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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희 시인 / 논골담길 벽화
뱃고동 소리가 들리는 논골담길 벽화를 따라 걷는다
그 벽화에 유년의 기억들이 살고 있다 말뚝박기 놀이 하는 사내아이들, 흰 궁둥이를 까고 볼일 보는 소녀들 모두 집어등이 켜져 있는 아버지의 바다를 함께 움켜쥐고 있다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의 바다, 그리움이 해무처럼 처절하게 내린다 그때 등대 아래에서 그물을 깁던 어머니, 신당으로 가신다 문틈으로 들려오는 초혼의 목소리 바람 타고 등대길을 오를 때면 그녀는 상처 깊은 기억의 포구를 또 연다
한 잔의 술로 등대의 허리춤에 기대어 사는 논골담길 사람들 고단한 삶의 상속자들, 바람이 그들의 어깨를 쓸어내는 시간, 생의 외침은 길이 없어도 바다를 달린다 바다의 신음소리에 내 유년의 기억도 푸르게 잘려 나간다
-시집 <13월의 유다>에서
홍경희 시인 / 간고등어
중년 부부가 생선 좌판 위에 부둥켜안고 있다
지난날 별을 찾아 수없이 오대양을 가로질렀다 태풍이 흰 이빨을 드러낼 때에도 살아남았던 그들, 열대어의 수중발레를 보며 때로는 낭만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치어들의 완성된 사주를 위해 성황당을 찾아 빌기도 했다 원양어선의 그물을 보고 가슴 졸이며 밤을 지새운 날들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북극성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소금에 절여진 몸으로 주상절리처럼 누워 있다 점점 거칠어지는 숨소리를 내면서도 그들은 생각한다 늦은 밤, 오르막길을 오르는 어린 물고기들을 비춰줄 가등은 켜져 있을까 혹여, 교회의 공터에 앉아 울고 있지는 않을까 화덕의 연탄은 잘 피고 있을까 문틈으로 기어드는 삭풍을 막으려고 문풍지는 달았을까 점점 희미해지는 눈빛,
나의 검은 혀가 그들의 무덤이었다
홍경희 시인 / 어느 아침의 문장들
쉰넷 생일 아침에 안면 없는 당신의 유고시를 만난다
하루치의 알약을 삼키고 하늘에 매달리려는 기대와 사람에 기대려는 문장의 실밥들을 한 올씩 풀어 헤치며 남겨 놓은 시편들
나와는 슬픔을 해명하는 방식이 다른 당신의 유언을 읽으며 매듭짓지 못한 문장을 많이 가진 나는 조금 무서워진다
씁쓸한 독백을 선물로 받는 생일이 한 번쯤 있어도 상관없겠지
문득, 고쳐 쓰고 싶은 그러나 끝내 바뀔 수 없을 것만 같은 나, 라는 문장들이 떠오른다
가끔 울음은 뻣뻣하게 경직된 어깨를 풀어 주는 처방이 되기도 한다
홍경희 시인 / 팔월의 그림
명아주 같은 그녀, 해수욕장을 헤맨다 폭염에 등껍질이 벗겨진 빈병들 알뜰히 포대자루에 채워 세상을 무단횡단하며 손수레를 끌고 집으로 돌아온 저녁이면 몸에선 유통기간이 지난 까나리젓갈 냄새가 난다
빈병무덤의 키가 고분古墳처럼 높아질수록 그녀를 바라보는 아들의 흰자위엔 울음 섞인 저녁놀의 잔영이 짙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제발 그만 좀 하세요” 하는 불효의 절규와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고생 안 한다”는 모성애의 절규가 오가지만 현실의 무게 앞에선 언제나 묵언黙言이다
센서가 고장난 용광로처럼 팔월이 달아오르던 밤, 그녀가 응급실로 실려 간다 119 구급대의 사이렌 소리가 멀어지자 잡초 무성한 마당 한켠의 빈 수레 녹물을 흘리며 훌쩍거린다
무덤처럼 쌓인 빈 병들도 덩달아 엄마의 손을 놓친 미아처럼 퍼질러 앉아 징징거리고 있다
홍경희 시인 / 해안선에서 내가 흔들릴 때
길게 드러누워 있는 아침바다 불러도 대답이 없다
내 몸속엔 골프 회원권이 수십 장 모여 산다 내 몸속엔 벤츠 리무진 몇 대가 양주에 취해있고 내 몸속엔 별처럼 다이아몬드가 박혀있고 내 몸속엔 별장이 유혹하는 밤도 있다 내 몸속엔 비행접시가 떠 있고 내 몸속엔 유리구두도 한 켤레 놓여 있다 내 몸속엔 북극곰의 쓸개즙이 부초처럼 떠다니고 내 몸속엔 모피코트가 수인번호 44를 달고 있다
돌아오는 길 내 몸속에서 밍크코트가 빠져나가자 바다는 내 푸른 영혼 쪽으로 몸을 뒤척였다 밤새도록 고층빌딩 하나 허물었다 바다는 늙은 부처의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맨몸으로 걷는다 웃는다 웃는다 바다가 해바라기처럼 웃는다
아버지의 그 눈빛이다
홍경희 시인 / 환절기
마음을 거들어 주는 사람도 없이 서편 하늘은 언제 저렇게 붉어졌나
지난여름에 태워 버린 말들을 안주 삼아 비워낸 소주 몇 잔으로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잃어버리고 싶은 밤
가볍게 들려오는 뒷담화같이 가끔 흔들려도 흉이 되지 않는다고 잠시 쉬어 갈까 유혹하는 골목길 연인들의 대화들
단숨에 읽어내기 어려운 문장의 쉼표 같은 이 계절의 표현법을 해석하며 나도 골목의 빈방으로 숨어들고 싶다가도 또 아무 데도 묶이고 싶지 않은 나는 아무래도 틈이 많은 사람이다
홍경희 시인 / 어떤 사내의 바다 -하꼬다떼 발 새벽열차에서
징용인들의 영혼이 별이 되어 뜬다는 북해도 하늘에 붉은 핏발이 짙게 선다
하꼬다떼를 출발한 구절리행 새벽열차 그가 타고 아내도 탄다 지하 갱 속에 갇혀버린 그들의 생, 파열된 생이 나를 흔든다
해저 터널도 지나고 얼음상자 속 은갈치 같은 삼나무숲도 지나고 아오모리를 강타한 시퍼런 눈발들 앙칼진 비명이 열차바퀴에 깔린다
푸르게 깨어나는 새벽 그 사내가 떠나간다, 아리랑 고개를 넘어 유빙遊氷이 불법체류 한 해류를 따라 낯선 도시로 어둠처럼 펄럭이며 간다
그가 낮은 곳으로만 흐르는 까닭을 제설용 스프링클러의 눈물이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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