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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문혜연 시인 / ​불빛이 깜박일 때마다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19.
문혜연 시인 / 불빛이 깜박일 때마다

문혜연 시인 / ​불빛이 깜박일 때마다

 

 

오렌지가 툭툭 떨어집니다

덜 익은 빛이 터져 나옵니다

 

동시에 불이 꺼지는 두 창문

갈라진 두 어둠이 하나로 만날 때

어둠의 바깥이 안을 감싸고 있습니까?

안은 텅 비었거나 비어가는 중이거나

 

바깥의 사람은 생각합니다

허공으로 빨려들어 가는 불빛

아무 것도 없어야 있을 수 있는

모두가 늘 봤지만 늘 보지 않는

 

안의 사람이 생각합니다

사라진 빛은 어디서 돌아올까요

돌아온 사람은 떠난 사람이어서

때때로 제때 도착하지 못합니다만

 

문과 문 사이

바깥과 안의 사람 사이

오렌지 나무 한 그루를 세워 봅니다

주렁주렁 매달린 등불 같은 오렌지

가장 깊은 어둠부터 물들여 가는데

 

깜빡이는 가로등 아래

잠시 반짝이는 잠든 얼굴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빛은

조금 빠르거나 조금 늦게

 

오렌지처럼 고요한

바깥도 안도 아닌 곳에서

사라짐과 멀어짐 사이에서

불빛이 깜빡일 때마다

 

오렌지가 툭툭 떨어집니다

어둠으로부터 빛이 무르익습니다

 

ᅳ『현대시』 (2019, 11월호)

 

 


 

 

문혜연 시인 / 강릉

 

 

선과 해변을 걸었다

선은 해변의 소나무들이 잎은 짧아도 더 크게 자란다고 말했다

대체로 바닷가에서 자라는 것들이 그렇다고 단단하고 향이 짙다고

바다와 모래,소나무가 끝나지 않았다

 

걸음마다 해변의 이름이 달라진다

순개울, 순포, 순긋…

 

물놀이엔 늦은 계절이지만

모두 뛰어드는 한낮

되돌아오는 파란 입술들을 지나

 

해변의 한가운데에서 하는 모래 장난

나는 집인지 무덤인지 모를 작은 언덕들을 만들다가

선이 작은 천사들은 빚는 걸 보다가

 

작은 도시는 금방 어두워져서

우리는 손을 잡고 돌아간다

 

떠나왔다는 건 밤에 더 선명한지 낮의 모습은 사라지고

밤의 해변은 넓고 검고 낯설어서 가끔 지나가는 차의 불빛들을 보며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생각하는데

 

빛을 따라 걸으면 된다고

나무들은 모두 빛을 향해 기운다고

선이 흔들리지 않고 걷는다

 

밤의 기차에서 선은 유리 너머를 보고 나는

유리에 비치는 선의 얼굴을 보다가 잠이 들었는데

어디든 왜 돌아올 때는 조금 더 빠른지

내렸을 때는 한밤중이었다

 

역을 빠져나가다 뒤를 돌았을 때

여전히 유리 밖을 보고 있는 얼굴 하나 씻어도

씻기지 않던 흙 묻은 손을 맞잡고

 

모든 게 멈추면 풍경은 정물로 남는다

영영 한곳에서만 빛이 드는

 

어둠 속에 솔잎 냄새 점점 짙어지던

순개울, 순포, 순긋…

 

사람들은 잘도 해변을 구분했지만

모래 위를 걷는 게 더 힘들다는 걸 다음날에야 알듯이

나는 지나고서야 해변의 이름을 알았고

 

모래로 빚은 천사들은 날지 못한다

그걸 알면서도 빚는 사람의 마음과

 

모든 해변은 땅끝이라는 생각

지도를 그리는 마음으로 걷던

 

기차는 빛 속에 잠겨 있었다

 

 


 

 

문혜연 시인 / 15세 관람가

 

 

긴 복도를 지나

무거운 문을 열면

어둠이 가둔 어둠

 

새어나가지 않는 빛과 소리

극장은 언제나 지나치게 서늘합니다

 

영화는 코미디에 약간 액션 가족 영화

막 뺨이 부어오르고

목뼈가 으득

 

팝콘을 피처럼 흩뿌리고

죄송합니다 사과하면 옆에서 당신이 웃어요

 

아니 대체 언제부터 저런 걸 눈 뜨고 봤나요?

