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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영 시인 / 백련사 가는 길
동백은 잘 자랐더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붉은 꽃망울을 다복다복 수놓고 있었습니다 조촐하고 단아함 속에서 품어내는 숨은 향기는 화엄의 입구를 환히 밝히고 있었습니다
치맛자락에 그리움 한없이 풀어 매화를 그리고 새를 그리던 사람과 소곤소곤 정담 나누며 함박눈 두텁게 껴입고 강진 백련사 가는 길
마음으로만 마신 작설차(雀舌茶) 한 잔 참 따뜻하고 향기롭습니다
하영 시인 / 저녁강
생각을 불러내는 바람 소리 생각의 단단한 몸을 푸는 물소리
뒤에 뒤에 그 뒤에 물잠자리 날으고 너도 보고 있을 달 떠오른다
등 뒤에서 누가 자꾸 네 이름을 부른다
하영 시인 / 늦은 저녁이 달다
늦은 저녁 현관 앞 초코허브 눈빛 향기롭다
고마워서, 숱이 많은 머리를 어루만지며 귓불을 살짝 건드렸을 뿐인데 그 아이, 가진 향기를 몽땅, 내 손에 건네준다 그 손으로 먹는 늦은 저녁이 달다
그래그래, 오늘은 네가 고단한 내 하루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말랑말랑한 스펀지다 칠흑의 어둠을 뚫고 나온 협궤열차의 기적 소리다 정성껏 등피를 닦고 심지를 갈아 끼운 램프 불빛이다
달다, 혼자 먹는 늦은 저녁밥
하영 시인 / 파도에게
보물선의 손풍금 소리를 싣고 왔었다 암세포처럼 번지는 그리움을 싣고 왔었다 겹동백 붉은 선혈에 젖은 저녁놀을 싣고 왔었다
오늘은 또 눈부신 이별을 싣고 왔구나
내게 무엇을 주려느냐 내게 무엇을 주려느냐 또 무엇을 주려느냐
주었던 그 모두를 거둬 가거라 나를 떠나려는 순백의 영혼마저 싹 쓸어 가거라
하영 시인 / 주머니 속의 섬
하동포구 모퉁이를 돌아 19번 국도, 섬진강 모래톱에 서면 나는 문득 바다가 된다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섬 하나 꺼내 놓으면 바라만 보아도 가슴 아려 눈물 나는 윤슬, 함께 어울려 반짝이는 가리비 조가비 매생이들이 너나들이 하며 물보라꽃 높이높이 피워올린다 이윽고 마흔 아홉의 아버지 향기로운 윤슬, 밟으면 나타나신다 사랑에도 발효의 시간과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하고 잊는 것에도 오랜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하다시던 아버지, 환하게 웃으시며 등 내미신다 가까이 다가오는 수평선 자락 들어 올리면 작은 섬들이 파도소리를 내며 줄줄이 올라오고 누군가를 위해 따뜻한 등 내어주고 싶은 낮은 산들도 졸망졸망 뒤따라온다
하영 시인 / 할미새
할미새는 시를 모른다
시를 몰라도 그리움을 안다
그리움을 아는 것은 시다 영혼이 맑게 우는 것은 시다 천둥 번개에도 흔들리지 않는 사랑이다
노랑 할미새의 울음을 보던 날 달맞이꽃을 생각한다 달맞이꽃이, 칠레의 환페르난세스 점을 그리워하듯 가브리엘 미스트랄이나 파블로 네루다를 그리워한다
달맞이꽃의 서원이 달에 닿아 별에 닿아 서로의 눈물을 나눠 마시며 월견초나 월하향, 혹은 야래향이란 또 다른 이름으로 정겨웁게 서로를 부르듯 채송화꽃이, 꾀 11만 씨앗으로 이 땅에 와서 색색의 꽃잎으로 기쁨을 나눠주듯 눈물은 내 삶을 든든한 뿌리로 자라게 한다 절망을 먹고도 무럭무럭 자랄 수 있다면 절망은 더 없는 자양이 된다
절망의 절망에게 할미새를 보낸다 지구 반대편 누군가에게도 노랑 할미새나 알락할미새를 날려 보낸다 그리움을 하는 것이 바로 시가 되는 밤
하영 시인 / 작약이 가득 피어 있던집
무너진 토담 옆 깨어진 돌절구가 쓰러져 있다 강아지풀이 그쪽을 향해 머릴숙인다
거미줄애 매달린 빗방울들이 무지개를 껴언은채 달개비돛위에 떨어진다 그옆에 검정고무신 한짝 엎어져 있다 그속으로 어린민달팽이 느릿 느릿 기어간다
마음자리 은밀한 곳에 꼭꼭 숨겨두고 사무치게 외로울때마다 조금씩 꺼내보며 웃음짓는 간혹 따뜻한 아랙목에 등 붙이고 아무렇게나 누워 깊은잠에 빠져도 좋을 그리움 가득한 집
고요하던 마음끝자락 잠시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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