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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한길수 시인(청원) / 바람이 남기고 떠나는 것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18.
한길수 시인(청원) / 바람이 남기고 떠나는 것

한길수 시인(청원) / 바람이 남기고 떠나는 것

 

 

철 바뀌면 들녘은 찬바람 모여든다

바람은 잠시 뿐 머물지 못하고 흩어진다

 

충북 영동군 주곡리 마을 찬바람

붉은 선혈 선명한 땅 식히지 못하고  

땅에서 태어나 지키며 살고 싶었다  

한 줌 햇빛 그리워 나간 주민들

전쟁 공포에 떨다 지쳐 잠들었는지

아무도 몰랐다, 어디로 갔는지

서풍 따라 잠든 혼백들도 돌아올까

 

한국전쟁 무고한 희생 서린 노근리

아직도 총성이 그치지 않는 유배지 바람

 

그 마을에 미군 학살이 조용한 것은

검은 안경으로 눈 가린 맥아더 동상

펄럭이는 성조기에 볏단이 쓰러진다

추수 끝난 땅에 부는 풀벌레 바람

집 잃고 운다, 남은 사람처럼 모여 운다

응어리 진 진실은 어디에도 묘비가 없다  

올 해도 태풍이 그냥 지나가지 않았다

 


 

한길수 시인(청원) / 낙타의 아침

 

 

낙타의 눈망울 속에 들어가 잠을 자면

사막은 외로운 등불을 들고 밤을 밝힌다

 

내가 나를 간절하게 사랑 할 수 있을 때

다른 이가 나를 처절하게 사랑할 수 있다

내가 아닌 다른 이의 아픔을 사랑하기 위해서

나를 모르고 그를 사랑하려 고집하지 않겠다

부서진 꿈의 파편들을 외면하고 돌아선 어제

흔한 눈물도 흘려 보지 못한 상실의 모래성으로

한번도 멈추지 않았던 세월의 바람은 머물지 않고

지나간 것에 대한 아름다운 참회의 명상이 된다

세상은 거울 속에 있고 나는 거울 밖에 있지만

언제나 비누방울 같은 웃음을 내놓고 싶다

 

낙타에게 고요한 밤은 주어지지 않았다

그 눈 속에서 걸어 나오는 아침을 본다

 

 


 

 

한길수 시인(청원) / 낙타는 사막을 벗지 않는다

 

 

수천 년전의 눈발 날리던 아마르고사*

혹한에도 연명하는 풀들이 몸을 굴린다

사는 건 처음부터 목숨 건 투쟁이었을 것

모래바람 속을 떠도는 울분의 씨앗은

백 번 죽어 화려한 변명이 되고 말뿐

풀조차 神이 선택한 운명의 등고선이라면

늙은 하이에나의 울음 같은 낮은 목소리로

눈물가슴 한 골짜기를 비워두자

 

태양의 저주로 버림받았던 사막을 위해

간절한 기도로 창세기의 하루를 빌려오자

사막이 된 바다의 전설을 지도에서 찾는다

 

불황의 뼈들로 삶은 폐타이어처럼 굴러다니고

가시가 된 아홉시 뉴스가 귓속을 파고든다

끈질긴 생의 뒷골목 구차한 사랑조차

낙타에겐 단벌 멍에의 옷이 아니던가

물기 없는 저 구릉(丘陵)의 건조한 씨알 하나가

마지막 남은 목마른 소망이 될지라도

살을 태우는 사막의 하얀 밤을 갈고 갈아

싯퍼렇게 날 세우고 싶다

 

 


 

 

한길수 시인(청원) / 빈집

 

잿빛 정적이 내려앉은 이른 아침 동네를 돌다

문득 지나간 봄날을 잊어버린 정적보다 더한

음산한 빈집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손길 닿는 곳마다 향기로

소박한 식탁에 가족들로 북적대며

화기애애했을 자리

말 못할 사연 남기고 떠난

그들의 얼굴을 떠올려본다

외로워 지친 빈집 지나며

등골 휜 노모의 자식 사랑과

소원해진 형의 굳은 표정

실직한 동생의 처진 뒷모습 보듬으며 살았으면 좋겠다

할 일 못하고도 괜찮다던

창문에 걸려있는 핑계와

문틈 삐거덕 거리는 게으름도

분주한 손길로 외롭지 않는 건강한 삶으로 채우고 싶다

 

-2014년 <시와 시학> 여름호 육필시

 

 


 

 

한길수 시인(청원) / 잃어버린 시간

 

 

박한율을 보며 화사했던 여름 날

싱싱했던 땅 그림자를 따라

편 갈라 놀던 평범한 12살 한 아이가

슬쩍 청바지를 걷어 올리자

화폭에 이제 막 그려놓은 수채화처럼 가냘픈 무채색이다

 

아이들은 싸우면서 크고 하루가 다르게 자랄 거라며

무심코 지나는 시간만 하늘과 땅을 번갈아 보고 있다

 

어느 날 다리가 아프다는 소리를 하며

다리를 약간씩 절기도 했지만

크게 염려하지 않았다

 

해맑고 예쁜 아이의 이름은 박한율

한율이는 다리에 외상이 없으니 근육통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병원 의사에게 진찰을 받았다

 

의례적으로 치르던 엑스레이가 풀벌레 울듯 윙윙거렸다

검사를 마친 의사의 얼굴은 굳어졌고

소아암이라는 병명을 이야기할 때

한율 아버지는 천정에 나비가 힘겹게 날개 짓하며 돌아다녔다

 

