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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 시인 / 벌의 별행본 이번 생은 벌 받는 기분으로 살아요 받은 벌이 목에 걸려 있어요 걱정만큼 벌어진 입속으로 벌레가 들어오고 벌과 벌은 함께 날아오를 듯 달려들어요 벌과 벌 사이에 혀가 끼어 숨이 막힐 때도 있어요 수백 벌 옷을 갈아입고 수백 번 유리 그릇에 성찬을 받치고도 누대로 이어온 이 벌을 면할 수 없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벌목장에서 죽은 큰아버지와 벌꿀을 입안 가득 물고 죽은 사촌 때문인가요 문벌도 학벌도 빈약하여 누대로 벌을 서는 핏줄들 불행의 순간은 매번 다른 얼굴로 찾아오고 아지 보지 못한 별행본을 스스로 찍어봅니다 벌어져와 나와 나의 벌리 벌이라는 말에 입이 벌어져요 무릎 꿇고 앉아 벌을 서던 복도는 너무 길고 어두워서 울음이 나왔어요 혼자 남은 시간이 무서워 내뱉던 말들이 내 혀를 짓누르고 있어요 벌은 아직 내 목에 걸려 있고 나의 벌은 하루의 뒤에 숨어요
권순 시인 / 그림자
내가 왼쪽 어깨에 해를 받으며 저수지로 갈 때 그는 허리가 잘린 채 비스듬히 뒤따라 왔다
나도그도 부지런히 걸었지만 우리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내가 발길을 돌려 오른쪽 어깨에 해를 받으며 포구로 돌아올 때 잠깐 그가 보이지 않았다 나의 정수리와 등짝이 후끈거릴 때 문득 앞서 가는 그를 보았다 자꾸 발끝에 채이는 그를 툭툭 차면서 갔다
내가 구부러진 방죽을 멀리 돌아올 때 그는 두 팔로 허공을 저으며 가고 있었다 온통 풀빛이었다
내가 땀을 닦느라 걸음을 멈추었을 때 그는 행인들 사이에 있었다 모두 아랫도리가 검었다 정수리를 지나던 해가 갯골에 박힐 때쯤 어디론가 사라지고없었다
이따금 도심 한복판에서 그를 만나는 날이 있었다
-시집 『사과밭에서 그가 온다』에서
권순 시인 / 숲으로 간 아이는
살갗이 아프다 했다 바람이 불면 유리비가 쏟아진다고 자꾸만 울던 아이
목소리만 아는 친구들을 남겨두고 비 내리는 소나무 숲으로 갔다
바람이 실눈을 감고 곁자리를 내주는 맑은 날에는 구두를 신고 한없이 걷고 싶어 했다
깡마른 다리들 제 주먹으로 두드리던 아이
유리비 쏟아지던 여름 창 안에 구부러져 있었다
새장 아래 깊은 우물이 있는 것 같다고 갇혀 지낸 시간 내내 울음소리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우믈 아래 가라앉고
아이에게 눌어붙은 골방 냄새는 이끼처럼 번졌다
메아리도 돌아올 수 없는 먼 곳으로 가고 싶어 했다 멀리 있는 새장은 모르는 것처럼
죽은 새들이 쏟아지는 꿈을 꾸었다며 자꾸 지난 말을 했다
-시집 『사과밭에서 그가 온다』 에서
권순 시인 / 숨
저 귤은 돌이 되려 한다
마르고 쪼그라들더니 작고 단단한 돌이 되고 있다 온화하던 빛깔과 새콤함은 이제 상상만으로 음미해야 한다
몇 날은 수척해지는 데 몰두했고 들고 나는 숨을 닫아버리더니 딱딱하게 굳어져 갔다 염탐하듯 눌러보는 내 손가락을 밀어냈다
저 돌은 점이 되려 한다 물체에서 극단의 한 점으로
빛깔을 놓아주고 제 속으로 파고들어 긴 고통의 끝점으로 가려 한다
침묵 같은 단단함으로 빛깔과 향기를 속에 가두고 더는 호흡하지 않는다
아주 고요한 처음이 되고 있다
권순 시인 / 당신만 신발이 없다
검은 양복의 상주가 집게로 신발을 집어 올린다 집게에 들린 신발들은 가지런히 기다리고 신발 신을 일 없는 이는 영정사진 속에 있다
죽음이 아니라도 신발 신고 나갈 수 없는 나갈 일이 없는 그런 삶을 본 적 있다
그날의 당신은 아직 젊고 아련한데 그날은 봄날처럼 환하게 피어오르고 살구꽃은 점점이 하얗게 날린다
열 살 연상의 노름꾼 재취자리였다고 딸 하나 겨우 남기고 셋이나 앞세웠다고 장독뚜껑 열다가 쓰러졌는데 그 뚜껑 닫지도 못하고 십오년이 지났다고
첫새벽에 임종하는 이 하나 없이 떠났다고 머리맡에 흰 운동화, 꼭 신어보리라 걸어보리라 날만 새면 다짐했는데
누군가 잠깐 목 놓아 울더니 신발 구겨 신고 밖으로 나간다
죽은 당신은 마냥 웃고 있고 있는데 당신의 시간은 남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맴돌고 날 밝으면 시립화장장 들렀다가 배 한 척 빌려 오롯이 떠나 보내준다고
문 앞에 신발들 나란한데 먼 길 떠나는 당신만 신발이 없다
-≪모든시≫ 2020. 봄호
권순 시인 / 호흡
저 귤은 돌이 되려한다 아니 점이 되려 한다
며칠 전부터 수분이 마르고 쪼그라들더니 작고 단단한 돌이 되고 있다 온화하던 빛깔과 새콤함은 이제 상상만으로 음미해야 한다
서로 어울려 지내며 감빛이 살아있을 때의 귤들은 너무도 안락해 보여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다른 귤들이 모두 소환되어 가고 우두커니 혼자 남은 저 귤은 혼자라는 생각조차 말라 버린 듯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달라졌다
몇 날은 수척해 지는데 몰두했고 며칠 뒤에는 들고 나는 숨을 닫아버리고 딱딱하게 굳어져 갔다 염탐하듯 눌러보는 내 손가락을 밀어 냈다
저 귤은 지금 형상을 바꾸려 하고 있다 물체에서 극단의 한 점으로
빛깔을 놓아주고 제 속으로 파고들어 긴 고통의 끝점으로 가려 한다 침묵 같은 단단함으로
가려 한다 빛깔과 향기를 속에 가두고 더는 호흡하지 않는다 아주 고요하게 작고 단단한 무엇이 되고 있다
-《모든시》 2020, 봄호
권순 시인 / 등을 보인다는 것
둑방 마래 버려진 의자가 있다 등을 보이며 언제부턴가 거기 혼자다 등을 보인다는 것은 경계하는 마음을 풀었다는 것인데 다 내려놓았다는 것인데 아무에게나 뒤를 보여도 좋다는 것인데 마주 보기만 해도 눈물이 흐른다는 것인데 좀처럼 울지 않던 그가 몰래 다녀간 것일까 마주하면 악다구니만 하게 된다던 그가 혼자 다녀간 것일까 빈 소주병이 버려져 있다 밤새 등 돌리고 앉아 목 놓아 울었을 고개 떨구고 어깨를 들썩였을 소주를 병째로 마셨을 끓어오르는 마음을 삭혔을 서럽고 쓸쓸한 그가
- <현대시학> 2016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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