 있다
안도 밖도 아닌 그 노인 눈만 끔벅거린다 이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여러 번 당해본 일이라는 듯 뜻밖에 덤덤하다
쇠골이 산맥처럼 뚜렷하다 찰나에 백 년이 지나간다
잠시 후 방송이 나오고 잠깐 문이 열리고 그는 늘어진 목을 천천히 제자리로 거두어들였다
*중죄인의 목에 씌우던 형구.
류인채 시인 / 시詩
첫돌도 되기 전 외할머니 잠실에서 포도씨 같은 누에 똥 깔아뭉개다가 나 막잠 잔 누에를 집어 질겅 씹었다는데 그때 꿈틀거리는 명주 뭉치를 나 꿀꺽 삼켰다는데 막 허물 벗고 투명했을 그놈이 지금까지 내 속에서 고치를 짓고 있는지 목구멍으로 자꾸만 울컥 치미는 명주실 그 씨줄 날줄을 엮어 나 끊임없이 깁을 짜는데 양단 숙고사 갑사는 아니지만 나 오늘도 시 한 문장으로 길쌈 중이다
류인채 시인 / 펑펑 복사꽃
그 여자, 거실 안에 개집을 들여놓고 풍산개 몽이를 가뒀다 몽이가 노산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혼자 사는 그녀의 말 며칠 전부터 몽이는 바깥을 향해 꼬리를 쳤다 유리문 밖에 선 잡견 덕구도 안절부절 두 놈이 주고받는 눈빛에 마당 가 앵두나무 후끈 달아올랐다 해반죽 복사꽃도 저만치서 눈을 흘긴다 그녀가 문을 살짝 여는 순간 잽싸게 뛰어나간 몽이 시클라멘 사기 화분이 박살 나고 제라늄 로즈버드가 계단에 흩어졌다 다리가 여섯 몸이 하나인 연리지 밭두렁이 들썩들썩 냉이 꽃다지 자운영이 화끈화끈 돌멩이가 구르고 바람이 비껴가고 담벼락은 고개를 숙이고 봄 물결 찰랑대는 개울가 버드나무 젖꼭지 흐벅지고 펑펑 복사꽃 터진다
류인채 시인 / 자목련
푸른 하늘 아래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조심조심 자주색 겉봉을 엽니다. 일 년에 한 번씩 보내주시는 친필, 읽고 또 읽느라 봄날이 짧기만 합니다.
불면의 계절이 길었기에 추위를 건너온 소식이 귀합니다. 돌아가셨다는 말이 믿기지 않을 만큼 따습던 당신의 살갗을 애만지듯 행간을 쓰다듬어봅니다.
고향 집 마당가 어린 딸이 늘어진 목련 가지를 잡고 있으면 아버지가 땅에 휘묻이하여 마구마구 번지던 꽃자주 인자한 미소가 푸근하게 피었습니다.
그러나 임종을 못 지킨 설움처럼 다시 참담의 늪에 가라앉을 것만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당신의 크나큰 유산은 꽃을 가꾸는 마음, 인내로 벙그는 꽃봉오리의 믿음,
절정에서 꽃잎 같은 것들 툭 툭 내려놓을 줄 알아야 새잎으로 사뿐 날아오를 영혼입니다.
류인채 시인 / 내게도 눈부신 날개가 있다
지하차도로 막 들어서는데 집채만 한 트레일러가 금지된 실선을 넘어 내게로 달려들었다 다급한 손발이 경적을 울리고 액셀을 밟는다
어떤 미친 속도가 나를 짓밟고 벽 쪽으로 밀어 뭉갠다 외마디 비명이 차체와 얽혀 찌그러진다 나는 마지막 한 방울까지 기름을 짜낸 깻묵, 쏟아지는 피를 받아 마시는 허기진 혓바닥
누군가 급히 검은 보자기를 들고 내게로 달려들어 마지막 비명과 얼굴과 이름을 덮어씌운다 웅성거림 속에서 어머니가 보를 들추다가 쓰러지신다 통곡이 터널 속을 왕왕 울린다 터널의 아가리가 급히 확대된다
아! 외마디에 금빛 날개 한 쌍이 활짝 펼쳐져 나를 들어 올린다 나는 풍뎅이처럼 날아오른다 저 아래, 차들이 어지럽게 엉키고 부딪치고, 나는 아득히 터널의 궁륭을 날아 반대편 벽에 내려앉는다 어디선가 한꺼번에 빛이 쏟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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