열심히 앞만 보고 살면

행복은 자연스러운 훈장일 줄 알았던 날들이

갑자기 나타난 블랙홀로 무너져

절망이 한 순간인 걸 깨달았다

 

출퇴근길이 낯설어지던 시간,

회사와 집에서 병원에 매일 가봐야 했고

한율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한 아쉬움이

항암치료와 종양수술을 받던 한율이의 통증보다 더 커

눈에선 눈물이 흐르고 무겁기만 한 얼굴을 들 수가 없고

어깨를 들썩였다

 

멈춰버린 시간 앞에 깊은 한숨뿐이었다

 

평소 무심코 지나쳤을 병원,

병원의 방마다 슬픔이 수혈 팩에 담겨 흘러내리고

가슴 먹먹한 아픔의 시간들로 검붉게 뭉쳐있다는 걸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모습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올 때는 구멍 난 가슴에 부는 바람이

가을이 지나가기 전에 차가워 얼어 죽는 것만 같았다

 

어른도 힘들었을 약물치료와 수술을 이겨내고

다리에 철심을 박았다

통곡의 강에다 콘크리트 교량 다리 올리듯

아픔은 매순간 이어지고 있다

딸의 아픔을 볼 때마다 어머니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어

강을 이루지만 한율이의 간절한 마음은 잃어버린 시간 속에

조금씩 힘주어 그 강을 건너고 있다

 

병실의 방마다 신음하는 절실한 마음들이 알알이 익어가

소망도 하늘을 감동시킨다

병실에서 중학교 교재를 가져다 공부하여 졸업하고

통원치료하며 고등학교도 다니며 잃었던 웃음을 찾았다

 

힘들고 어렵던 시간이 터널을 지나 해맑게 웃고 있다

간절한 사랑이 시간과 따뜻하게 동행하여

한율이의 하늘은 여전히 싱그러울 것이다

지나간 시간의 의미보다 포기하지 않고

매순간을 사랑하며 살아갈 때 희망은 멀지 않다

 

-2014년 <한국신춘문예> 봄호

 

 


 

 

한길수 시인(청원) / 인연

 

 

장미의 꽃 몽우리가 아프게 피어날 때

새벽은 웅크린 가슴에서부터 걸어옵니다

싱그러운 손가락으로 창을 두드리던 소리

거친 아침의 햇살을 밟고 내려다봅니다

화사한 자태로 넘쳐나는 향기를 흩날리던

한번의 만남이 아쉬워 봄의 꽃잎 진자리에

온전히 찾아와 붉은 미소를 띄우는 사랑

 

아름답던 몇 날은 눈을 감아도 떠오르고

꽃잎 지는 서글픈 여행이라 바람은 말하지만

꽃가지 가시에 찔리도록 붙잡아도 가십니다

헤어짐은 만남의 기억이 아니라 약속이라고

어둠이 밀물처럼 내 속에 눈물로 가둬 놓고

더는 변하지 못할 카키색으로 남은 우리인연

기쁜 슬픔조차 내게는 새로운 그리움입니다

 

하루가 미워서 내버려진 어둠일지라도

가슴속에서 진한 향기만큼의 여운으로

서로 다른 곳에서 잇몸을 드러내며 웃어도

조화를 닮은 그대는 변하지 않은 외면입니다

돌아갈 길을 잃은 고통의 절망감이 찾아들 때

아픔은 기다림의 환희를 찾지 못하고 있을 뿐

진정 찾고자 하는 것은 바로 내 마음입니다

 

 


 

 

한길수 시인(청원) / 외로움도 별처럼 바다에 빠진다

 

 

하나 둘 별들이 스스로 바다에 빠져 가는 밤

여름바다는 잠들지 못하고 하얗게 뒤척일 때

들판에 고랑 매듯 오늘의 별들이 파도가 된다

바다는 말없이 그대의 눈에 들어가 일렁이며

금방이라도 뚝뚝 눈물을 흘러내릴 것만 같다

외로움이란 함께 있어도 끝없는 목마름이라고

하늘에 걸린 별들은 밤새도록 바다만 바라본다

지나는 자동차의 불빛들이 발끝에 내리비추고

바위 언저리에 부서져 내리며 얼굴을 덮는다

가까이 있는 그대를 간절하게 포옹하고 싶다고

다가가지 못한 바다에서 더 큰소리가 들린다

 

바다가 손을 들어 하나 둘 별들을 따는 밤

하늘도 바다라고 살을 맞대고 어둠을 풀어서

짙푸른 향기로 옷을 벗어 가슴에 내려앉는다

별 하나가 말없이 눈동자에 머물러 떠다니면

외로움도 별처럼 하늘에서 바다를 볼 것이다

소중한 만남을 곱게 간직할 수 있는 마음으로

애절한 그리움의 바위가 모래로 닳아버리는 날

바다에 닿지 않는 별은 별들대로 그냥 놓아둔다

슬픔도 지나버리고 나면 사랑하는 마음이었다고

바다처럼 끊임없이 그대에게 손을 내밀고 있다

남은 별들이 바다에 누우려고 서럽게 반짝인다

 

 


 

한길수 시인(청원)

1962년 충북 청원 출생. 경희사이버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4년 계간《현대인》 평론 등단, 2005년 계간《시와 시학》 시 당선. 시집 『붉은 흉터가 있던 낙타의 생애처럼』. 2009년 무원문학상 수상, 2014년 국제문화예술상 수상. 『미주문학』 전 편집위원, 미주한국문인협회 이사장 역임. 현재 <빈터> 동인으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