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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저온 시인 / 예술적인 운동장
금관악기 소리가 밤하늘로 퍼진다
금빛 호른을 불며 체육복을 입은 아이가 조회대에 서 있다
금빛 음악이 검은 운동장을 어루만진다
매일 밤 한 사람 누군가 저기 서서 악기를 분다면 좋겠다
그게 연습생이면 좋겠다
연습생답게 나는 천천히 운동장을 돈다
잘했어, 잘했는데, 잘 안 되는 부분은 백 번을 연습해 와, 알았지?
마스크를 쓴 사람이 아이를 올려보며 말한다
연습은 좋은 말이다 연습은 예술이 아니지만 연습은 예술적일 수 있다 그러니까,
내가 가는 일도 예술적으로 연습에 그칠 충분한 가능성이 있다
가능성이 툭툭 발끝에 채인다
호른은 몸을 말아 창자와 등뼈를 이루었다 예술적으로
―사화집 『시골 시인-Q』 2023. 7
문저온 시인 / 다몽(多夢) :지나치게 꿈을 많이 꿈. 영혼의 피로한 발바닥.
불면과 다몽 중에 고르라면 무엇을 선택하겠습니까? 그가 묻는다. 결핍과 과잉 중에 무엇을? 틀렸습니다. 과잉과 과잉이지요, 말하자면. 뜬 눈과 감은 눈의 차이일 뿐입니다. 필름은 돌아가지요, 밤새. 단독 관객, 단독 상영입니다. 티켓은 없어요. 발권하더라도 무작위니까요. 극중극, 옴니버스, 컬트와 호러를 넘나들지요. 밑도 끝도 없는 상상력이 추진력입니다. 더블 캐스팅은 다반사. 급할 땐 머리만 바꿔 달고 등장해요. 의식과 무의식은 끝 간 데 없이 전진하고, 그것은 둘 다 밤만이 줄 수 있는 증상입니다. 내려 닫아 잠그고 싶은 눈꺼풀이 기어이 말려 올라가는 뻑뻑한 눈알. 치켜떠서 빠져나오고 싶으나 혼몽의 늪을 허우적대는 납 같은 눈꺼풀. 그러나 오로지 나에게만 복무하죠. 그리고 오로지 두려워집니다, 결국엔. 깨어 맞닥뜨리거나 반쯤 죽어 당하거나, 나는 위태롭지요. 오로지 나는 혼자이기 때문입니다. 일전에는 목을 걸타고 앉은 검은 것에 짓눌리다 가까스로 비명을 끄집어냈지요. 그리고 내가 찾은 건 옆 사람이 아니라 냉장고에 든 찬 소주였어요. 우습지 않습니까? 나는 사람에게 기대하는 것이 없더란 말입니다. 어쩌면 선생이 치료해야 할 것은 이런 나의 방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나는 자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지요. 불면 중이건 악몽 중이건. 그런 강박은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자야 하므로, 나는 소주를 털어 넣었지요. 옆 사람은 나의 악몽으로 동행할 수 없습니다만, 소주는 내 핏속을 덥히고 나와 동행해 검은 것을 같이 맞닥뜨리겠지요. 그리고 조금은 담대해질 거라 믿는 겁니다. 그 밤에 나는 소주를 비우고, 병을 치우고, 잔을 씻었습니다. 물기를 닦고 찬장에 넣었죠. 이상하지 않습니까? 나는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았습니다. 현실에 악몽의 흔적을? 내일에 오늘의 흔적을? 옆사람에 내 불안의 흔적을? 그 모두였을 겁니다. 그리고 나는 전장으로 가는 사람처럼 술로 더워진 몸을 칼처럼 쥐고 작심하듯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자아, 선생은 불면과 다몽 중 무엇을 선택하겠습니까? 둘 중 어느 것을 내게서 치워주시겠습니까? 오지 않는 새벽과 끝나지 않는 밤. 핏발 선 눈알에 까칠한 정신과 꼬리에 꼬리를 무는 혼곤한 꿈자리 중 무엇을? 그러나 선생은 선생의 병상에서, 나는 나의 병상에서 홀로 고투할 뿐. 우리는 남의 방, 남의 나라, 남의 육신 속으로 자막 하나 던져 넣을 수 없는 짧은 팔들일 뿐입니다.