매 맞는 걸 웃으면서

나는 눈을 감습니다

 

우리는 1인 시위를 지나가는데

잘못한 만큼 벌 받으라는 붉은 글씨

뒤에 있는 식당에 들어가요

오후는 따갑습니다

견디기 어려울 만큼

 

저 사람 꼭 NPC 같아

그런 말 하는 거 아냐 근데 NPC가 뭐야?

옆자리 중학생과 엄마의 말 들으면서

냉면을 이로 끊어내고

 

우리는 가벼운 게임을 해요

벌칙은 상대의 뺨 때리기

당신을 때리려는데

자꾸 빗맞습니다

 

손은 어디에도 닿지 않고

당신은 놀리듯 얼굴을 내밀고

두 팔을 허우적거리는데

 

눈을 뜨면 당신이 내 뺨을 때려요

그리고 속삭입니다

왜 이렇게 힘을 주고 자냐고

 

따끔한 뺨에 손을 대봅니다

사람들 위로 푸른빛이 번들거리고

영화는 익숙한 방법으로 끝나갑니다

 

서로 싸우고 때리고 맞고

사랑하고 끝

엔딩 크레딧처럼 지나가는

잊히지 않는 얼굴들

 

소리도 안 나오는 꿈에서

두더지 게임처럼

고무망치라도 휘두르고 싶었는데

 

사랑은 늘 끝의 다른 얼굴

그냥 지나가 주세요

나는 가만히 끝을 기다립니다

 

와하하 사람들 웃는 소리

놀라서 팝콘을 흩뿌려요

웃을 때 옆 사람을 때리는 버릇

여기저기 발견되는데

 

 


 

 

문혜연 시인 / 몽당

 

 

거기 눈이 그쳤나요?

여긴 아직입니다 한참이에요

 

사각사각

눈 쌓이는 소리 들으며 연필을 깎습니다

 

작고 작은 소리입니다

들으면 들리고

보면 들리지 않는

 

툭툭 떨어질 때마다 나무껍질 냄새

문득 그 여름

우리가 오른 전망대

 

한 걸음 먼저 도착하는 빛을 따라

투명한 바닥을 걸을 때

비밀처럼 들려오던

 

사각사각

발밑의 호수

작은 집과 더 작은 방

모든 걸 멈춘 것 같아 우리는 눈 감았고

 

누에 치는 소리라는 건 한참 후에나 알았습니다

작고 또 커다란 누에의 방에는

누에도 누구도 보이지 않고

 

그 후로 가끔 고요하면

어디선가 들려옵니다

 

눈이 쌓이다가

누에가 잎을 갉아 먹다가

몇 자루 연필을 깎는

 

거기 아직 눈이 오나요?

여긴 그칠 줄을 모릅니다

 

희고 통통한 누에들이 뽑아낸

희고 긴 실타래

 

당신 그걸 잡았다지 않았어요?

연필을 잡은 사람은 아직도 그대로 잡고 있는데

 

당신이 가르쳐 준 대로

심은 길고 뭉툭한

나무는 매끄러운

 

연필들 닳아가는 밤

잠실의 호수는 혼자 걸으면

알 수 없는 깊이로 자꾸 커지는 것 같습니다

 

높은 곳에서는

눈이 위로 올라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던데

 

눈 감으면

호수에서 눈이 쏟아집니다

 

사각사각

흰 눈이 어둠을 갉아먹습니다

 

 


 

 

문혜연 시인 / 아무도 모르는 누구나 아는

 

 

이곳은 흰 나무들의 숲

젖은 종이 냄새가 나요

훗날 발견될 글자들처럼

 

새를 주운 아이는

손안의 심장이 뛰는 리듬을 잊지 못합니다

지그시 눌러보면 두근거리는

 

돌아갈 밤이 없는 아이는

둥지를 더듬습니다 까치발로

새들의 둥근 어둠을 훔치고

 

흰 나무에 남은 줄무늬 같은

흔적만이 그 밤을 기억합니다

노인은 자기 손바닥을 쓸어보며

작은 등 하나를 기억하고요

 

