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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춘근 시인 / 흑인 포로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18.
정춘근 시인 / 흑인 포로

정춘근 시인 / 흑인 포로

-정연리 이야기

 

 

“양키가 쳐들어오면

이런 깜둥이들이

사람들을 잡아 먹어요”

 

쇠사슬이 발목에 채워지고

밧줄에 두 손이 묶인

곰 같은 깜둥이 병사를

정연리 역전까지 끌고 와서

인민군 장교가 일장 연설을 했다

 

강제로 동원된 어른들은

눈만 멀뚱멀뚱 하고 있는

미군 깜둥이에게 침을 뱉고

주먹돌을 던졌지만

머리가 터진 깜둥이 피는 붉었고

흰자위가 선명한 눈에서는

맑은 눈물이 흘렀다

 

이 흑인 병사는

인민군 손에 이끌려

마을 돌림을 당했고

덜컥 겁이 난 사람들은

보따리를 싸들고

북쪽으로 피난길을 떠났다

 

미군 포사격이 시작 되던 날

인민군들이 깜둥이를

한탄강변으로 끌고 갔다는데

이후에는 본 사람이 없다

 


 

정춘근 시인 / 막대자석

 

 

 아이들이 버린 막대자석, 쇠 냄새를 귀신처럼 맡았다던 불가사리 빙의가 붙은 것 같습니다 남극 북극을 우겨넣은 막대자석, 가시철조망, 대 포, 모두 조선 쇠껍데기일 뿐, 아름다운 색채를 놔두고 남극은 파랑, 북극은 빨강, 우리들 고정관념은 색깔 논쟁을 하지 않습니다 빨강 북극이 싫어 잘라버려도 다시 나뉘는 두개의 극, 영남 호남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언듯, 막대자석의 남극 북극은 서로 싫어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처럼 다시는 상종하지 않을 원수로 착각하게 만들지만, 막대자석 두 개를 같은 극끼리 붙이면 질겁을 하고 밀어 냅니다 조선 쇠막대들도 남극 북극이 고착되는 것을 싫어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남극에다 북극을 붙이면 기다렸던 것처럼 철썩 붙습니다 극의 경계를 넘어 반갑게 와락 껴안습니다

 

 이제는 남극 북극 사람들이 두개의 막대자석처럼 만날 일만 남았습니다 정말로,

 

 


 

 

정춘근 시인 / 6時와 12時 사이

 

 

한반도는 지금 몇시인가

 

남한의 모든 총과 대포는

12시 방향에 맞추어져 있고

북한은 6시로 고정되어 있다

 

남한의 시계 바늘이

6시로 가기 위해서는

3시 방향에 미국을 지나야 하고

 

북한 시계 바늘도

9시 방향 중국을 지나야 하는

가장 멀고 아득한

12시와 6시 사이

 

다시 생각하면

우리의 분단 시차는

한나절 6시간

 

그 짧은 시간 사이로

정지된 시계를 수갑처럼 찬

두세대가 지나갔다

 

 


 

 

정춘근 시인 / 밤꽃

 

 

언덕 과수댁 밤나무

꽃향기로 온 마을을 덮는다

봉창 달빛 아래

홀로 치마끈 풀던 밤이면

살짝 문고리 풀어놓던

청상과부 한숨이

밤꽃 향기에 섞여 있겠지

살다 보면 눈웃음치는

남정네는 많아도

못난 서방처럼

밤꽃 냄새 풍기는

사내는 없었겠지

언덕 아래 파란 대문 집

홀아비 잠 못 이루는 것은

소쩍새 때문은 아니겠지

밤꽃 향기 때문도 아니겠지

가을에는 과수댁 밤나무에

쌍 밤이 주렁 주렁 열렸으면 좋겠네

 

 


 

 

정춘근 시인 / 철조망 제거법

 

 

철조망 때문에

억지로 비행기 살 필요가 없다

 

철물점에 들러

싸구려 절단기 하나

삽 한 자루 준비하면 된다

 

묵은 철조망을 절단기로

툭툭 잘라낸 뒤에

삽으로 말뚝을 캐내면 된다

 

이 짓도 번거로우면

불도저로 단박에 밀면 된다

 

그런 다음

우리들 머릿속에

철조망을 걷어내면 된다

 

-시집 『반국 노래자랑』, 푸른사상(2013)

 

 


 

 

정춘근 시인 / 뿌리

 

 

이 땅에 풀과 나무 뿌리는

사람들 핏줄로 이어져

바람 앞에서 같이 흔들리고

꽃이 피면 사람도 꽃이 된다

 

시냇물과 강물 줄기는

사람들 눈물샘으로 이어져

강이 넘치면 눈물이 솟고

시냇물이 마르면

사람들 가슴도 마른다

 

이 땅에 사는 모든 것들

뿌리는 하늘에 있어

햇빛과 달빛과 별빛 아래

꽃 피우고 열매 맺는

모두가 하늘이다

 

 


 

 

정춘근 시인 / 옥수수

 

 

사료 옥수수에

감미 넣고 삶아

찰옥수수 판매라 써 붙인

아주머니 뒤에

 

농민이 주인이라

현수막 내 걸은 조합

 

땡볕 아래

구수하게 삶아도

솥 안에 옥수수는

사료 옥수수일 뿐

 

시장 사람들만

찾아도 조합은

농민이 주인일 뿐

 

콧등에 땀 맺힌 아주머니

조합 홍보용 부채로

옥수수에 붙은 파리를 쫓는다

 

 


 

정춘근 시인

1960년 강원도 철원 출생. 1999년 <실천문학> 봄호를 통해 등단. 시집 <지뢰꽃> <수류탄 고기잡이> <북한 사투리 장시집> <반국 노래자랑> <황금기> <지뢰꽃 마을 대마리> <황해> 등. 민족문학작가협회 강원지부 이사. 현재 철원에서 시창작 및 글짓기 강사로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