-시집 <치병소요록> 문학의전당
문저온 시인 / 두 개의 토르소가 있는 방
가슴에 손이 돋기를
악수를 하고 네 뺨을 치기를
가까이 가까이서 너를 만지기를
볼을 쓸고 목을 조르기를
다리라고 있는 건 아니지만
그러니 네가 오기를
없는 다리로 굴러오기를
없는 손발로 차렷하기를
네 가슴을 가르고 손을 꺼내기를
꺼낸 손을 가슴팍에 붙여 주기를
실수失手를 부디 만회하기를
피 묻은 악수를 하고 손을 뽑아 던지기를
- <문학과의식> 2020년 여름호
문저온 시인 / 슬픔에 코가
슬픔에 코가 빠져 그는 코를 건지려고 두 손을 슬픔에 빠뜨린다 빠진 손을 입으로 건져내려고 그는 슬픔에 얼굴을 처박고 슬픔 속 둥둥 떠다니는 코를 만난다 그는 코에게 안부를 묻는다 코가 그의 얼굴을 쓰다듬는다 그는 버둥거린다 슬픔 바깥에서 굽은 등이 두 다리가 가는 발목이 무언가를 건지려고 아니 안 건지려고 아니 슬픔의 입구가 비좁다고
문저온 시인 / 아보카도, 아보카도
농담처럼 아보카도
진지하게 아보카도
아버지를 모르는 아보카도
아버지는 모르는 아보카도
이국의 부호 같은 시푸르고 울퉁불퉁한
딴청 같은 아보카도
향이 타고 그가없자 마침내 시작되려는 이해 샘솟으려는 친절 출발하려는 대화 표류하는 혓바닥
비상구 비상벨 비상버저
어떤 것은 손대지만 않으면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버젓이 조율이시 아보카도
문저온 시인 / 요안(腰眼) : 허리 뒤쪽 양옆 우묵하게 들어간 부분. 눈을 그려 넣는 마음
가리비는 백여 개가 넘는 눈을 가졌단다. 나는 처음 알았다. 파란 알구슬 같은 눈알이 주름진 조가비 사이로 조랑조랑 달려 있었다. 가리비는 지금껏 나를 쳐다보고 있었던 거군. 물속에서 불 위에서. 그건 돌멩이에 눈이 달렸다는 말처럼 들렸다. 조개에게 눈이 없으란 법은 없다고 아무 선생도 여지를 주지 않았다. 조개는 도끼발을 내밀어 바닥을 간단다. 더듬, 더듬. 도끼발로는 악수도 생각할 수 없고, 조개는 입수공 출수공, 먹고 토한단다. 단순하고 멍청하게. 모든 선생이 그랬다. 그래서 말인데, 네 손에 눈알을 쥐어 주면 너는 그 눈을 어디다 달래? 나는 눈알을 뒤통수에 단다. 손끝에 발끝에 귓등에 단다. 쇄골과 가슴 한복판에 단다. 배꼽 아래에 단다. 나는 백여 개의 눈을 가진 가리비가 된 듯하다. 백여 방울의 눈물을 한꺼번에 흘릴 수 있을 듯하다. 어쩌면 한쪽 귀로 듣는 이명처럼 한 눈이 슬플 때 아흔아홉 개의 눈은 아흔아홉 방향, 아흔아홉 감정을 보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허리에 달린 보조개 같은 두 눈, 나는 피겨스케이팅 선수처럼 네 뒤로 돌아가 양손으로 네 허리를 잡고 팔을 뻗어 올리고 그럴 때 엄지손가락이 꾹 누른 두 눈을 얼른 손 젖혀 열어 줘야겠다고 생각한다. 생각하지만, 나는 네 등 뒤에 서 본 적이 없군. 나는 너보다 작고, 나는 등 뒤를 항상 신경 써야 하는 초식동물처럼 살았군. 기척을 느끼고 어깨를 움츠리고 심박동이 빨라지며 발끝에 힘이 들어가는, 무력한 등 뒤를 가졌군. 그런 내 허리에 두 눈이 있다는 말은 가리비에 눈이 있다는 말처럼 들렸다. 네가 내 뒤로 다가와 서던 저녁, 그지없이 안온했던 이유를 알았다. 그때 내 등은 후방을 경계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안대를 낀 것처럼 잠시 가깝고도 먼 곳을 느껴 보았을 것이다. 너의 체온이 내 허리의 두 눈을 감겨 주었을 것이다. 비로소 눈을 감아 보았을 것이다.
-『치병소요록』 (시인동네, 2020)
문저온 시인 / 김을 먹을 수가 없다
이것은 쉽게 헐고 흘러내립니다
왜 쓰여 있지 않나 이등분에 사등분 팔등분 하는 동안 무작정 흩어진다 김의 검은 먼지들
이것은 먼지의 16절지입니다
입을 벌리고 더 크게 벌리고 다 먹을 수가 없다 김을 씹어 삼킬수록 헛헛한 마음을 다 먹을 수가 없다 다 먹을 수가 없다 너는
김, 이, 박, 최, 강이어도 마찬가집니다
먼지와 싸우는 사람처럼 나는 김을 문다 묻힌다 놓친다 훔친다 차곡차곡 구멍이 뱃속에 쌓인다 김의 검은 구멍들
나는 불이 아니다 나는 물이 아니다 운다고 될 일도 아니다
-《시인동네≫ 2019,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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