아이가 사라진 세계는

붙잡혀본 적 없는 손목들만 남아서

긴 소매 속으로 자라나는 어둠

 

낮과 낮과 낮의 사이로

문득 겨울이 옵니다

떠나거나 떠나지 않거나 그렇게

때를 놓친 새들은 살아가는데

 

 


 

 

문혜연 시인 / 폴카 폴카 폴카

 

 

그러나 우리는 헤어집니다

맞아요, 그럴 시간이에요

어제도 우리는 팔짱을 꼈지만

 

실수와 실패는 얼마나 머나먼가요

어느 것에든 쉽게 익숙해지는 우리가

 

다 같이 둥글게 서서 춤을 춥니다

두 개의 원이 겹쳐집니다

작은 원과 조금 더 큰 원

노래에 맞춰 짝과 춤을 춰요

 

제 앞의 짝을 사랑한 나는

당신과 여덟 박자를 세고 헤어지고

또 다른 당신이 내게 옵니다

 

어리석게도 모두 진심이어서

춤이 끝날 때면 슬프면서도 기쁘고

 

주어진 박자 안에 모두 마쳐야 하는

슬로우 퀵퀵의 스텝들

계속 어딘가로 되돌아가는 노래

 

여행자와 방랑자는 처음부터 달랐을까요

한 사람만 멈춰도 끝나버리는

 

좀더 크거나 작은 당신들이

차례로 내 앞을 떠나다 보면

내 몫의 당신은 더 남아 있지 않고

 

두 발은 저절로 춤을 추고

두 팔은 허공을 감싸 안고

처음인 듯 명랑하게 회전합니다

 

반 바퀴를 덜 돕니다

없는 당신을 내 자리에 세워두고

나는 당신의 자리에 서서

여덟 박자 후 당신을 떠나갑니다

 

멈추지만 않는다면

촘촘해도 엉성해도 원은 원으로

굴러가기 마련이니까요

가끔 누군가는 혼자 춤을 추겠지만

 

돌아온 사람인지 떠나는 사람인지

발걸음만 봐서는 알 수 없고

안녕, 거기 혹시 내가 있나요?

사랑에 빠질 차례입니다

 

 


 

 

문혜연 시인 / 러브 레터

 

 

 겨울이었다 현과 영화를 봤다 청춘 영화 속 주인공들은 눈길 위를 달리고 이불 속 시린 발을 비비며 청춘은 왜 달려? 묻자 현은 어깨만 으쓱하고 현은 내 발을 자기 허벅지 아래 넣어주고 난 한 번도 전속력으로 달려본 적이 없어 하면 현은 잠시 웃다가 그럼 곧 그때가 올거야 현은 말하고 난 전속력으로 달리기엔 너무 찬 발을 갖고 있는데 현의 다리는 따뜻하고 현에게는 차갑고 나에게는 따뜻한 이불 속에서 우리는 천천히 미지근해졌고 귤을 먹었다 달콤한 귤도 반씩 나누고 밍밍한 귤도 반씩 나누고 노랗게 물든 손끝으로 서로를 만지던 그런 겨울이었다 눈이 많이 내린 날이었다 현과 나는 같이 걷고 있었다 발가락에 감각이 없어서 종종 멈춰 발가락을 움직여봐야 했고 현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는데 무슨 말을 하고 있었더라 현은 자꾸 그치? 하고 물으면서 멀어지고 있었는데 점점 빨라지더니 결국은 달리기 시작했고 눈길엔 현이 달려간 발자국들이 선명했다가 다시 내린 눈으로 채워지고 현은 그때였고 나는 아직이었고 늦거나 이른 시간 속에서 요즘은 4시면 해가 지는 것 같고 발은 여전히 차가워서 양털 양말을 샀는데 양털이 자꾸 빠지고 자다가 이불 밖으로 발이 빠지면 발가락을 움직여봐야 했다 밖엔 현이 벌써 열두 번째 달려가고 있었다 밟지도 않은 눈이 자꾸 밟히는 겨울이었다

 

 


 

문혜연 시인

1992년 제주 출생. 201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동 대학원 석사 졸업.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